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는 생활력이 약한 편이었다.
한국에 있을 때는 물건을 사거나 서비스를 이용할 때,
할인, 쿠폰, 프로모션 같은 건 딱히 알아보지 않고,
제 값을 주고 셈을 치르는 편이었다.
제 값이니 손해는 아닐 거라 생각하며 사지만, 결론적으론 손해를 보면서 사는 편이었다.
2.
학교를 다닐 때는 공부를, 회사를 다닐 때는 일에 몰두했다.
분야에서는 평균 이상을 했다고 생각하지만, 생활력은 늘 평균 미달이었던 것 같다.
시장이나 마트보다는 편의점에서 식료품을 사고, 통신사 할인이나 포인트 적립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던 것 같다.
생활과 관련된 할인정보를 찾아보거나, 누군가에게 물어보는 것이 그냥 귀찮았던 것 같다.
3.
여자 친구는 생활력이 강한 편이다.
자린고비는 아닌 게 여행, 맛집, 자기 계발에 필요하다면 돈보다는 아웃풋을 보면서 쓸 때는 쓰는 성격이다.
다만 쓸 때 없이 소비되거나, 발품을 팔아서 아낄 수 있는 건 최대한 아끼는 편이다.
여자 친구의 합리적인 소비 습관과 나의 귀차니즘은 연애 초반 종종 부딪히는 문제였다.
4.
예를 들어서 항공권을 구매할 때,
여자 친구는 기기를 바꾸거나, 시크릿 모드로 들어가거나, 결제 통화를 원화/링깃으로 변경했을 때
가격을 비교해 보고 더 저렴해지는 걸 다 체크해 보고 사는데,
나는 그냥 귀찮고 얼마 차이가 나지 않으니 대충 사고 끝내자고 할 때가 있었다.
여자 친구가 스트레스받는 게 싫다는 표면적인 이유도 있었고,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냐는 귀찮은 속내도 있었다.
5.
사실 이 문제는 정답이 있기 때문에, 내 (귀차니즘 관련) 고집은 금방 꺾였다.
지금은 나도 여자 친구에게 감화되어서, 발품을 파는 것에 익숙해지고 그 맛을 알게 됐다.
마트나 카페에 회원가입 후, 포인트를 적립받아서 할인받기도 하고,
물건을 살 때 여러 브랜드를 비교하고 상세 후기를 참고해서 결정하기도 했다.
(포인트로 먹는 공짜 커피가 더 맛있다)
6.
4월엔 웨딩 스냅 촬영이 예정되어 있는데, 나는 안경을 쓰기 때문에,
촬영 때 빛반사를 방지하기 위해서 콘택트렌즈를 착용해야 했다.
말레이시아에서 여자 친구가 몇 번 들렸던 안경점을 가보니, 30일 원데이 렌즈를 권유해 줬다.
촬영 한 번을 위해서 몇만 원짜리 일회용 렌즈를 2통이나 사려니 내심 돈이 너무 아까웠다.
(양 눈 시력이 달라서 2통을 사야 했다)
예전에 여자 친구가 여기서 렌즈를 살 때, 서비스로 샘플 렌즈를 제공해 준 것이 문득 기억났다.
나는 스태프에게 사정을 설명하면서, 딱 한 번만 끼면 되는데, 혹시 남는 샘플이 없는지 물었고,
내 도수에 맞는 샘플이 때마침 남아서 2개를 얻을 수 있었다.
고마운 마음에 별점 5점의 후기를 남겼다.
7.
나는 원래 남들에게 부탁하는 것도 싫어했다.
남들 부탁을 들어주는 건 꺼리지 않지만, 내가 부탁하는 게 싫어서 그냥 내가 하고 말지 하는 성격이었다.
이건 지금도 어느 정도 비슷하긴 하다.
다만 부탁도 여러 종류의 갈래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상대에게 부담이 없는 선에서 부탁을 하는 건 서로 기분 좋은 일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8.
며칠 전 여자 친구의 사원증 케이스가 부서진 일이 있었다.
여자 친구와 내가 다니는 회사는, 보안 규정 때문에 사원증이 없으면 사무실에 들어갈 수가 없다.
사무실 입구에는 시큐리티 가드가 지키고 있고, 출입 시 가방 검사도 한다.
매일 보던 사이다 보니 시큐리티와는 종종 잡담을 나누면서 친해지게 됐다.
원래라면 사원증 케이스를 근처 잡화점에 가서 하나 샀을 것이다.
시큐리티가 임시 출입증을 관리하던 게 기억나서, 혹시 남는 케이스가 있으면 하나 줄 수 있냐고 넌지시 부탁하니, 시큐리티 친구는 흔쾌히 하나를 건네주었다.
9.
최근 들어서 보면, 내가 오히려 여자 친구 보다 더 꼼꼼해진 거 같기도 하다.
내 생활력이 높아지는 것을 보면서 놀라워하는 여자 친구를 보는 것도 새로운 기쁨이다.
어쩌면 여자 친구는 이런 과정을 통해서 내가 얼마를 아끼거나, 절약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함께 노력하는 것에 대해 인정받고 공감하길 원했던 것 같다.
작은 절약을 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내가 능동적으로 느끼고 행동한 것이 여자 친구에겐 크게 다가온 것 같다.
10.
큰 행동만 변화를 불러오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별거 아닌 일이거나 작은 부분에서도 변화를 느낄 수 있다.
여자 친구의 생활력이나 근검절약을 따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도 그 부분에 맞춰서 자연스럽게 변화하고, 이런 소소한 일들이 쌓이다 보니
여자 친구와 점점 더 가까워지는 기분이 들고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째끄마, 너는 물리적으론 작지만 내 마음속에선 제일 큰 존재란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