신용보증재단 직원이 콘트라베이스를 못 숨김 8화

by 설다람

“도한이가 차에 치였대요.”

“뭐?”

갑작스러운 소식에 충격받은 서규가 물었다.

“크게 다친 곳은 없다는데…문제는 공연이네요.”

아소의 말에 서규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동안 밤새워 한 특훈이 물거품이 된다.

“둘이서라도, 해 보죠. 오빠.”

평소와 달리 아소가 자신 없이 말했다.

“아니야, 여기 도너츠 잼데이야. 자칫하면 다신 재즈 신에 얼굴 못 비칠 수 있어. 나는 몰라도, 넌 그러면 안 돼.”

서규는 아소를 걱정했다.

“내가 매니저한테 가서 말할게, 못한다고.”

“아녜요. 제가 할게요. 베이스.”

현예가 서규를 저지했다.

“선임님이요?”

“받쳐주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어요. 구성도 모두 외웠고요.”

“가능하시겠어요.”

서규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흔치 않은 기회예요. 놓칠 수 없어요. 믿어도 좋아요.”

“선임님이 하신다고 해도, 콘트라베이스가 없어요.”

“다른 사람한테 빌려볼게요.”

현예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수염을 잔뜩 기르고 선글라스를 쓴 덩치 큰 남자가 마침 콘트라베이스를 들고 클럽 안으로 들어왔다. 어마어마한 거구였다.

“진짜 하시게요?”

여전히 서규는 확신이 서질 않은 듯했다.

“서규 씨. 저는 하지 못할 땐, 하지 않아요. 할 수 있는 건, 반드시 하고요. 그러니 걱정 말아요.”

현예가 서규의 어깨를 꽉 잡고 말했다.

서규가 고개를 끄덕였고, 현예는 털북숭이 남자에게로 갔다.

“저기 혹시 죄송하지만, 베이스 좀 빌릴 수 있을까요.”

콘서트 주자의 남의 악기를 빌리는 건 대단한 결례였다.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도 불쾌한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여기가 잡스러운 클럽이라고 들은 적 없는데…”

남자는 건방지게 말했다.

“부탁드립니다.저희 베이스 주자가 사고가 나서 못 온다고 해서요.”

현예는 정중하게 다시 부탁했다.

“구리면, 사용료 줘야 할 거요.”

씨익하고 남자가 반쪽짜리 웃음을 보였다. 어디선가 본 적 있는, 재수 없는. 남자는 한 팔로 콘트라베이스를 들어 넘겼다.

“그런데 구면 같은데.”

남자가 수염을 쓸며 말했다.

“초면입니다.”

딱 잘라 현예도 말했지만,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콘트라베이스를 끌고 나타난 현예를 본, 서규와 아소는 얼굴이 환해졌다가 어두워졌다. 베이스 구해 왔으니, 다행이긴 한데 동아리에서 몇 번 쳐본 실력으로 자신들을 따라올 수 있을까 걱정되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망하려면 시원하게 망하자. 후회 없이

마음가짐과 달리 서규의 손가락이 덜덜 떨렸다. 항상 우렁찬 아소도 위축된 것 같았다.

침착하자, 그런데, 헤드 멜로디가 뭐였더라.

완전히 얼은 서규는 건반을 누르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때 베이스가 튀어 나왔다.

‘Things to Come’의 멜로디였다. 지난 2주 동안 죽도록 연습한 속도로, 베이스가 현란하게 선율을 잡고 달렸다.

‘이게 동아리에서 몇 번 친 실력이라고?’

감탄할 새가 없었다. 아소가 먼저 스네어로 필인을 넣고 과감하게 들어갔다. 자신이 따라붙어야 할 타이밍이었다.

