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精神)을 전철에 두고 내렸다.
요즘
멍한 일이 잦다.
전철 출구를 나오면서 가방을 두고 내렸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가방에는 신분증, 사원증, 법인카드를 비롯해 각종 카드가 들어 있는 '지갑'과 국제면허증을 만든답시고 한 달 동안 그냥 갖고 다녔던 '여권', 잡다한 메모를 적은 '노트'.. 그리고.. 무엇보다 소중한.. 스마트폰 등.. 정말 잃어버리면 '귀찮을' 것들이 온갖 들어있었다.
순간 까마득했다. '오 마이 갓'. '오 마이 갓'을 연발하며 황급히 역사(驛舍) 사무실로 뛰어 들어갔다. 나의 호들갑과 관계없이 그곳은 매우 평온해 보였다. 사람이 찾는 곳이 아닌 듯했다. '저기요.. 저기.. 저 손님 왔는데..' 나는 엄연히 손님이다. 심지어 하루 2번씩이나 애용하는 단골이다. 출근 때마다 이용한다고 치면 월 6만 원 상당의 요금을 납부하는 '60 요금제' 고객이다. 그런데 아무도 쳐다보지 않다니.
사무실에는 신참으로 보이는 젊은 직원과 어린 공익요원, 적어도 관리자급으로 보이는 50대 후반의 '선생님' 한분이 계셨다.(직함을 모를 때는 통상 '선생님'이라고 칭한다.) 선생님은 사무실 저-기 안쪽에서 심각한 얼굴로 모니터에 집중하고 있었으므로, '나의 사건'과 가장 업무 연관성이 높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공익요원'에게로 다가갔다.
공익요원은 분명 내가 온 것을 알고 있었다. 모른 척 했을 뿐이다. '내가 널 찍었어' 내가 주시하자 그는 힐끗 보며 나를 의식하는 듯했다. 그에게 다가가자 그는 '자연스러운 듯 어색하게' 자리를 피하려고 했다.
"저기.. 제가요. 그 지ㄱ.."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는 더 안쪽에 있던 젊은 직원을 공손히 가리키며, 자신은 이 곳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과도 관련이 없는 일명 'したばり'임을 강조하며 사건을 담당 형사계.. 아니 담당자에게 넘겼다. 그 직원은 스마트폰에 열중하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이시죠?"
그는 적어도 <공무원 친절교육 3기 과정> 정도는 이수한 사람의 표정으로 '일단 응대는 하겠다만... 너의 어떤 얕은 속셈에도 넘어가지 않겠어'라는 느낌으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맘이 급했다. 방금 차에서 내렸기 때문에 열차가 다음 역에 도착하기 전에 빨리 조치를 취한다면 전철에 타고 있던 '스미스 요원(?)'이 나의 물건을 확보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매우 조급했지만 난 '지성인이므로' 육하원칙에 의거 침착하게 말했다.)
"제가요. 방금 떠난 문산행 열차에 검은색 가방을 선반 위에 두고 내렸습니다. "
젊은 직원은 그제야 귀를 기울였다.
"거기 신분증이랑 여권이랑 중요한 게 많이 들어있어서 꼭 좀 찾아주세요"
"위치를 기억하시나요?"
"끝에서 3번째쯤 되는 열차고.. 올라오는 에스컬레이터 바로 앞이고요.. 까만색 넙적한..."
나름 침착하게 위치의 단서가 될만한 정보를 회상해 진술을 마쳤다. 젊은 직원은 빠른 손놀림으로 키보드를 두드리며 현재의 운행 위치를 찾았다. 열차는 다음 역을 출발해 금촌을 향하고 있었다. 직원은 뭔가를 고민하더니 저기 안쪽에 있는 '선생님'을 찾아가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다소 날카로운 표정의 '선생님'이 내쪽으로 걸어와 진지하게 물었다.
"위치를 기억하시나요?"
"네. 끝에서 3번째.. 기차고.."
"어느 쪽 끝이요?"
열차의 끝은 2개다. 헛갈렸다. 그게 앞쪽 끝인지, 뒤쪽 끝인지.. 그래서 새로운 단서를 제시하기로 했다.
"올라오는 에스컬레이터의 바로 뒤쪽 칸이요"
"어느 에스컬레이터요?"
"올라오는 에스컬레이터요.."
바보 같은 소리로 들렸겠지만 내가 내렸던 곳에는 하행 에스컬레이터는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이야기하면 알 줄 알았다. 알고 보니 그런 에스컬레이터가 반대편에도 있었던 것이었다. 나의 진술은 그들에게 혼란만 가중시켰다.
"저기 괜찮으시면 제가 함께 내려가 정확히 설명을 할 수 있는데요..
그들은 주저했다. 그때 젊은 직원이 적극적으로 나서 함께 다녀오겠다고 했다. 나는 마치 사건 현장을 검증이라도 하듯 현장으로 뛰어내려가 굳이 안 해도 되는 열차에서 내리는 행동부터 에스컬레이터로 향하는 장면을 재연하며(서프라이즌줄) 나의 진술에 신빙성(信憑性)을 더하고자 노력했다. 그들은 역사의 도면을 앞에 두고 상의를 하더니 자기들만의 암호 같은 코드로 어디론가 연락을 취했다.
"1138 열차 A3-11.. A8-09 랙 08. 까만. 까만색 가방 확인 "
그제야 알았다. 경의선 열차에는 KTX 안내원이나 커피판매원, 차장, 공익요원 등이 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열차가 월롱에 도착하면 요원이 뛰어 들어가 선반을 확인해야 했다. 그렇게 긴박한 10분이 지났다. 연락을 마친 선생님은 나에게 밖에 나가서 기다리라고 했다.
