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89 좋은 사람이 좋은 여행을 만든다
유럽여행이 흔하던 시절, 커뮤니티를 통해 동행을 구해 여행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다. 나는 그렇지 못했다. 남을 잘 믿지 않는 사람이라 나의 소중한 순간에, 그리고 그 공간에 누군가를 들이는 일을 주저하기 때문에 여행을 남이랑 같이 한다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다. 그래서 혼자 영화 보고 혼자 카페 가고 혼자 밥 먹는 일이 많다. 특히 가장 아끼는 공간들은 혼자만 간다. 나중에라도 그 사람과 사이가 안 좋아지면 함께한 기억이 묻은 공간을 편하게 갈 수가 없어지니까. 모든 공간에는 기억이 묻어있다.
반대로 생각하면 그만큼 나한테 사람이 중요하다. 어느 곳에 가든 무엇을 먹든 함께한 사람에 따라 기억의 느낌이 달라진다. 한 친구는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날씨와 사람이라고 말했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다. 여행을 가서 어딜 가는지 어느 숙소의 침대에서 자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때로는 맛없는 음식을 먹는 것도 큰 문제는 아니다. 지난 여행에서 행복한 순간들은 아름답게 떨어지는 해를 보고, 저녁에 와인 한잔하며 대화를 나눌 때이다.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건
날씨와 사람이다.
그다지 친하지 않아도 같이 여행 가고 싶은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이랑 같이 여행 가면 좋겠다. 왜인지 함께 어딘가로 떠나면 좋을 것 같은 사람. 마찬가지로 처음 와봤지만 누군가랑 같이 오고 싶은 여행지가 따로 있다. 그 사람과 여기에 오면 좋겠다. 예를 들어 프라하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이 떠오르고 포르투에서는 엄마가 떠오르는 것처럼. 그 둘이 만나 '이 사람이랑 여기를 같이 가고 싶다'의 구체적인 명제가 되는 건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그토록 많은 일행들이 돌아오는 여정에 약간의 불편함과 함께한다. 그 마음이 새어 나와 싸우기도 하고, 그렇지 않더라도 데면데면해지기 쉽다. 좋은 날씨는 권한 밖의 일이라 쉽게 포기할 수 있지만 사람은 내가 정하는 거라 아쉬움이 큰 법이다. 그래서 좋은 사람인 줄 믿었던 사람과 함께하는 여행은 보통 최악의 여행이 된다.
실망하지 않으려면 차라리 혼자 떠나 스쳐가는 사람과 시간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전략이다.
여행을 가는 것과 가보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바르셀로나, 파리, 런던 그리고 오스트리아 빈 정도는 계획해서 가는 도시들이다. 그러나 좀 더 작은 도시들, 내가 지낸 린츠와 그 옆의 잘츠부르크, 프라하, 체스키 크룸로프는 기회가 생기면 한번 가보는 도시들이다. 이를테면 추가 구성품 같은 목적지. 유럽에서 이 둘을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은 직항으로 올 수 있는지다. 점점 인기를 끌고 사람들이 이곳을 가게 되면 항공사에서 재빠르게 직항 노선을 만든다.
오스트리아에서 교환학생으로 지내면서 가장 좋았던 점은 그런 도시들을 편하게 가볼 수 있다는 것이다. 당일치기로 빈과 잘츠부르크, 프라하를 다녀올 때면 유럽인의 특권을 잠깐 빌려 낭만이 가득한 곳들을 아무 때나 눈에 담을 수 있었다. 타지 생활 중 마음고생이 많았지만 그만큼 눈이 호강해서 돌아보면 다 행복했던 것만 같다.
그중 잊지 못할 오스트리아 국내여행은 그라츠다. 그라츠는 그다지 유명하지 않지만,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을 이어 2번째로 큰 도시이다. 그리고 현지인들이 많이 사는 것 같다. 외지인에 대한 따가운 시선이 꾸준히 느껴졌다. 그중 악의가 있는 차별도 있었지만, 관광객이 낯설어서 보내는 경계도 많았다. 니하오를 넘어 칭챙총을 직접 당한 건 그라츠에서 처음이었고, 거리의 할아버지들은 아주 호탕하게 우리를 비웃기도 했다. 이래서 유명한 관광지들이 시민의식을 강조하는 걸까. 내 집 같은 편안함은 아니더라도 남집같은 불편함은 주지 않는 건 바로 시민의식에 달려있다. 그리고 그 시민의식이 없는 곳이 그라츠다.
그럼에도 그라츠를 미워할 수 없다. 그라츠를 가본 용기를 인정받은 것처럼 선물 같은 노을을 마주했다. 불타는듯한 하늘과 저 멀리까지 이어지는 주황 지붕들을 잊지 못한다. 이런 하늘이 있을 수 있고 또 내가 그걸 볼 수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황홀한 노을이었다. 내내 흐린 유럽의 겨울에 기대 없이 만난 노을이라 깜짝 선물 같았다. 다신 못 볼 노을과 하나같이 맛있던 음식들, 그리고 같이 있었던 친구까지 더할 나위 없는 여행이었다.
그래서 다음에 기회가 생기더라도 선뜻 그라츠를 다시 가기 꺼져진다. 더 좋은 기억을 남기기 어렵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너무 행복해서 어디에든 뽐내고 싶을 정도.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요소가 날씨와 사람인데, 그라츠 여행은 이를 모두 충족했다.
덕분에 나는 그라츠에 다녀온 누구보다도 그 도시를 예쁘고 빛나게 기억하고 있다.
이맘때 나는 파리행 비행기를 타러 빈 공항에 갔다가 그대로 기숙사로 돌아왔다. 여러 이유들이 있었지만 돌아보면 사람 때문이었다. 파리를 가려고 한건 도시가 주는 낭만도 있었지만 파리에 친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친구가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같이 파리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그러나 예기치 못한 상황으로 내가 파리에 가도 그 친구를 편하게 볼 수 없게 되었고 그럼에도 파리에 가려는 마음에 공항까지 갔다.
파리는 나에게 꿈의 도시였고 지금도 그렇다. 유럽에서의 교환학생을 꿈꾸게 만든 것도 파리였고 프랑스어를 공부한 이유도 파리 때문이다. 이후에 처음 에펠탑을 마주했을 때는 눈물이 날 정도로 벅차올랐다. 파리는 나에게 그런 도시다. 그리고 그런 파리 여행을 내 의지로 포기하게 만든 건 사람이다. 좋은 여행을 결정하는 두 가지 중 하나가 사라졌으니까 그 여행은 가지 않는 게 당연했다.
좋은 사람이 좋은 여행을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