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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호리 Aug 05. 2015

#2.바나나 시식 코너에서 생긴 일

소신이란 무엇인가

얼마 전의 일이다. 딸 애로부터 전화가 왔는데 오는 길에 반드시 ‘김밥 만들기’를 사오라고 했다. 설명을 들어보니 애들이 놀이처럼 김밥을 만들 수 있는 재료를 패키지로 만들어 둔 것 같았다. 아내는 동네 슈퍼에는 팔지 않으니 큰 마트에 가서 장을 봐오라고 일러주었다.


퇴근하고 부리나케 이마트로 향했다. 쉽게 신선식품코너에서 찾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김밥만들기'는 없었다. 이대로 허탕을 치고 마는 것일까.. 단무지랑 당근이랑 재료를 좀 사가 볼까..


마침 옆에 냉면 시식코너가 있어서 덜어둔 냉면을 한 컵 마시면서 '김밥만들기'란게 없냐고 물었다.

아주머니는 건너편 단무지 파는 곳으로 가보라고 했다.


단무지 코너를 찾는 길은 엄청난 유혹이 도사리는 고역의 길이었다. 정성스레 장만한 시식코너들이 저녁시간 시장기를 자극했다. 떡갈비, 군만두, 훈제오리, 훈제 삼겹살, 묵채 등 고급 한식집에서 나오는 각종 기름진 요리의 향연이 펼쳐졌다.


요리품평가가 된냥 차려진 요리들을 하나씩 음미하며 단무지 코너로 향했다. 쉴 새 없이 입을 오물거리며 걸어가는 회사원 차림을 한 내 모습은 약간은 빈(貧)하게 느껴졌으리라. 마치 하나라도 더 먹겠다는 태도와 눈빛으로 이곳을 어슬렁 거리는 것은 확실히 우스운 일이다.


단무지 코너에는 딸아이가 요청한 김밥 만들기가 있었다.

야채김밥과 소고기 김밥을 들고 계산대로 향하는데..


바나나 재배의 최적지라 불리는 필리핀 민다나오(Mindanao) 섬에서 갓 공수해온 …것으로 보이는….

델몬트 클래식 바나나 시식코너가 눈에 들어왔다.


본능적으로.. 아니.. 마침 평소에 델몬트 과육의 당질과 육질의 조화로운 퀄리티에 관심이 있던 터이고 정성스레 준비하는 상냥한 얼굴의 언니가 조금은 쓸쓸해 보이기도 하고, 말벗이나 해줄 겸… 계산대로 가는 길에 잠시 들러 바나나를 조금 시식해 주려고 다가 섰다.


가지런히 준비해 둔 유기농 초록 녹말 이쑤시개를 들고 바나나를 집어 보려는데 이놈이 마치 해삼처럼 자꾸만 빠져 나가는게 아닌가? 신경을 집중해 다시 육질의 탄탄한 부위를 깊이 질러 올리는 순간 옆에서 엄청난 기운이 느껴졌다. 어디선가 나타난 분홍색 등산복 차림의 아줌마가 내가 들고 있던 바바나의 촉촉히 기름진 면에 자신의 손바닥을 비누칠을 하듯 쭉 들이밀어버리는게 아닌가.


'이것은 테러다'..  혼란스러운 가운데. 뭔가 시덥잖은 일에 괜히 사과한다는 늬앙스가 풍기는 투의 '미안해요'라는 작은 소리가 내 청각기관(聽覺器官)을 스쳐 지나갔다.


평화로운 저녁..

갑자기 다가와 내 마음을 송두리채 들었다 놔버린

이 상황은 나에게 적잖은 고민과 번민, 심지어 연민을 안겼다.


이걸 버려야 하나.. 내 머리와 손은 미세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뼈대 있는 집안의 사내대장부로서의 자존심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이 거지 같은 나의 탐욕이 화를 부르는구나… 고작 코딱지 만한 바나나 먹어보겠다고… 이런 능욕을..

하지만 만약 내가 그 바나나를 버린다면 분명 그녀는 수치심과 모멸감을 느낄 것이다.

젠틀맨으로 한 평생을 살아온 내가 어찌 여성에게 상처를 줄 수 있으리오.


'그래 그깟 대장균(Escherichia coli.Escherichia) 박테리아 따위..'


'내가 먹고 탈 나자..’


나는  주체할 수 없이 흔들리는 손을 추스르며 시식을 감행했다.

아줌마는 내 얼굴을 쳐다보지 않았다… 아니.. 못했을지도.. 단지 건성의 사과를 남긴 채..

쿨하게도  두 번째 바나나 조각을 먹는데 열중하고 있었다.


입속에선 씁쓸함과 달콤함이 묘하게 섞이며 혀뿌리를 타고 넘어가 마음속에 잔잔한 '측은지심(惻隱之心)'의 감동과 교훈을 전해줬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내 마음에 여유가 느껴졌다. 나는 바나나를 천천히 음미했다.


'이건 선(禪)인가..'  


나 비록 장부(丈夫)의 명예는 지키지 못했지만..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자아의 관용과 자비, 의지, 노력, 태도, 결심에 뿌듯함이 느껴졌다.

'그래. 이게 사나이지!’


나는 두개의 김밥 만들기를 움켜쥐고 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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