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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리?”
베리? 현예는 귀를 의심했다. 자신을 ‘베리’라 부르는 사람은…
“너, 맞구나. 여긴 어쩐 일이야?”
인싸 중의 인싸였던 재즈 오케스트라부 회장, 배홍지뿐이었다.
“홍지? 그냥 와 보고 싶어서. 넌?”
“나 우리 학교 교직원이야!”
대단하네, 현예는 이산대 교직원 서류 전형에서 탈락했던 사실을 떠올렸다.
“진짜 반갑다. 너 유학 가고 나서 소식 궁금했는데. 아는 사람이 없더라고, 소셜미디어도 안 하고.”
홍지가 섭섭한 투로 말했다.
“그래도 어, 우리가 어, 얼마나 같이 어, 연습했는데, 어!”
홍지는 특유의 어부 말투로 쏘아댔다. 친근하기 그지없는 말투였다. 사람 좋은 홍지는, 그 누구와도 살갑게 지냈다. 얼타는 자신이 행여 적응 못 하고 동아리를 나갈까 봐, 1년 내내 노심초사했다는 건, 첫 번째 공연을 끝내고 난 뒤풀이에서였다.
“졸업하고, 네가 소벌린 콘서바토리에 갈 줄은 꿈에도 몰랐어. 그렇게 진지한 줄 몰랐는데.”
“나도 몰랐어. 그렇게 진지하게 덤빌 줄.”
“난 그동안 이설 선배가 시켜서 울며 겨자 먹기로 베이스 치는 줄 알았었어.”
홍지가 우스갯소리를 했다.
“선배가 시킨 건 맞아, 겨자는 안 먹었고.”
현예가 이상하게 농담을 받았다.
“그나저나 선배도 대단했단 말이야. ’Village Catwood’에서 연주하고 만다.’라고 잘도 매일같이 말하고 다녔잖아.”
정말 매일같이 말했다. 가볍게 그러나 진심을 꽉 눌러 담은 구호였다.
“솔직히 난 진짜 할 거라 믿었거든, 남다른 게 있었잖아, 선배 연주에는…하.”
깊은 한숨을 홍지가 내쉬었다.
현예도 뒷말을 이어 나갈 수 없었다.
‘Village Catwood에서 연주하고 만다.’
그게 언제부터 자신의 구호가 되었었는지, 현예는 기억나지 않았다.
“있지 그런데 사실 여기 트럼펫 연습하러 왔어! 아직 창고가 비었거든.”
홍지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창고는 재즈 오케스트라부 맞은편에 있었다.
“마음대로 사용해도 되는 거야?”
“한 번 비밥퍼즈는 영원한 비밥퍼즈지. 사실 음대 녹음실도 몰래 쓰고 있어.”
“학교에 허락받아야 하는 거 아니야?”
“나 아니면, 누가 녹음 사운드 봐주냐. 물론 후배들한테도 가르쳐 주고 있어!”
그게 문제가 아니지 않나.
“그러니, 걱정 말고 와 봐!”
홍지가 문을 열었고, 뒤따라 들어갔다..
창고 구석 캐비닛에서 은색 트럼펫을 꺼냈다. 조명에 비친 트럼펫이 은은하게 빛났다.
“신청곡은?”
홍지가 가상의 마이크를 갖다 댔다.
“The Chase”
“그거야 내 필살기지”
홍지가 볼에 바람을 잔뜩 불어 넣고 연주를 시작했다. 여전히 터프했다. 전공생과 붙어도 밀리지 않았던 발군의 트럼페터는 살아있었다. 대차게 혼자서 3분 동안 솔로를 토해낸 홍지의 뺨은 불에 댄 것처럼 붉었다,
“어때, 안 변했지?”
“아니, 더 늘었네.”
현예의 대답에 홍지가 득의만면한 웃음을 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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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괜찮냐?”
아소가 물었다.
“난 괜찮은데, 콘트라가 박살 났어.”
“가해자가 보상해 주겠지. 몸만 괜찮으면 됐어.”
“3주 동안은 여기 있으라는데, 공연 어떻게 하냐.”
