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이울 Mar 01. 2021

낯선 거리 (6/10)

  코로나 사태가 끝나려면 백신과 치료제가 나와야 하는데, 보건의료 전문가들이 종편 TV에 나와서 하는 얘기를 들어보면, 최소한 1년은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코로나 사태가 장기화 조짐을 보이고, 수입은 절반 이하로 감소함에 따라 비상조치가 불가피했다. 지출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인건비부터 줄여야 했다. 내가 직접 주방을 맡았다. 소위 ‘오너 셰프’가 된 셈이었다. 주방을 맡으면서 몸은 두 배로 힘들었지만, 마음은 편했다. 그리고 또 조금 지나서, 홀 아주머니를 시간제 아르바이트로 바꿨다. 그 결과 인건비 지출이 절반 이하로 줄었다. 손님이 지하로 내려오지 않는데 무작정 앉아서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김밥과 만두를 한 줄씩 담아서 ‘김만두 도시락’이라고 이름을 붙여 팔았다. 구조조정도 하고 도시락 메뉴도 개발했으니 손님만 어느 정도 회복된다면 숨통이 트일 것 같았다. 하지만 지하에 있다는 게 걸림돌이었다. 손님들의 공포감은 쉽게 해소되지 않았다. 여전히 적자였다. 메뉴를 신세대 취향으로 바꿔볼까? 샐러드 카페로 확 뜯어고칠까? 테라스가 있고 공기가 잘 통하는 1층 자리를 새롭게 알아볼까? 보증금과 월세가 두 배가량 비싸지겠지? 고민만 하다가 8월까지 밀려왔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8월 31일, 개업 이십이 년째였다.


  서울의 식당이 평균 육년을 버틴다는데, 나는 세배 이상 버틴 셈이었다. 얻은 것도 많았지만 잃은 것도 많았다. 그렇다고 내 힘든 삶의 여정을 산수하듯이 더하기 빼기를 해서 적자다 또는 흑자다 결론내릴 수 없었다. 내 별명이 척후병인 것처럼, 예민한 촉수를 앞세워 손님들이 원하는 메뉴를 발 빠르게 추가하기도 했고, 내일 문을 닫을 수 있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일했다. 그런 하루하루가 모여서 오늘 여기까지 왔다. 힘들게 쌓아온 내 인생의 담벼락에서 누가 벽돌 하나라도 빼간다면 도저히 용납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시내에서 직장인들을 상대로 하는 식당은 오전 열 시부터 오후 두 시까지가 가장 바쁘다. 테이블 세팅도 해야 하고 재료 준비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을 미리 끓여놔야 라면 끓이는 시간을 줄일 수 있고 만두도 살짝 삶아놔야 주문을 빠르게 소화할 수 있다. 점심 장사는 개시 후 십 분이 중요했다. 밀려드는 손님과 주문을 빠르게 처리하면 3회전도 가능했다. 지금이 아니라 옛날 호시절 이야기였다. 오늘은 겨우 다섯 테이블, 열세 명을 받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오후 두 시라 한가해져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등기우편이 배달됐다. 서울지방노동위원회에 출두하라는 통지문이었다. 한 달 간격으로 그만둔 주방장과 홀 아주머니가 지노위에 부당해고 구제 및 퇴직금 지급을 요청했다. 2주 후에 열리는 첫 번째 심판 회의에 출석하여 소명하라는 내용이었다. 식당이 어렵다는 것을 서로 잘 알고 있었고 연말이면 좋아질 테니 그때 정산하겠다고 했다. 별도로 위로금이라며 봉투도 줬는데…… 잠깐도 기다려줄 수 없다는 것인지? 불경기라서 노무사를 통해 법률 검토를 의뢰하지 않았다는 게 잘못이라면 잘못이었다. 두통이 일어 진통제라도 먹어야 할 것 같았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이전 05화 낯선 거리 (5/10)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