솔로 직전 합을 맞춘 것처럼 브레이크를 걸었고, 서규가 열 손가락으로 첫 번째 코드를 쳤다. 그리고 손가락에 불을 붙였다. 얼음이 모두 녹았고, 지금은 수증기까지 피어오르고 있었다. 전기가 손끝에서부터 퍼져 온몸을 깨웠다. 아웃한 프레이즈를 반복해서 넣자, 아소가 신음을 냈다. 드럼이 더 조밀하게 박자를 쪼갰고, 리듬이 더 쫄깃해졌다. 베이스는 이 모든 음이 튀어 나가지 않게 잡아주면서, 공간을 비워주었다. 배려심 넘치는 연주였다.

땀이 이마에 맺혔다.

서규는 현예를 바라보았다. 거의 베이스를 안고서, 감은 눈으로 소리에 집중하고 있었다. 온몸이 하나의 리듬이었다.

솔로를 절정으로 띄운 다음 서규가 베이스에게 배턴을 넘겼다. 그러나 현예는 아소에게 곧바로 토스했고, 피아노와 드럼의 트레이드로 이어지게 했다. 주먹다짐 같은 트레이드가 끝나고 헤드로 돌아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관객들이 아우성치고, 비명을 질렀다. 벽을 무너뜨릴 기세였다.

흥분한 아소가 일어 나 양팔을 들고, 트로피 같은 괴성을 냈다.

묵직한 화음을 찍고 나서 소리가 멈췄다. 거친 호흡이 가라앉지 않았다. 이마에 맺힌 땀을 손등으로 닦아냈다. 가슴이 세차게 뛰었고, 손에서 힘이 풀렸다.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 같았다.

숨을 고르고, 현예는 콘트라베이스를 들고 무대에서 내려왔다.

“덕분에 잘 썼습니다.”

이오케이에게 콘트라베이스를 돌려주며, 현예가 감사를 표했다.

"잘 들었어. 현예. 음악 그만뒀다고 들었는데, 실력은 여전하네."

웃음기를 머금은 걸걸한 목소리로 이오케이가 말했다. 순간 현예의 뒷골이 차가워졌다. 왜 익숙한가 했다.

"여전히 구려."

킬킬거리며, 이오케이 아니 이민락이 비아냥거렸다. 소벌린 콘서바토리에서 1등을 놓치지 않았던 녀석, 바로 이민락이었다. 수치심에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수염 때문에 몰라봤어. 잘 지내?"

현예가 어색하게 안부를 물었다.

"바쁘지, 앨범 작업하랴, 세션 녹음하랴, 인터뷰에, 라이브 촬영까지 바빠 죽겠지. 그래도 시간 내서 여기 왔어. 한국 재즈씬 망하기 일보 직전이라던데, 자극 좀 줘야지. 애송이들은 발도 못 담그게. 그래야 수준이 높아지지 않겠어?"

거만하게 이민락 말했다. 사람을 얕잡아보는 태도는 죽지 않았다.

"사용료는 안 받을게. 동문 좋다는 게 이런 거 아니야."

이오케이가 어깨를 으쓱였다.

현예는 말을 아꼈다. 더 섞어봤잖아, 기분만 더러워질 뿐이었다.

뒤에서 서규가 자신을 불렀고, 현예는 고개를 돌렸다.

“나중에 또 봐.”

호쾌하게 내민 이오케이의 손을, 건성으로 잡아 흔들고 자리를 떠 서규 네로 갔다.

오늘 생긴 열성팬에 둘러싸인 아소는 간신히 사람들을 물리치고, 바를 나왔다. 서규와 현예도 뒤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방문객 제한 시간이니, 지금 오지 마라네요.”

도한과 통화를 마친 아소가 전했다.

“상태는 괜찮대?”

서규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뭐, 목소리는 멀쩡하네요. 그런데, 언니 아파요? 얼굴이 새파래요.”

“조금 현기증이 나네요.”

힘없는 목소리로 현예가 대답했다.

“역까지 바래다드릴게요.”

서규가 앞서 나왔다.

