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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딘 Feb 02. 2021

내 인생은 잘 몰라도 된다.

DAY 40 학생일 때 더 당당히 몰라야 한다.

정치학을 공부하는 내내 나는 질문에 답을 하는 게 제일 어려웠다. 넓은 학교가 산에 있으면 자의 반 타의 반 택시 탈 일이 많다. 2만 서울대생을 주로 태우는 기사님은 타자마자 관악의 현지인을 알아본다. 그리고 묻는다. "학생은 무슨 학과야?" 이때 정치학을 공부한다고 말했다간 한국 정치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논해야만 한다. 그래서 우스갯소리로 공대 쪽에서는 화학생명공학부, 그 외에는 고고미술사학과 다닌다고 대답하라는 꿀팁도 전해진다. 은근히 말이 많은 나는 곧이곧대로 정치학을 공부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질문에 답을 해야만 한다. "존경하는 정치인이 누구야?" "이번 선거는 누가 이길 거 같아?"  "대통령은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북한이랑은 어떻게 될 거 같아?" 한반도를 넘어 세계까지 관심을 갖는 분도 계시다. "미국 대통령은 제정신이야?" "중국이랑은 왜 자꾸 싸우는 거야?" 잘 모른다는 내 답이 끝나기도 전에 질문하시는 기사님의 눈이 반짝인다.


나보다 정치에 관심 있는 사람이 이토록 많은데 감히 정치학을 공부한다고 말해도 될까.




가을이 만연하던 10월 17일, 크리스와 자전거를 탔다. 조금 멀리 있는 호수까지 자전거를 타고 가서 저녁을 먹고 돌아왔다. 'short biking'이라고 말해서 한강에서 따릉이 타듯이 가볍게 타는 줄 알았는데 왕복 20km를 넘게 산길을 달렸다. 방으로 돌아가는 트램에서 궁둥이가 아파 힘들었을 정도. 한국 영화와 드라마를 즐겨보는 크리스는 내가 엄복동쯤 되는 줄 알았나 본데 어림도 없다.


크리스가 지난 2주 동안 한국을 다녀온 사이 나는 포르투와 뮌헨, 프라하를 다녀와 서로의 여행 이야기를 잔뜩 했다. 뮌헨 옥토버페스트에서 대낮부터 취해 길바닥에 앉아있던 이야기, 상하이에서 경유하며 만리장성을 갔다가 길을 잃어 국제미아가 될 뻔한 이야기 등 모든 여행은 저마다 우여곡절이 있는 법이니까.


하필이면 2019년 10월 9일 경복궁에 갔던 크리스는 광화문 집회를 마주했고 엄청난 인파에 갇혀있다가 겨우 빠져나와 친구를 만났다. 나조차 예상치 못한 거대한 집회 속에서 당황한 외국인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정치적인 모멘텀에 본인이 있었던걸 나중에 알았다고 한다. 나는 그날 이후 그 사람이 사퇴해서 집회에 대한 회의감이 든다고 말했다. 크리스는 오히려 결과를 바꾼 건 집회가 성공한 거 아니냐고 물었다.


돌고 돌아 또 나에게 던져진 정치에 대한 질문이다. 집회로 내려오라 마라로 결정하기에는 보다 복잡한 문제였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식의 마무리가 더 허무했다. 내가 허무하니까 집회는 실패라고 말할 수 없었다. 외국에서 장르 불문하고 "그래서 한국인인 너는 어떻게 생각해?" 질문을 받으면 한국인을 대표해서 발언을 하는 기분이라 대단한 논리로 말을 해야 할 것만 같다. 그래서 나는 또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자세히 보면 보이는 나와 자전거




정치철학 연구에서 영원한 답은 없으며 영원한 질문만 있다.

<정치철학> p.22


수백 년의 정치 철학사에서 극히 일부에 해당하는 한 학자도 정치철학을 질문의 학문으로 단정 짓는다. 그러면 내가 내 인생을 질문의 삶이라고 말하는 것 정도는 해도 되지 않나. 조금은 더 자신 있게 내 미래를 잘 모르겠다고 말해도 되지 않나. 졸업하고 뭐할 거냐는 상투적인 인사말에 점점 작아질 필요가 없지 않을까.


"자기 인생에 물음표를 던지지 마. 그냥 느낌표만 던져."


청춘을 응원할 때 많이 회자되는 문구다. 느낌표를 던지라는 말이 의문을 갖지 말라는 말인 줄만 알았는데, 그래서 고민하지 말고 행동하라는 말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어떤 말이라도 자신 있게 던지라는 뜻이다. 행여 그게 남들과 다르더라도, 그래서 틀리다고 여겨지더라도 자신 있게 던져 내보이라는 뜻이다.



 

모르는 건 모른다고 말하세요.
부끄러워하지도 말고 당당하게 모릅니다!


대학에 들어온 이후 끊이지 않고 과외선생을 하며 첫 수업 때 강조하는 말이다. 누군가 나에게 공부비법을 물으면 모르는 걸 빨리 인정하면 된다고 말한다. 내가 맞은 문제 하나하나가 내 실력인지 운인지 냉정하게 파악하는 게 성적을 좌우한다. 어느 수업을 들었으니까, 어느 학원에서 배웠으니까 알고 있다는 말을 하지 않아야 한다. 공부를 잘하려면 스스로 얼마나 알고 모르는지를 애써 알아내야만 한다.


그런 의미에서 학생은 몰라도 되는 유일한 직업이다.


영어단어 뜻을 묻는 학생에서 선생이 모른다고 말할 수 없다. 먹어본 적 없는 음료가 무슨 맛이냐고 묻는 카페 손님에게 아르바이트는 안 먹어봐서 모른다고 말할 수 없다. 시청에 전입신고를 하러 와서 어느 서류를 작성해야 하냐고 묻는 민원인에게 공무원은 모른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니 우리는 학생일 때 더 당당히 몰라야 한다.





내 주변에도 점점 삶에 물음표 던지는 일을 주저하는 사람이 많다. 그들 안의 물음표를 최대한 느낌표처럼 보이도록 만든다. 확실한 목표가 있어야 하고, 지금 이 시간의 이유를 말할 수 있어야 하고 그래서 남들이 나를 느낌표로 기억하도록 만든다.


어쩌면 학생 때 아는 체 해야만 했던 우리들의 관성 같은 게 아닐까. 


모르겠다는 말을 주저해온 습관이 생겨버려서 물음표 하나를 던질 때마다 부끄러워지는, 그래서 차마 잘 모르겠다고 말하지 못하는 관성. 감히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고 싶다.


적어도 내 인생은 잘 몰라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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