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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에스더 0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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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울 Dec 15. 2021

독일, 새로운 시작

(5/10)

  대학을 졸업하고 외국계 호텔에서 근무하던 에스더는 쾰른 근처에 본사를 둔 제조업체로 직장을 옮겼다. 해외 근무를 원했던 그녀의 꿈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고시를 포기하고 무역회사에 들어간 신출내기에 불과했던 나는 그녀의 출국을 바라보아야만 했다. 에스더가 내 속마음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그녀는 당차게 아버지를 거역하지 못하는 나를 답답해했으리라. 나의 엉거주춤한 태도는 에스더가 독일기업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데 일조했을 것이다. 그녀가 출국장 안으로 사라졌다. 한 무대가 끝나고 다른 무대로 넘어가는 도중의 암전처럼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무겁고 긴 어둠이었다. 넋이 나간 사람처럼 귀가하여 난생처음 깡소주를 마시고 쓰러졌다.


  승무원이 커피포트와 종이컵을 들고 좁은 통로를 오갔다. 커피를 청해 마신 후 서류 가방에서 메모지를 꺼냈다. 엠마가 장례식에 참석하는 한국인 친구들을 대표해서 한마디 해달라고 부탁했다. 갑작스레 떠나버린 에스더에게 무슨 말을 전할까?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던 내가 뒤늦게 어떤 얘기를 할 수 있을까?


  에스더가 두 돌이 지난 아들과 함께 할머니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귀국했다. 일주일가량 머문 후 독일로 들어가기 전날 광화문의 어느 카페에서 마주 앉았다. 플라워패턴의 블라우스와 와인레드 색상의 롱스커트가 독일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결혼할 생각이 없고 결혼해도 아이는 갖지 않을 거라고 단호하게 말했던 그녀가 떠올라 피식 웃었다. 마치 내 웃음의 의미를 눈치라도 챈 것처럼, 아들에게 요거트를 떠먹이던 에스더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어색한 침묵의 시간이 흐른 후 에스더는 뭔가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엠마가 옆에 있어서 다행이라고 했다.


  독일에서 태어난 엠마는 초등학교 4학년 때 한글을 배우러 전주에 있는 고모 집에 잠시 와있었다. 코쟁이라고 놀림을 받던 에스더에게 단짝 친구가 생긴 거였다. 하얀 피부에 키가 크고 세련된 엠마와 에스더는 자매 같았다. 늘 고개를 숙인 채 움츠리고 다니던 에스더가 이때만큼 환한 얼굴과 큰 목소리로 웃고 떠들었던 적이 없었다. 일 년 만에 엠마가 독일로 돌아간 후에 둘은 편지를 주고받았다. 성인이 되어 독일에서 다시 만나 쾰른에 살면서 단짝으로 돌아갔다. 얼마 전부터 엠마와 함께 쾰른의 이민자 지원센터에서 자원봉사를 시작했다는 얘기를 전하면서 에스더가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저 한숨의 의미는 뭘까? 독일에서의 생활이 힘들다는 것일까? 이제 더는 할 말이 없다는 것일까? 알 수 없었던 나는 내 앞의 찻잔을 들어 마시는 것으로 어색함을 견뎠다. 에스더가 이메일 주소를 내게 적어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소한 일상을 담은 이메일이 카스피해와 티베트고원을 넘어 띄엄띄엄 오갔다. 내가 연말에 업무가 밀려 힘들다고 투정을 부리면 에스더는 밤하늘 별이 되어 창가로 찾아오겠다고 했다. 내가 은퇴 후에 섬진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작은 집을 지어 살고 싶다고 했을 때, 에스더는 그 옆에 자기 집을 지을 공간도 있느냐고 물었다. 그 질문의 의미를 가늠하기 힘들어서 뭐라 답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남편 루카스가 주말마다 할리데이비슨 오토바이를 타고 돌아다닌다며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때도 내 마음 속 깊은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그녀가 너무 멀리 가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독일의 경제 상황이 어려워지자 유색 인종을 표적으로 삼은 범죄가 발생하고 있다는 우려도 전했다. 이 말 역시 귀담아듣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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