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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에스더 0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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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울 Dec 14. 2021

길 잃은 작은 새

(4/10)

  휴대폰으로 찍어둔 프까이의 메모가 생각났다. 휴대폰 앱을 구동시켜 그림 파일을 텍스트 파일로 변환시켰다. 구글 번역기를 돌려 크메르어를 한글로 바꿨다. 부모님 속옷과 화장품, 동생들 옷과 필기구…… 가족들을 위해 준비한 선물 목록이었다. 이어서 프놈펜 시내 기념품 가게들의 이름과 월 임대료가 나란히 적혀 있었다. 프까이는 귀국해서 여행객을 상대로 기념품 가게를 열 계획이었던 것 같았다. 빨간 펜으로 밑줄이 그어진 메모는 불경의 한 구절처럼 보였다.

  ‘멀리 떠나 고생할수록 극락이 가깝다.’

  그녀의 이름이 무슨 뜻인지 검색해보니, 속(Sok)은 캄보디아에서 가장 흔한 성으로 금요일에 태어난 아이 또는 평화롭다는 뜻이었고, 프까이(Phkay)는 별이었다. 평화로운 별……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졌다. 


  여전히 큰 키에 고개를 숙이고 걸었던 에스더는 유학 준비와 독일어 공부를 핑계로 고등학교를 일 년 더 다녔다. 실상은 몸과 마음이 아파서 그랬을 것이다. 나는 고시 합격이 출세의 지름길이라고 믿던 아버지의 뜻에 따라 법대에 들어갔다. 서울에서 혼자 보낸 일 년은 무척 지루했다. 그해 겨울방학이 시작되자마자 고향으로 내려갔다. 이제 막 K대 독문과에 합격한 그녀가 남문 옆 성당으로 이어지는 횡단보도를 날렵하게 건너왔다. 흰색과 회색의 체크무늬 코트에 청바지를 입었고 목에는 빨간 털실로 짠 목도리를 두르고 있었다. 헤세의 시집과 꽃다발을 에스더에게 건넸다. 볼이 빨개진 그녀가 시집을 죽 훑어보더니, ‘쉬투펜’(Stufen, 계단)은 독일어 시간에 읽어봤다고 했다. 


  성당 근처 분식집에서 이른 저녁을 먹었다. 좁은 유리창 너머로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진한 먹색 기와지붕과 하얀 눈이 잘 어우러져 수묵화 같았다. 한옥 처마의 가로 직선과 하늘하늘 내려오는 눈송이의 수직선이 부드럽게 교차했다. 사각사각 눈 쌓이는 소리만 들려오는 수묵화 속을 말없이 걸었다. 큰길에서 야트막한 언덕길로 돌아서 올라가는데 눈송이가 굵어졌다. 그녀가 팔짱을 끼더니 종달새처럼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를 흥얼거렸다. 눈 내리는 한옥마을이 아이보리 색상의 무도회장으로 변했다. 양쪽 발에 리듬을 실었다. 에스더는 춤추는 신데렐라가 되었다가, 지젤이 되었다가, 오데트가 되었다. 눈처럼 새처럼 가볍게 날아올랐다. 가쁜 숨을 쉬면서 얼굴이 빨개졌다. 골목 안쪽의 가로등 불빛 아래 함박눈이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에스더의 눈동자와 내 눈동자가 겹쳐졌다. 에스더를 벽 쪽으로 슬며시 밀었다. 벽에 기댄 그녀가 눈을 감았다. 입맞춤은 짧았고 여운은 길었다.


  기체가 몇 번 흔들리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헤드폰을 끼고 앞 좌석 등받이에 장착된 TV를 켰다. 도요새의 이동에 관한 다큐멘터리였다. 연구팀의 도요새 다리에 부착한 위성추적 장치에 따르면, 큰뒷부리도요는 뉴질랜드에서 한반도까지 약 1만 킬로미터를 쉬지 않고 날았다. 한반도의 갯벌에 내려앉아 한 달가량 쉬면서 영양분을 보충했다. 쉬는 동안에 불어난 체중과 축적된 지방을 연료로 쓰면서 다시 6천 5백 킬로미터를 날아 알래스카에 도착했다. 북극에 가까운 곳에서 여름을 나고 번식을 마친 도요새는 알래스카를 떠나 뉴질랜드까지 약 1만 2천 킬로미터를 논스톱으로 날았다. 철새들은 이동 경로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해와 달과 별의 움직임, 지형지물, 바다의 냄새를 확인했다. 경로에서 벗어난 새들이 간혹 목격되기도 했다. 어린 새들이 중간에 태풍을 만나 엉뚱한 지역으로 밀려난 경우였다. 


  TV를 껐다. 머릿속으로 프까이와 에스더의 이동 경로를 그려봤다. 프까이는 동남아에서 한반도로 날아왔고 에스더는 한반도에서 북유럽으로 날아갔다. 프까이는 귀로에서 길을 잃었고 에스더는…… 나는 대학에서 길을 잃었다. 1학년 때 법학개론은 D학점이었는데, 교양과목으로 신청한 문학개론과 사회학개론은 A학점이었다. 고시 공부는 영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군대를 마치고 복학하여 졸업할 때까지 고시에 몇 번 더 떨어지고 회사에 들어갔다. 취업하자마자 아버지는 결혼을 재촉했다. 내가 결혼 생각이 없다고 하자, 전주이씨 예문공파 14대 종손인데 맥을 끊을 작정이냐고 했다. 그런 아버지에게 에스더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더는 고향에 내려가지 않았고 아버지의 전화도 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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