“공연은 신경 쓰지 마, 선임님께 부탁드려볼게.”
“선임님께 왜?”
“그렇게 베이스 잘 치는 줄 누가 알았겠어. 어제도 완전 터뜨렸지.”
의외의 해결에 도한이 놀랐다.
“진짜 스윙이던데.”
“선임님이?”
“얄짤없더라.”
“선임님이?”
“장난 아니야.”
“선임님이?”
“너 고장 났냐?”
“넌 왜 아픈 사람한테 시비를 거냐. 이거 드세요. 도한 씨.”
도너츠 박스를 서랍 위에 올려놓으며 서규가 아소를 나무랐다.
“선임님이 사준 거예요. 오늘 몸이 아파서 같이 못 오신다네요.”
“무리하셨나 봐요.”
도한이 도너츠를 한 입 물었다.
“그런데, 선임님이 베이스를 치면 카운터는 누가 보나요?”
“그야!…”
말을 뱉었지만, 아소는 대안을 내지 못했다.
“아르바이트생을 구해야죠.”
서규가 창문을 바라보았다.
창문밖에는 가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아소야, 우산 있니?”
“오빠는?”
“없지.”
“저도 없어요.”
세 사람은 어두워지는 하늘을 망연히 쳐다봤다.
아소와 서규가 떠나고 나서 병원 침대에 누워 도한은 유튜브로 전날 도너츠의 잼 데이 영상을 보았다. 콘트라베이스를 잡은 현예는 평소보다 날카로워 보였다. 시작 사인이 들어왔는데도, 피아노가 가만있자, 베이스가 먼저 치고 들어갔다. 엄청난 속도감으로 몰아치는 베이스로 분위기는 단숨에 달아올랐다. 군더더기 없이 힘 있는 베이스. 현란하지 않지만, 시선을 주목하게 만드는 명확한 라인. 단순한 테크닉이 아니라, 노래하듯 말을 건네는 솔로 탁월한 연주자였다. 급이 달랐다.
뭐야. 일반인이 이게 가능한가? 연습도 안 하고, 갑자기 악기를 들고 이런 연주를 하는 게? 예상치 못한 현예의 연주에 도한을 충격받았다. 베이스 기타까지 팔고 콘트라베이스를 구매해 재즈로 전향했다. 짧지만, 노력하고 있었고, 이 정도면 꽤 하고 있는 거 아닌가 생각했었다. 그러나 현예의 연주는 얄팍한 자신감을 우습게 만들었다. 재즈는 진짜들의 세계였고, 진짜가 바로 옆에 있었다. 다음 순서로 이오케이가 무대로 올라왔지만, 도한은 현예의 플레이를 되감기했다.
건반이 텐션으로 몰아치며 엇박을 쪼갤 때, 워킹을 멈추고 단순한 음을 사이에 찍어 넣었다. 정확하게 틈에 박힌 음은 리듬의 탄력을 결정했고, 베이스가 피아노와 드럼을 이끌고, 올라갔다. 과하지 않았다. 그래서 꽉 차 있었다. 그동안 자신은 음의 공백을 채우려 애쓰고 있었다. 이렇게 담백하게, 찬란할 수 있구나.
도한은 현예의 손가락 움직임 하나하나에 눈을 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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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시 정시, 현예가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살갑게 인사하고,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켰다.
“정시 요정. 솔직히 말해 봐, 어제 늦잠이었지?”
석 팀장님 현예에게 다가와 시비 걸었다.
“아파서 일어 나지 못했습니다.”
“그게 그거지. 운동이라도 좀 해. 앞으로도 딱 정시 잘 지키려면.”
“좋은 충고 감사합니다.”
칼박을 지키려면, 정확한 메트로놈 연습이 필수적이다. 잼데이 자신의 연주가 구렸는지, 현예는 판단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건, 템포가 흔들린 적도, 코드를 놓친 적도 없었다는 것이었다. 자유롭기까지 했다. 지판에서 손가락을 뗀 지, 6년이 지났다. 그런데도 손에서, 몸에서, 리듬은 약동하고 있었다. 소리 나지 않게 발박자를 셌고, 머릿속으로 베이스를 쳤다. 빅밴드와 함께 Birks’works를 연주했다. BPM 300으로.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서규는 오픈 준비를 마치고, 현예를 기다리고 있었다. 직원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온 현예에게 서규가 말했다.
