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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태풍 전의 고요였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기온이 며칠째 영하 20도를 밑돌고 있었다. 커피가 담긴 머그잔을 들고 눈 내리는 베란다로 걸어갔다. 검은색 거실장 위에 올려진 오렌지색 라디오에서 크리스마스 캐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진행자의 목소리가 춤추는 발레리나처럼 통통 튀었다. 예년 같으면 나도 화이트 크리스마스라며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을 텐데 외려 심란했다. 밖을 한참 올려다보았다. 카톡 소리가 났다. 이주민 복지재단의 자원봉사자들이 모인 단톡방에 긴급출동 문자가 떴다. 사망 사고가 발생했는데 성탄절 연휴라 일손이 부족하다고 했다. 간사가 간절하게 부탁했지만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눈물을 흘리는 이모티콘과 죄송이라는 문자만 줄줄이 올라왔다. 스무 명 남짓한 자원봉사자 중에서 나만 손을 들었다. 장소가 서울 동북쪽에 있는 외곽이었고 며칠째 내린 눈으로 길이 미끄럽다는 생각 때문인지 신청자가 없었다. 나는 서둘러 무릎까지 내려오는 롱패딩을 걸치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
87번 국도에서 빠져나와 지방 도로를 달렸다. 목적지까지는 5킬로미터가 남지 않았는데 눈 쌓인 고갯길에서 바퀴가 헛돌았다. 속도를 낮추고 조심스레 올라갔다. 고개를 넘어 마을 쪽으로 핸들을 틀었다. 원심력이 작용하면서 도로 우측으로 차가 미끄러졌다. 미리 속도를 낮췄기에 망정이지 큰 사고로 이어질 뻔했다. 운전대에 머리를 박고 한참 동안 그대로 있었다.
상추, 시금치, 대파 등의 푸성귀를 재배하여 서울로 내보내는 영농단지였다. 며칠째 계속된 눈으로 허물어진 비닐하우스가 여러 채였다. 통화를 하고 있던 영농법인 대표가 경계하는 표정으로 내 앞을 막아섰다. 이주민 복지재단 법률지원팀장이라는 명함을 꺼내 보여주었다. 그제야 마지못해 현장으로 안내했다. 출입문은 열려 있었고 출입 금지 표시도 없었다. 경찰 쪽은 벌써 다녀갔고 시신은 도립병원으로 옮겨진 상태라고 묻지도 않은 얘기를 했다.
사고가 난 곳은 검은색 차광막을 씌운 비닐하우스였다. 찌그러진 십여 채의 비닐하우스 정중앙에 자리하고 있었고 손바닥 크기의 창문이 왼쪽과 오른쪽에 하나씩 뚫려 있었다. 정면 입구를 지나 안쪽으로 두어 발자국 걸어 들어가자 군데군데 칠이 벗겨지고 색이 바랜 샌드위치 패널이 나타났다. 차가운 겨울바람에 몸이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롱패딩의 목깃을 바짝 세워 잡아당기며 가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왼쪽으로 방 두 개가 붙어있었다. 오른쪽 좁은 통로에 주방이 있었다. 싱크대에는 씻지 않은 식기들이 살얼음에 담겨 있었고 그 위로 옅은 햇살이 아롱거렸다.
한 평 남짓한 방구석에 진한 밤색 나무 옷장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색 바랜 꽃무늬 이불이 바닥에 가지런히 개켜 있었다. 벽으로 붙여 세워놓은 매트리스의 네 귀퉁이는 해져 보푸라기가 일었다. 방문 뒤쪽으로 낡은 개다리소반이 눈에 들어왔다. 소반 위에는 두툼한 불경이 놓여 있었다. 낯선 크메르어 불경을 뒤적이다 책갈피에 끼워진 사진 한 장과 종이쪽지를 발견했다. 빼곡히 적혀 있는 메모의 뜻을 알 수 없어서 휴대폰으로 찍어두었다. 오래된 흑백 사진 속에서 부모 옆에 앉아 있는 여자아이는 까무잡잡한 얼굴에 이마가 훤했다. 그녀의 동생으로 보이는 왼쪽 끝과 오른쪽 끝의 남자아이들은 반팔 셔츠를 입고 무표정하게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