“괜찮아요.”

“안색이 나쁘셔서 그래요.’

“응, 언니 오빠랑 먼저 가요. 전 바에서 잼데이 자리 지켰다가 갈게요. 오프닝 세션만 하고 튀면, 실례잖아요!”

현예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 자칫하면 쓰러질 것 같았다. 서규를 더 말리지 않은 것은, 실용적인 이유에서였다. 역까지 걷다 진짜 엎어질 수 있으니. 이런 길바닥에서 비명횡사하고 싶지 않았다. 최악의 기억을 마지막 기억으로 가져가는 것은 더더욱 용납할 수 없었다.

서규는 걷는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정말 ‘바래다’ 주기만 했다. 지하철 입구에서 헤어지기 전, 서규가 고백하듯 말했다.

“진짜 최고였어요.”

차마 고맙다고 답하지 못했다. 최고가 아니란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현예는 희미한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하고, 내려갔다.

“신 선임 어디 갔어?”

“그러게요. 정시 요정이 늦잠 자나?”

“전화해 봐.”

석 팀장의 지시에 따라 윤 책임이 현예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는 혼자서 울다 음성 사서함으로 연결되었다.

“전화도 안 받는데요.”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야.”

부재중 전화 세 통에, 문자 메시지가 하나 도착했다.

회사로부터의 연락이었다.

‘죄송합니다. 몸이 많이 안 좋아서, 연차 좀 쓰겠습니다.’

뒤늦게 석 팀장에게 메시지를 보냈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다.

전화도 받지 않았다.

‘뭘 더 해야 하나.’

내 인생을 대신 살아줄 사람들도 아니고, 내 일생을 바쳐서 할 일도 아니다. 단지 살기 위해서 생명의 일부를 매일같이 잘라내는 행위를 하는 공간이 회사다. 오늘 처리할 급한 건은 없었다. 몸이 아프다고도 말했다. 그렇다고 이렇게 무시할 일인가.

속에 쌓인 회사에 대한 증오의 규모가 생각보다 크다는 사실을, 현예는 처음 깨달았다.

‘Bebop in Pastel’이 유일한 배출구였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마저도 이제 버겁게 느껴졌다.

‘이민락, 이오케이’와의 조우는 물리적인 통증을 가슴에 남겼다. 갑갑했고,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냉장고에서

수면제를 꺼내어 먹었다.

머릿속 구름이 팽창했고, 몽롱한 의식이 길을 열었다. 둥둥, 베이스 소리가 들렸고, 천천히 음을 따라 걸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닥에 원형의 파장이 일었다.

점점 더 소리가 커졌고, 음의 진원지에는 한 선배가 서 있었다. 시그니처인 해맑은 미소와 함께.

"넌 무조건 베이스를 해야 해."

"왜요."

"3년째 여기서 나만 베이스 치고 있거든. 대타가 필요해."

"선배는 피아노 전공자 아니세요?"

"음대생은 전공 악기 말고 다른 악기로 가입해야 해."

선배는 악기 보관대에서 커다란 케이스를 꺼내고 나서, 지퍼를 열었다. 황갈색에 딱정벌레 같은 모양의 거대한 악기를 한 손으로 잡고 선배가 현을 튕겼다. 굵고 낮은음이 방안에 울렸다.

"어때 묵직하지? 너에게 이보다 잘 맞는 악기는 없다! 이어라 B의 의지."

피아노 전공에 경영과 복수 전공, 재즈 오케스트라 콘트라베이스 주자, 의망 도서 만화책 테러범. 혼종적인 정체성을 지닌 선배는 가히 괴수라 불릴 만큼, 전방위적으로 특출났다.

학교에서 일곱 걸음만 걸으면 친구를 만난다는 인싸 중에 인싸였다.

소비자행동론에서 어쩌다 같은 팀이 되었고, 재즈 오케스트라 신규 회원 모집 부스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재즈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등록을 마쳤고, 꼼짝없이 콘트라베이스를 전수받게 되었다.

