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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에스더 0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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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울 Dec 12. 2021

한옥마을과 에스더

(3/10)

  “에스더가 멀리 떠났어.”

  갑자기 날아온 부고 문자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문자의 발신인은 독일에 있는 엠마였다.      


  다음 날 출근해 일주일 휴가를 신청했다. 이유를 묻는 팀장에게는 개인 사정이라고 했다. 내가 일하는 곳은 무역회사의 법무팀이었다. 각 부서에서 올라오는 계약서를 검토한 후 수정 의견을 제시하거나 이해관계자와의 법적 분쟁을 해결하는 게 주된 업무였다. 계약 규모가 크거나 복잡하고 중요한 사안은 대형 로펌의 도움을 받아서 처리했다. 다행히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듯 숨 가쁘게 처리해야 할 일은 많지 않았다. 그래도 며칠 자리를 비울 것에 대비해 현재 진행 중인 업무는 팀장과 공유하기로 했다. 비행기 안에서 읽을 책과 자료를 챙긴 후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인천공항에 도착하니 날은 벌써 어두워져 있었다. 자정이 다 되어서야 프랑크푸르트행 비행기가 활주로를 벗어나 어둠 속으로 날아올랐다.


  에스더와 나는 어릴 적 전주 한옥마을에서 자랐다. 에스더는 이름뿐만 아니라 생김새도 달랐다. 큰 키에 오뚝한 콧날, 갸름한 얼굴과 긴 목, 붉은 톤이 강한 머리 색깔로 인해 짓궂은 녀석들의 표적이었다. 에스더 대신 코쟁이로 불렸다. 고개를 숙이고 빠르게 걷는 버릇이 생긴 것도 그 때문이었다. 에스더는 간호사로 일하는 엄마와 할머니랑 살았다. 아빠는 독일에 사는 외국인이라는 소문만 있었다.


  넓은 들판과 크고 작은 하천을 끼고 있어 물산이 풍부했던 전주의 한옥마을은 낮게 가라앉은 기와지붕만큼이나 관습에 짓눌려 있었다. 우리 집안도 그랬다. 매년 한식에 전국 각지에 흩어져 사는 문중의 어른들이 한 명의 예외도 없이 한복을 차려입고 선산에 모였다. 망건에 갓을 쓰고 오는 어른도 많았다. 집안의 종손인 나 또한 도포를 걸치고 성묘하는 게 당연했다.


  초등학교 4학년 여름방학이 끝나갈 무렵 에스더와 나는 향교 옆 천변으로 물놀이를 갔다. 물고기가 한번 들어오면 나가기 힘들도록 입구가 몸체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와 있는 유리병 바닥에 된장을 넣고 돌무더기 사이에 묻어놓았다. 집으로 돌아갈 때쯤 꺼내 보니 피라미와 모래무지 여러 마리가 들어있었다. 급히 서둘다가 발을 헛디뎌 무릎이 깨졌다. 에스더가 집에 비상약이 있다면서 앞장섰다. 에스더네 집 대청마루에 걸터앉아 빨간약을 바르고 마이신 가루를 뿌리고 붕대를 감았다. 다리를 절뚝이며 집으로 돌아온 나는 안방으로 끌려가 회초리를 맞았다. 에스더랑 어울리지 말라는 아버지의 얘기를 듣지 않았다는 게 이유였다.


  제트기류 구간을 통과하느라 기체가 심하게 흔들렸다. 좌석 벨트를 하고 앉아 있으라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비행기는 아직 중국 영공을 벗어나지 못했다.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냈다. 어제 마무리하지 못한 보고서 파일을 열었다. 비닐하우스나 조립식 패널처럼 열악한 주거공간을 숙소로 제공하는 고용주에게는 이주노동자를 배정하지 않아야 한다, 근무 환경이나 주거 환경이 개선되려면 이주노동자의 사업장 선택권을 더 강화해야 한다는 제안을 끝으로 보고서를 마무리했다. 기내 와이파이에 연결해 메일을 보내고 노트북을 닫았다.


  내가 이 일을 한 지도 어느덧 오 년이 되었다. 신문에서 이주노동자 특집 기사를 읽은 후 산업단지의 이주민 복지재단을 찾아갔다. 주말마다 이주노동자를 대상으로 법률 상담을 해주고 사고 현장을 방문하는 일을 맡았다. 자연스레 노동법과 이주노동자 관련 법률도 들여다보게 되었다. 독일에서 이민자들을 대상으로 독일어 자원봉사를 시작했다는 에스더와 엠마의 영향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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