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72 베네치아에서 돌아오는 길은 최악이었다
2019년 11월, 반백년만의 대홍수가 찾아온 베네치아에 있었다.
산타루치아 역 앞 찰랑거리는 바닷물과 발판 위를 걷는 사람들. 1층에서 2층으로 전자기기를 옮기는 분주한 움직임. 그리고 점점 차오르는 물. 숙소 앞 광장에서 끊긴 발판에서 무릎 높이까지 차오른 물을 보며 주저하는 사이 가죽부츠를 신은 신사가 아무렇지 않게 걸어갔다. 그래서 나도 바지를 걷고 그대로 걸어 숙소에 도착했다. 그해 가을 베네치아는 그랬다. 처음 겪는 물난리 속 의연한 사람들, 그리고 나.
잠깐씩 비치는 햇빛에 감사하며 3일을 보냈다. 추천받은 맛집은 물에 잠겨있어서 걸어 다니다 얼굴만 한 머랭을 사서 즐거웠다. 재즈바 천장에는 온통 여자속옷이 걸려있었고 기대했던 리몬첼로는 맛이 없었다. 다음날 거짓말처럼 날이 좋아져서 부라노 섬에 갈 수 있었다. 전날까지 수상택시가 아예 운행을 안 했을 정도 대홍수라 관광객이 없었고, 그래서 섬 사람들이 젖은 장화를 말리는 그런 일상을 볼 수 있었다. 바싹 말라있던 길이 해산물 튀김 먹는 사이 잠겨서 걸을 수 없는 길이 되었다. 밀물과 썰물 시간을 확인하며 다녀야 했지만 대신 고여있는 물웅덩이에 비친 하늘이 예뻤다. 날이 흐려 베네치아의 상징 곤돌라가 거의 다니지 않았는데 그중 한 커플의 프로포즈 순간을 함께했다. 겨우 찾아간 칵테일 바는 문을 안 열었고 돌아오는 길에 들어간 식당에서 먹은 스프리츠는 아직도 그립다.
전체적으로 힘든데 순간순간 행복으로 채워진, 쉽게 요약할 수 없는 그런 여행이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은 감히 최악이었다.
베네치아에서 린츠로 가기 위해 버스를 타고 기차역에서 기차를 탔다. 어서 물난리에서 벗어나 내 방에 눕기를 기대했다. 비행기 타는 게 싫어서 다음날 아침에 있는 독일어 시험공부도 할 겸 기차여행을 계획한 게 문제였을까. 점점 느려진 기차는 콰쾅 소리를 내며 멈췄다. 시간은 오후 4시 정도였으나 이맘때 유럽은 4시쯤 해가 졌기 때문에 기차 밖은 이미 암흑이었다. 아무 방송도 나오지 않고 멈춘 채로 화면의 도착시간이 2시간 늦춰지는 걸 보며 이게 유럽이지 생각하며 독일어 공부를 했다. 그러다 기차 안 조명이 꺼졌다. 아무리 독일어권이지만 중요한 이야기는 영어로 알려주겠거니 믿은 나의 마지막 희망이 사라졌다. 독일어로 안내방송이 나왔고, 손전등을 들고 다니는 역무원을 쫓아 승객들의 독일어 질문이 와다다 쏟아졌다.
이쯤 되니 당연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옆자리 승객에게 영어로 설명을 부탁해서 겨우 상황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눈 때문에 철길이 끊겨서 다시 온 길을 반대로 끌고 갈 가솔린 열차가 오면 근처 역에서 버스로 잘츠부르크까지 갈 예정이고, 거기서 알아서 목적지로 가면 된다고. 그래서 가솔린 열차가 올 때까지 전력을 아끼기 위해 차단했다고.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평정심이라도 찾자는 마음으로 독일어 교재를 보는데 겨우 색깔 외우고 취미 묻는 대화를 하는 나에게 쏟아지는 독일어 안내방송이 가혹하게 느껴졌다. 제발 꿈이면 좋겠다.
그렇게 잘츠부르크에 도착한 게 새벽 1시 반. 갈아탈 기차의 첫차는 4시. 너무 춥고 11시에 먹은 빵이 마지막 곡기였고 당장 눕고 싶었으나 셋 중 어느 하나도 할 수 없었다. 나는 기차가 끊긴 역에서 무사히 밤을 새워야 하는 처지였다. 가장 서러웠던 건 나와 같은 처지였던 이들이 역까지 데리러 온 일행을 만나 반갑게 인사하는 장면을 볼 때다. 한국이었으면 나도 누가 걱정하고 마중 나오지 않았을까. 어느 시골 기차역이더라도 딸랑구를 데리러 왔을 아빠를 상상했다. 그리고 다시 내 처지를 파악했다. 오늘 밤 기차역에서 무슨 일이 생겨도 아무도 나를 구해줄 수 없다. 긴장하고 굶주리며 첫차를 타고 트램을 타고 기숙사에 온 게 새벽 다섯 시 반. 세 시간 후의 독일어 시험, 갑자기 내린 폭설, 불친절한 유럽인들, 비행기 대신 기차를 예매한 과거의 나, 모든 것들을 원망했다.
다이어트할 때 아는 맛이 제일 무서운 것처럼 아는 책만이 갖는 힘이 있다.
내용이 궁금해서 책장 넘기기를 멈추지 못하는 날이 있는가 하면, 몇 번이고 읽어서 분명히 기억하는 책을 다시 읽고 싶을 때가 있다. 험난한 여정으로 지쳐버린 때문인지, 그날 내 마음이 <여행의 이유>를 꺼내 읽었다.
여행자는 낯선 존재이며, 그러므로 더 자주, 명백하게 분류되고 기호화된다.
국적, 성별, 피부색, 나이에 따른 스테레오 타입이 정체성을 대체한다.
즉, 특별한 존재somebody 가 되는 게 아니라 그저 개별성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여행자는 '아무것도 아닌 자', 노바디nobody 일 뿐이다.
김영하, <여행의 이유> p.155
작가는 외눈박이 괴물 키클로스의 섬으로 굳이 쳐들어가 죽을 뻔한 위기를 겪는 <오디세이> 주인공 오디세우스의 이야기를 덧붙인다. 내가 누구인지를 나만 아는 상황이 지속되면 무모하게 타인의 인정을 갈구한다는 예시다. 이해하지 못했었다. 유럽에 오지 않았다면 아직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제는 노바디에서 벗어나고 싶은 오디세우스의 마음이 이해된다. 사람을 무모한 바보로 만들 정도로 두려운 당혹스러움이다. 이렇게 내가 사라질까봐 두려워서 어떻게든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떤 능력을 지녔는지를 인정받을 수만 있다면 무모한 일이라도 할 수밖에 없는 그 마음. 노바디로 살고 있었기 때문일까.
그래서 베네치아에서 돌아오는 길은 최악이었다.
그들에게 나는 철저하게 노바디라서. 아무도 나한테 상황을 설명해주지 않아 결국 내가 옆자리의 승객에게 부탁해서 설명을 들어야만 했다. 이 버스를 타면 어디로 가는지, 어느 플랫폼에서 기차를 타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쏟아지는 독일어 대화를 비집고 영어로 물어봐야만 내 갈 길을 알 수 있었다. 점점 내 존재감이 사라지는 기분. 이대로 두면 내 존재도 사라질 것 같은 두려움. 잠자는 키클롭스의 눈을 구태여 찌른 오디세우스처럼 나는 매일 밤 일기를 썼다. 그리고 나조차도 내가 노바디처럼 여겨질 때 내가 쓴 일기를 읽었다.
그렇게 노바디가 되는 두려움을 이길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