직각자처럼 자란 현예가 꺾은 첫 번째 커브였다.

수업을 마치고, 동아리방으로 끌려가 베이스를 쳤다. 손가락 껍질이 벗겨질 때마다, 밥을 얻어먹었다. 베이스를 위한 헨젤과 그레텔이었다. 굳은 살이 박이고 F 블루스를 칠 수 있게 되자, 더 많이 얻어 먹고, 더 많이 쳤다. 동아리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고, 거의 전공을 바꾼 느낌이었다.

‘뭐 해 신현예, 연습하러 가야지!’

길을 걷다 마주친 선배는 가방을 잡고 어김없이 푸른 중앙동아리 회관으로 현예를 데리고 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2층, 5층, 1층을 눌렀다가 모두 취소시키고 6층을 눌렀다. Ⅱ-Ⅴ-Ⅰ, Ⅵ였다.

‘이렇게 안 하면, 동아리방 안 나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진지하게 했고, 현예는 말도 안 되게 어이 없는 표정을 지었다.

문득 현예는 낡고 칠이 벗겨진 옥색 철문을 보고 싶어졌다.

점심을 먹고 나서, 현예는 이산대에 갔다. 이산대 입구역에서 진짜 이산대 입구까지는 걸어서 30분이 걸렸다. 그리고 이산대 입구에서, 중앙동아리 회관까지도 걸어서 15분이 걸렸다. 버스를 타면 빠르게 갈 수 있었겠지만, 물에 들어가기 전 손과 발을 먼저 물에 담그는 것처럼, 학교로 돌아갈 준비가 필요했다.

공학관을 지나서, 촌스럽고 투박한 푸른 사각 건물이 나타났다. 현예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6층을 눌렀다. 가장 먼저 만화 동아리가 눈에 들어왔다. 예전과 다름없이 고밀도의 업력을 자랑하는 고퀄리티 포스터를 대문짝만하게 붙여두고 있었다. 포스터에는 ‘인싸들아 우리 거 뺏지마라, 안 그래도 부원 없는데.’라고 붉은 글씨로 강렬하게 쓰여 있었다. 간절함이 느껴졌다. 몇 번 포스터 외주를 만화 동아리에게 주자고, 주장했던 급진적 아웃사이더 연대 소속 회원들이 생각났다. 극 인싸인 회장 덕에 서브컬처로의 체제전복은 번번이 좌절당했다. 재즈는 서브컬처조차 못 된다는 게 인사이더 회장의 논리였다. 서브컬처보다 더 서브컬처함으로써, 얻게 되는 고유한 성질은 인싸의 것으로 향유될 수밖에 없다는, 맹목적인 믿음에 가까운 논리. 아싸들은 결코 이해하지 못했고, 거대한 인싸 물결에 의해 변방으로 밀려났다. 알력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모두 부차적인 문제였다.

재즈 오케스트라부에 입단한 사람들이 실천해야 할 제1 덕목은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재즈를 전파하는 것이었다. 사실 이 목표만 달성된다면 방법론이야, 무엇이 되든 상관없었다.

조금씩 동아리실에 가까워져 갔고, 기억이 머릿속에서 구체적인 윤곽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복도 끝 낡은 옥색 철문 위에는 ‘Beboppers’라는 나무 명패가 붙어 있었고, 벽면에는 그동안 동아리에서 연 공연 포스터가 벽지처럼 붙어 있었다. 연도 순으로 정리하지 않고, 제멋대로 붙여져 있는 탓에 오래 걸렸다. 자신과 선배와의 첫 공연을 찾아내는데.

‘Bebop in Pastel’

아이가 파스텔로 색칠한 듯한 재즈 연주자들의 모습이 그려진 포스터였다.

멍하니 포스터를 바라 보고 있을 때, 누가 뒤에서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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