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 여관보다 항상 낫다

법고창신, 창조적 파괴, 디지털 혁신

by 김이울

“길은 여관보다 항상 낫다.”(세르반테스) 낡은 여관 앞에서 멈추거나 졸면 죽는다. 고인 물은 썩어서 물고기가 살 수 없다. 흘러야 하며 새로운 물을 계속 받아들여야 한다. 세계화가 진전된 21세기에 국내외의 무수한 경쟁기업들끼리 벌이는 치열한 도전과 응전은 숨막힐 지경이다.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이다. 그걸 이겨내고 버텨내는 힘이 바로 끝없는 혁신이다. 새로운 제품과 서비스, 프로세스를 만들어 내는 혁신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니다. 오랜 기간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거치는 ‘축적의 시간’이 필요하며, 많은 실패의 토대 위에서, 값진 땀방울을 딛고 나온 성과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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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슘페터의 ‘Neuerung’(Innovation, 혁신)이란, 기술의 발전뿐만 아니라, 새로운 시장의 개척, 각종 프로세스의 변경 등 경제에 충격을 주어 변화를 초래하고 이윤을 발생시키는 모든 계기를 의미하며, ‘창조적 파괴’로 이어진다. C.크리스텐슨 교수는 혁신을 ‘존속적 혁신’과 ‘파괴적 혁신’으로 나눈다. 존속적 혁신은 기존 제품과 서비스를 점진적으로 개선해 더 나은 성능을 원하는 고객을 대상으로 높은 가격에 제공하는 전략이다. 파괴적 혁신은 단순하고 저렴한 제품 또는 서비스로 시장 밑바닥을 공략해 기존 시장을 파괴하고 시장을 장악하는 전략이다. 파괴적 혁신의 대표적 사례로는 DVD 대여 업체에서 온라인 기반 스트리밍 콘텐츠 사업을 론칭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한 넷플릭스를 비롯해 애플, 아마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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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속적 혁신에 부합하는 고사성어는 연암 박지원의 ‘법고창신’이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였던 연암 박지원(1737~1805년)이 제자이자 친구였던 초정 박제가(1750-1805)의 문집(‘초정집’) 발간을 기념하여 써 준 서문(‘초정집서’)에 나오는 글귀다. ‘옛것을 거울삼아 새것을 창조한다'는 뜻이며, “옛것을 토대로 삼으면서도 변통할 줄 알고, 새것을 창조하면서도 능히 전아함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1970년대에 신발산업이 한물갔다고 버렸지만, 신상품 ‘나이키 에어’는 15만원이 넘는 비싼 신발로 여전히 인기를 누리고 있다. 오랜 경험과 숙련된 기술을 토대로 고부가가치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한다면 ‘묵은 것’은 한물간 것이나 낡은 것이 아니다. 묵은 김치가 더 맛있고, 묵은 도시가 더 아름다운 것도 같은 이치다. 오래된 한옥이 더 향기롭고, 묵은 기업이 더 혁신적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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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고창신의 정신을 실천하고 있는 미국의 대표기업이 바로 GE(General Electric)다. GE는 1892년에 에디슨 전기회사와 톰슨-휴스턴 전기회사의 합병으로 설립된 회사다. 전구, 가스터빈, 가전, 철도, 항공기 엔진 등을 만들던 미국의 대표적 제조업체다. 세계 180개국에 33만 명의 직원을 두고 있으며, 시가총액 세계 13위의 거대 기업이다. 1896년에 처음 시작된 다우지수(DJIA)에 포함된 12개 회사 중 하나였으며, 아직까지 남아 있는 유일한 회사다. 그런 GE가 또 한 번의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디지털’, ‘산업인터넷’, ‘소프트웨어’ 분야에 모든 역량을 쏟아부어 세계 10대 소프트웨어 회사로 변신하겠다고 선언했다. ‘4차 산업혁명’을 선도하는 회사가 되겠다는 것이다. 거대한 공룡 같은 기업 GE가 핵심 사업부를 매각하는 변신을 통해 또 다른 100년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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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오사카에서 1983년 처음 선을 보인 ‘츠타야서점’은 2018년 현재 일본 전역에서 1,500여 개의 서점과 22만 개의 T 포인트 가맹점, 6천만 명의 T 포인트 회원을 보유하고 있다. 일본에서 혁신의 아이콘이 된 ‘츠타야서점’의 성공 컨셉도 ‘법고창신’이다. 도쿄 시부야의 오래된 건물을 ‘다이칸야마 츠타야 서점’으로 리모델링하여 ‘단카이’세대(일본의 전후 베이비붐 세대)의 사랑을 받고 있다. 큐슈에 있는 인구 5만명의 다케오市 시립도서관을 츠타야 서점 컨셉으로 변화시켜 매년 100만 명이 찾아오는 명소로 탈바꿈시켰다. 서울 지하철 삼성역의 지하공간에 신세계백화점에서 조성해 놓은 ‘별마당 도서관’도 츠타야 서점을 벤치마킹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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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는 지멘스가 혁신을 선도하고 있다. 지난 2018년 봄 지멘스의 암베르크 공장을 방문했다. 세계 최고의 ‘스마트 팩토리’라는데 겉보기에는 평범했고 라인은 여유가 있었다.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영업비밀은 1층과 3층의 패널 속에 숨어 있고, 외부인들은 2층의 정해진 코스만 둘러볼 수 있다. 공장 자동화용 핵심부품(PLC)을 생산하는 작업자들은 여유 있게 일하지만 성과는 눈부시다. 1991년 이후 생산량은 13배로 증가했는데, 불량률은 100만 개당 557개에서 100만 개당 10개로 급감했다. 2015년 2월 기준 212개국 34만3000명에 달하는 지멘스 직원 약 40%, 즉 14만4000명이 주주로서 애사심과 주인의식이 남다르다. 독일은 이미 2000년대 초에 4차 산업혁명에 국가 역량을 집중시켰다. 저임금을 무기로 한 중국과 인도의 제조부문에서의 추격을 따돌리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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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독일보다 훨씬 늦었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디지털 혁신, 디지털 전환, 디지털 뉴딜, 스마트 팩토리, 스마트 상점, 스마트 시티 등이 국정과제로 대두되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2018년 발표 자료에 따르면 우리 중소기업의 디지털화 수준은 2016년 기준 36개국 가운데 28위에 그치고 있다. 글로벌 혁신 네트워크와의 연결성과 빅데이터 활용 비율도 OECD 회원국 가운데 최하위 수준이다. 중소기업의 생산성은 대기업 대비 30% 수준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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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혁신이란 기업의 핵심 프로세스, 고객과의 접점, 제품 및 서비스 등 경영 전반에 걸쳐 정보통신기술(ICT)의 적용을 통해 비즈니스모델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이다. 벤캇 벤카트라만의 ‘디지털 매트릭스’는 디지털 세계에 못 들어가고 있는 수많은 ‘기존 기업’들에게, 성공의 덫에 빠져 있는 기업인들에게 꼭 필요한 조언을 하고 있다. 창업한 지 182년이 지난 농기계업체 ‘존디어’의 디지털 혁신 사례도 소개돼 있다. 디지털 미래에 기업들의 규모는 중요하지 않다. 서로 다른 조직들끼리 힘을 합치고 디지털 기술의 힘을 활용해, 고객들이 원하는 가치를, 신속하게 전달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한국의 중소기업들이 더 분발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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