"아.. 네네.. 감사합니다... 제 가방 좀 꼭 좀.. 찾아주세요"
초조함은 말로 다할 수 없었다.(하지만 지성인이므로 다리를 떨거나 손톱을 물어뜯지 않았다.) 이 '아.. 여권.. 또 새로.. 아놔.. 아 거기 증명사진도 넣어놨는데. 아.. 오가다 쿠폰 2개만 더 찍으면 무룐데.. 메모지에 내 인생계획이 있는데.. 마누라가 왜 안 오냐고 그럴 텐데..'
잃어버린 아이를 기다리는 부모로 빙의해서 대합실에서 마음을 졸이며 기다렸다. 그렇게 20분이 지난 후. 경의선의 종점인 ‘문산역(汶山驛)‘에 가방을 보관해 뒀다는 통보를 받았다.
"아멘. 아멘 아멘. 할렐루야"
너무 기뻤다. 너무 기쁘고 감사했다.
너무 기쁜 마음에 반사적으로 아이들 주려고 샀던 빵을 보답으로 선뜻 내밀...(었어야 하는데)
난데없이
'큰 고민'에 빠져버렸다.
문제) 철수는 가방을 잃어버렸지만 역사무소 아저씨들의 헌신적 도움으로 가방을 찾게 되었다. 도움을 준 사람은 a) 철수의 가방이 어디 있는지 찾은 아저씨 b) 철수의 가방을 찾기 위해 달리는 전철로 냅다 뛰어든 아저씨 c) 가방을 보관 중인 종착 사무소의 예쁜 누나 등이었다. 누구의 공이 가장 큰가? 다음 중 알맞은 답을 고르시오. (3점)
정리하자면
‘찾아서 보관 중인 문산역’에 보답해야 할지..
‘찾는데 힘써 준 탄현역’에 해야 할지 헛갈리게 된 것이다.
이것은 짜장면과 짬뽕, 또는 물냉과 비냉을 선택하는 것과 비슷한 수준의 난제였다.
정신이 혼미해진 나는 굉장히 어색하게 손을 내밀었다가 거두고는 웃으며 출구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역으로 들어오는 등의 영문 모를 행동을 하며 (왜 저래?) 결국엔 사무실로 다시 들어와 "아.. 하하하. 정말 고맙습니다." 멋쩍은 웃음으로 감사하단 말을 건네고 문산행 열차를 탔다.(역시 말만 한 사람보다 뛰어다닌 사람이 공이 크지)
흥분된 기분으로 30분을 내달려 문산에 도착하니 어여쁜 역무원이 상냥한 미소로 가방을 건네줬다. 은인(恩人)의 환한 미소에 반하는 순간.. 이곳에 선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왠 걸. 이번엔 몸이 말을 듣지 않고 감사하단 말만 남긴 채 등을 돌리게 된 것 아닌가.. (이런 것을 두고 의학용어로 '病身'이라 하는 건가?)
나는 나의 뇌(腦)를 붙들고 설득했다. ‘이런 천하의 배은 망덕 한 놈을 봤나. 가방을 찾아줬더니 고작 <감사의 말>따위나 하고 떠나다니…’ 이것은 동방예의지국을 살아가는 군자(君子)의 도리가 아니지 아니하지 않느냐!! 인의예지 희로애락 구애오욕 사칠이기 퇴계이황...
내가 분실한 것은
가방이 아니라
정신이었다.
정신은 나갔으나 다행히 개념 있는 다리가 도왔다. 평소 짧다고 무시했는데 다리가 충신(忠臣)이다. (내 이놈의 머리를 읍참마속(泣斬馬謖)의 심정으로 에잇!!) 나는 다리에 의지해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 손에 들고 있던 '빵'을 건네.... 자니 ① 뭔가 사례로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어서인지.., ② 아이들의 반짝이는 눈이 생각났던 것인지.. ③ 다시 돌아가야 할 탄현역 개찰구에 서있을 은인들이 생각난 것인지.
결국 사무실 앞에서 발길을 멈췄다.
나의 '다리는' 주변을 두리번 거리더니 마침 앞에 있는 편의점으로 발길을 옮겼다.(여기까지 뇌(腦)가 한 역할은 없다.)
정신 나가 있던 머리를 겨우 일으켜 세워 편의점을 둘러보다가.. 엉뚱하게도 이따위 생각이 들었다.
'아.. 세븐일레븐이나 C.U 가면 할인카드 적용되는데..'
결정장애자에게 '선택'이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선택장애자 이 모씨는 3.2평 남짓되는 좁은 편의점을 삼보일배(三步一拜)하듯 네 바퀴를 순회했다. 그리고 고른 것이 초코파이다. '情'이라는 한자. 오버랩되는 CF.
하지만 초코파이는 역시.. 오글거린다는 생각에 '과감히' 양과자(洋菓子)인 프링글스로 전격 교체했다.
드디어 결정!!
"사장님. 이거 두개씩 두 봉지에 나눠서 담아주세요"
결국 두 역사 모두 갖다 주기로 대단한 인심을 쓴 것이다.
사무실로 가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역무원이 무슨 영문인가 싶어 고개를 내밀었다.
"저.. 이거 너무 감사해서요.." 수줍게 프링글스 봉투를 내밀었다. 그녀는 환한 미소와 함께 고맙다고 말했다. 나도 기분이 좋았다. (이런 건 거의 KBS <TV동화> 같은데 나오는 명장면이 아니었던가..)
남은 프링글스 봉지를 들고 탄현행 열차에 올랐다.
퇴근한지 3시간 만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