“저기 선임님 잠시 얘기할 수 있을까요.”
“네, 저도 드릴 말씀이 있어요.”
“아, 그래요. 그럼, 선임님 먼저 하세요.”
“죄송하지만 다음 주부터는 일을 못 나올 것 같아요.”
“네? 그만두신다고요?”
서규는 당황했다.
“선임님 덕분에 잼데이 이후 팔로우 수도 천 넘고, 손님도 늘었어요. 이제 불붙었는데, 대체 왜.”
“개인적으로 일이 좀 생겼어요.”
개인사, 건들 수 없는 주제였다.
“사실 제가 드리려던 얘기는 도한이 올 때까지만이라도 선임님께 베이스를 부탁하려던 것이에요. 카운터는 아르바이트를 따로 고용하고요.”
현예는 고개를 숙였다.
“그때까지만이라도, 안 될까요.”
간절하게 서규가 말했다.
“어려울 것 같아요.”
현예는 서규의 부탁을 끊어냈다.
곧 사람들이 밀려왔고, 현예는 주문을 받았다. 서규는 현예가 여러 메뉴에 시달리지 않게, 메뉴 수를 다섯 가지로 줄였다. 비록 주문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어도 수정과는 빼지 않았다.
오늘 선곡은 언제나처럼 탁월했다. 특히 Wayne Shorter의 Black Nile에서 Renee Rosnes Black Narcissus, 그리고 Gene Russell의 Black Orchid로 이어지는 흐름이 인상적이었다. 선배는 세 곡을 블랙 3부작이라고 했다. 이다지도 취향이 비슷할 수 있을까. 서규의 플레이 리스트 때문이라도, 이곳에 머물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진하게 그을린 흔적에서 불씨가 싹트는 것이 느껴졌다. 이민락과의 조우는 과거를 선명하게 일깨웠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고, 어떤 약속도 지킬 수 없었다.
끝까지 갔고, 거기에 끝이 있었다.
에필로그의 삶을 살고 있었고, 만족했어야 했다.
영업을 마감하고, 셔터를 닫았다. 현예는 서규가 마무리하기를 기다렸다.
“그럼, 이제 몇 번 안 남은 거네요. 이렇게 같이 가는 거.”
“7번 남았어요.”
현예는 습관처럼 숫자로 말했다. 민원인들은 모호한 말을 싫어했다.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잘 맞았다.
“그날 진짜 최고의 연주였어요. 선임님 덕분에 연주가 그렇게까지 짜릿할 수 있구나, 처음 느꼈어요. 어질어질하다고 해야 하나, 아찔하다고 해야 하나. 여튼 대단했어요. ‘정말 대단한 사람이구나, 선임님은’이라는 생각밖에 안 들더라고요.”
“서규 씨도 대단해요. 제일 처음, ‘Bebop in Pastel’ 실사 조사 나갔을 때 망하겠다 싶었어요. 진짜 폐업했죠. 그런데 서규 씨는 다시 재즈 클럽을 열겠다고, 결혼식 연주 알바를 뛰고 있었어요. 설마 다시 열겠어 했는데, 진짜 다시 열었더라고요. 서규 씨는 그런 사람이에요. 다 끝났던 일도, 다시 일으킬 수 있는 사람. 전 죽어도 그런 사람 못 돼요.”
“선임님 아니었으면, Bebop in Pastel 시즌 2도 망했을 거예요. 이렇게 많은 걸 받았는데, 이제는 더 바라지 않는 게 맞다고, 일하면서 생각했어요. 아까 조금 더 같이 있어 달라고 조른 것 같아서 미안해요.”
“아녜요. 저도 재밌었어요.”
진심이었다.
서규가 맑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다. 자꾸 떠오를 것 같은 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