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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딘 Feb 09. 2021

여독을 푸는 나만의 방법

DAY 49 다들 조금씩 부러웠다.

여독 : 여행으로 말미암아 생긴 피로나 병


너무 좋은 여행과 너무 나쁜 여행은 마찬가지로 여독이 오래간다. 그리워하느라, 그리고 후회하느라. 적당한 여행이 좋다. 요즘은 다 적당한 게 좋다. 맛있는 음식을 많이 먹어서 배탈이 나거나 좋은 사람을 자주 만나서 질리거나 좋은 풍경을 자꾸 봐서 무뎌지거나. 과한 기억은 돌아보면 다 아쉽다.


여독으로 마음이 헛헛한 저녁엔 신라면을 부숴 먹으며 콧물을 흘린다.


괜히 울적한 밤에는 어김없이 신라면을 부순다. 그리고 간장종지에 수프를 털어놓고 앉아 TV를 보며 와그작와그작. 매워도 꿋꿋이 찍어먹는 수프와 배불러도 멈추지 않는 와그작와그작. 라면 러버로 말하자면 부숴먹기 제일 좋은 라면은 신라면이다. 맥주를 마시면 감정이 더 풍부해지고 누군가에게 연락하면 스쳐가는 감정을 입 밖으로 꺼내어 굳이 기억되게 만들고 만다. 그래서 종종 찾아오는 헛헛한 저녁이면 경건하게 라면과 간장종지를 들고 TV 앞에 앉는다. 그렇게 흐르는 콧물로 헛헛한 기분을 떨어 버린다.


2019년 10월 29일

나에게 없는 것을 떠올리고 원할수록 선명해지는 건 아쉬운 것들뿐이다.
그 시간에 내가 가진 것들을 들여다보고 나의 행운을 곱씹어야지.

 




우리 모두에게 자기연민이 제일 위험하다.


수험생에게 가장 위험한 건 자기연민이라는 글을 봤다. 자꾸만 나보다 더 좋은 상황에서 공부를 하는 사람들, 나와 다른 능력을 가진 사람들, 그리고 그랬던 어제의 나와 지금의 나를 비교하며 스스로를 불쌍히 여기게 된다. 나 또한 그랬다. 그리고 그게 나의 독기가 되었다. 대학 졸업을 앞두며 구태여 고등학교 얘기를 꺼내는 것은 늘 민망하지만 유일하게 독하던 시기라 어쩔 수 없다. 내 건강까지 갉아먹던 자기연민은 내 수험생활 유일한 후회다. 그때의 나를 온전히 아껴줄 사람은 나였는데, 그러질 못했다. 그래서 나는 학창 시절의 친구들에게 고맙다. 그들은 내가 어리고 못나서 나 자신도 아껴주지 못할 때부터 내 옆에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스쳐가고 다시 찾아올 때에도 옆에 있었다. 책상 앞에서의 시간과 찢어진 굳은살, 그리고 초콜릿 말고는 아무것도 믿지 않던 나에게도 친구가 있었다니. 심지어 꽤나 좋은.


아무 이유 없이 나를 믿었어야 했는데,
모든 이유 때문에 나를 믿지 않았다.


오스트리아에서 나는 다시 나를 불쌍해하기 시작했다. 오스트리아에서 용돈 받으며 생활비 걱정 없이 수업 듣고 요리해먹고 여행 다니는 것은 행운이고 행복인데 자꾸 사서 걱정을 만들었다. 더 잘 보내야 할 것 같고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경험하고 더 아끼고 더 알뜰해야 할 것 같다. 왜 이리 욕심이 생기고 나의 상황에 만족을 못할까. 나에게 휴식을 주자고 떠나온 한국을 늘 그리워했다. 한가로운 잘츠부르크의 오후, 미라벨 정원에 혼자 앉아 나는 같이 오지 못한 엄마에게 미안해했다.


이때쯤 눈물 수도꼭지가 고장 났는지 별일이 아닌데도 눈물이 났다. 예를 들어 유튜브에 김밥 만드는 영상을 보다가 오열했다. 소풍날 아침에 엄마가 일찍 일어나서 만들어놓고 출근하셔서 아침으로도 먹고 도시락으로 싸가서 점심에도 먹던 김밥이 생각나 울었다. 그리고 김밥 하나 해 먹을 수 없는 타지 생활이 서러워 울었다. 지금에서야 돌아보면 김밥 해 먹는 것도 귀찮은데 그걸 못해서 서러웠던 그 밤 자체가 이해가 안 된다. 그만큼 나는 자기연민의 시작에 있었다. 교환학생으로 1년을 산다는 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 맞을까.


다들 조금씩 부러웠다.

정도의 차이일 뿐 안 부러운 사람이 없었다.



성악가 조수미씨는 이탈리아 유학시절 첫날, 학업과 어학에 몰두할 것, 그리고 울지 않을 것을 다짐했다고 한다. 나는 슬프거나 기쁘거나 그저 그런 감정들까지 모두 온전히 나를 거쳐가도록 두는 편이다. 그러나 생각이 바뀌고 있다. 울거나 우울하게 시간을 보낸다고 나아지는 것은 없다. 지난 2주 정도 한국이 그립고 사람이 그립고 집이 그리워서 해야 할 일, 할 수 있는 일을 미뤘다. 문득 이런다고 내가 한국에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돌아간다 한들 절대 행복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여독이 있을 땐 신라면 하나 뜯어 와그작 씹어 먹는 것처럼. 그대로 두기 싫은 감정은 툭 떨어버려야한다. 


나에게 없는 것들을 떠올리고 원할수록 선명해지는 건 나의 상황과 아쉬운 것들이다. 그 시간에 내가 가진 것들을 들여다보고 나의 행운을 곱씹는 편이 낫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연민에 빠지고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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