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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딘 Feb 14. 2021

잠깐, 나 차별당하고 있나?

DAY 58 나를 부정하고 미워하는 과정까지가 차별이다.

유럽에서의 생활은 겉보기만큼 꽃밭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차별의 건이 그렇다.


아시아인이라, 여성이라, 아니면 단지 나라는 이유로 각종 차별을 당했어야 했다.

그리고 같은 이유로 도망쳐야 했다. 나는 여기에 혼자 있는 아시아 여성 이방인이니까.


먼저 나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 남에게 관심이 크게 없다. 나의 인생이 하나의 선이라면 남들은 그 선을 만들어내는 수많은 점 중 하나에 불과하다. 내가 아는 사람의 대부분은 스쳐갔거나 스쳐가고 있거나 스쳐갈 것이다. 비교적 오래 내 곁에 머무르는 사람들에게 애쓰기도 힘들다. 그러니 특히나 나에게 니하오를 외친 유럽의 수많은 사람들에 마음 쓰지 않는다. 타지생활을 하기 위해 필요한 자질은 외국어 구사능력보다 남에게 관심 주지 않는 게 아닐까.


여러 이유로 잊지 못하는 그날의 일몰
2019년 11월 7일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데,
하트로도 인종차별하지 마시길.


산악트램을 타고 성에 오르기 위해 트램 정거장에 앉아있었다. 반대편에 트램이 멈췄는데 안에 앉은 여학생 둘이 나를 쳐다보며 웃었다. 나도 빤히 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출발할 때쯤 손가락 하트를 하며 웃었다. 아니 비웃었다. 지나가는 트램에서 뒤를 돌아가면서 나에게 하트를 날리던 그 모습을 보며 든 생각을 잊지 못한다. 이게 인종차별인지 그래서 내가 기분 나빠해야 하는지를 내가 이렇게 열심히 고민해야 하다니. 이렇게나 주체적인 피해자가 되어야 하다니. 이날 이후 나는 모든 말과 행동에 묻는다.


잠깐, 나 지금 차별당하고 있나?

아니면 혹시 누군가를 차별하고 있나


생각해보면 모든 차별이 그렇다. 이게 내 능력이 부족해서인지, 아니면 나의 정체성 때문인지 여러 정황으로 추론하여 알아차리지 않으면 더 무시당한다. 그 학생들이 나에게 하트가 아니라 가운데 손가락을 보냈다면 나는 덜 고민했을 것이다. 말하자면 친절하게 확실한 차별. 나 너 차별하고 있으니까 너 기분 나빠해야 돼. 충분히 나쁘지만 애매한 차별에 비하면 양반이다. 모두가 알고 있는 차별의 언어를 피해 교묘한 어휘와 행동으로 당하는 사람이 화내기 어렵게 만드는 애매하고 모호한 차별. 슬프게도 세상은 점점 애매하고 모호해지고 있다.




글쎄. 애써 남을 차별하는데 에너지를 쓰는 사람을 이해할 줄 모른다. 그래서 난 매번 이해할 수 없는 순간에 놓인다. 왜 굳이 아프게 말하고 나쁘게 행동하는 걸까. 이들과 함께하는 사회는 앞으로 어떻게 더 나아질 수 있을까.


12월 초,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 교환학생으로 있는 친구가 비엔나로 놀러 왔다. 기차역에서 누군가 니하오를 외쳤고 나는 쳐다보지도 않고 지나왔다. 놀란 눈이 된 친구는 유럽에 온 지 3개월이지만 처음으로 니하오를 들어봤다고 했다. 나는 더 놀랐다. 유럽에 오는 비행기에서부터 겪은 차별이다. 그동안 린츠에서, 비엔나에서, 프라하에서, 부다페스트에서, 뉘른베르크에서, 파리에서 다시 말해 내가 머무른 모든 도시에서 차별의 언어를 들었다.


유럽인들이 한국인 여성을 차별하는 방법은 몇 가지가 있다. 하나. 니하오를 외친다. 보통 두세 명의 남자들이 길거리에 앉아서 짐가방을 들고 지나가는 아시아인들에게 말한다. 외부인이니까 자기들이 우위에 있다고 판단해서 입 밖으로 뱉는 말이다. 둘. 한국인이라고 말하면 남쪽인지 북쪽인지 묻는다. 나는 이게 무시하는 말인지 몰랐으나 여러 차례 겪다 보니 묘하게 비꼬는 질문이다. 남쪽이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우스워지는 질문이다. 그렇다고 화를 버럭 내기에도 애매하다. 그렇게 묻는 거 인종차별이라고 화를 내면 단지 궁금해서 물어봤을 뿐이라며 당당히 대답한다. 마치 지나가는 아시아인에게 손가락 하트를 해 보이는 것만큼 애매하다.


이렇게 애매한 차별은 어떻게 없앨 수 있을까.




나를 향한 차별의 언어와 행동이 인종차별인지 성차별인지 알 길이 없다. 혹은 단지 나라서 받은 시선 인지도. 그래서 차별이 나쁘다. 차별당한 대상은 그 원인을 스스로에게서 찾아내야만 한다. 그렇게 정체성 하나하나를 부정하고 미워하는 과정까지가 차별이다. 피해자가 직접 차별인지를 알아차리고 상처 받아야만 한다. 내가 유럽인이라면, 내가 남성이라면, 혹은 내가 내가 아니라면. 그러면 잘츠부르크 혼성 도미토리에서 보낸 그날 밤을 더 편안히 보낼 수 있었을까. 기차역에서 집에 오는 트램에서 마음 편히 에어팟을 꽂을 수 있었을까. 내 영어 발음을 비웃던 할아버지의 말에 되받아칠 수 있었을까.


나를 부정하 수많은 상상까지가 차별이다.

 한마디, 잠깐의 시선, 아니  공기만으로도

답이 없는 질문들이 시작된다.


잠깐, 나 지금 차별당하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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