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언천금(一言千金)
대략 십여 년 전만 해도 나는 꽤 말을 잘하는 편이었다.(*뇌피셜) 아니 적어도 말을 잘 못하지는 않았다. 쉽게 주눅 들 수 있는 낯선 환경이거나 많은 대중이 모인 자리라도 크게 긴장하지 않았고 상대가 누구든지 간에 내 주장을 조리 있게 펼치며 말하기를 즐겼다.
아마 중고시절 교회를 열심히 다니면서 여러 활동들..,  ̄가령 대표 기도를 한다던지, 묵상 나눔을 한다던지.. 중창단도 했다 ̄ 하면서 자연히 말하기 훈련이 됐던 것 같다. 심지어 부흥목사가(a.k.a 장경동) 돼야겠다는 생각을 한적도 있었으니, 확실히 ‘말하기’는 내가 '쫌' 잘하는 분야였다.
게다가 일찍이(무려 1999년..) 인터넷 방송도 했었고, 인기를 얻어 지상파에도 출연해 능청스럽게 개그도 할 정도였다. 사람들을 만나면 마치 사회를 보듯이 먼저 화두를 던졌고 오지랖적으로 이쪽저쪽 많은 대화에 참여해 분위기를 주도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나를 보면 언제 그랬던 적이 있었나 싶게 말주변이 없는 사람이 되어있다. 아니 말주변이 없다기보다는 딱히 말이 별로 없는 사람. 말 참견을 하지 않는 사람. 할 말만 하고 빠지는 사람. 적어도 말을 잘 하는 것 같진 않은 사람.. 기타 등등이 되어있었다.
묵언(默言) 또는 침묵
나는 어쩌다 ‘말 없는 자'가 되었나.
삼십 줄에 들어 공복의 월급쟁이가 된 것이 가장 큰 계기였다. 나의 실수가 ‘나만의 실수’로 그치지 않고 내 조직과 내 가족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입을 조심스럽게 했다. 특히 공직자가 파국을 맞이하는 장면은 대부분 ‘말’ 때문이었다.
직장은 물론이고 각종 세미나나 비즈니스에서 내공 삼십구단의 고수들을 만나면서 '입을 다물고 있어야 적어도 바보 취급은 안 당하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잘 모르는 분야는 아는 척 하지도 거들지도 말자는 원칙이 생겼고, 내가 잘 아는 분야라도 굳이 말을 보태지 말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인식을 갖다 보니, 반대로 말을 떠벌리는 사람들을 보면 잘 알지 못하는 콤플렉스 때문에 허세를 부리는 사람이거나 잘 아는 것을 인정받고픈 ‘지적 허영자’라고 비하하기도 했다. 그러니 나는 그런자가 되지 않기 위해 점점 더 말을 줄였다.
더불어 나이가 들면서 회사에서 선배나 선임, 리더의 역할을 맡게 되고, 회사 이미지가 따라다니는 직함이 생기면서 남들을 의식해야 하는 상황들이 많아졌다. 나도 모르게 불쑥 튀어나올지도 모르는 무식, 비논리, 희롱, 희화, 비하성 발언을 삼가려고 스스로 심의하고 검열했다. 남에 대한 참견이나 시비를 다툴만한 복잡한 사회적 이슈는 최대한 피했다. (아니.. 언젠가부터 실제로 관심을 꺼서 잘 모르기도 했다.)
‘아재’가 되어가면서 얕은 언어유희로(주로 동음어를 갖고 노는) 스스로 아재임을 인정하는 개그도 용납할 수 없었다. 다메(だめ)다메!! 젯다이(ぜったい) 다매다요!
그런데 너무 말을 안 해서인지 아예 말을 하는 방법마저 잊어버린것 같다. 가끔 내가 말을 하다가도 ‘뭔 소리?’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뇌를 거친 후에 입으로 나와야 하는데 그냥 대충 식도쯤에서 말이 나온다.
‘매우’ 친한 사람들과의 술자리에서 막 던지는 시시껄렁한 농담이나 아내와의 수다, 아이들이 좋아할만한 유치하거나 장난스러운 대화들이 그나마 능숙하다. 생각해보면 그저 먹고 노는 이야기다. 여행 간다는 이야기, 여행 가서 뭘 먹었던 이야기. 술 마시고 춤을 췄다는 이야기. 이민을 가버려야 한다는 이야기.. 정치나 가십에는 관심이 없다는 이야기.. 이런 영양가 없는 이야기들이 내 말의 전부가 되었다.
어느새 내 말에 감정과 사색이 옅어지기 시작했다. 맛없는 언어들이 되었다. 별생각 없이 이야기를 주고받거나, 아예 듣기만 하는 것이 편해졌다. 회사에서는 업무와 관련한 사실과 합리성에 대한 의견만 주고받으면 되니 불편함이나 개선의 여지가 없었다.
언어퇴화(言語退化)
퇴화(退化)된 말하기의 부작용은 아이들과의 대화에서 나타났다.
그저 간질여주고 안아주고 웃어주면 됐던 내 품의 외계 생물들이, 갑작스럽게 지구의 단어와 문장을 주고받는 새로운 인격체로 진화했다. 지구인이 되어가는 외계인과의 대화 방법은 어디에서도 배운 적이 없다.
기존의 대화는 대부분 일방적 '요구와 응대’ 또는 ‘지시와 순응’이었다. 어느 순간, 외계 생물체는 우리의 말을 배워갔고, 자신의 의견을 '이상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늘어놓고, 들어주지 않으면 뭔가 합리적 요구를 거부한 것처럼 인식하며, 증오의 눈빛을 쏘기도 했다.
나는 그들의 말이 '지구의 말'이라고 쉽게 착각을 했다. 그래서 지구의 말로 응대를 했을 뿐인데, 아이는 예상치 못한 반응을 보였다. 심지어 '삐뚤어질 테다'라는 표정으로..
최근에 있었던 일이다.
딸아이가 중간평가 시험이 있다고, 아침부터 수학문제지를 꺼내 들며 도와달라고 했다. 흔쾌히 같이 문제를 보고 대략 풀이 방법을 알려주고는 검산을 해보라며 욕실로 들어갔다. 면도를 하려고 쉐이빙 폼을 입 주변에 바르고 면도기를 갖다 대는 순간, 딸아이가 나를 불렀다.
"아빠 답이 안 나와요"
"응? 답이 뭐가 나왔는데?"
"아니 답이 안 나온다니까.."
"그니까.. 뭐가 나왔냐고.."
"아니 아빠가 알려준 대로 한 답을 검산을 했는데, 답이 아예 안 나온다니까요.."
"아니... 답이.. 그니까, 네가 뭘 풀었을 거 아니야.. 무슨 숫자가 나왔냐고.."
나는 면도를 하고 있었기에, 잘못 나온 답이 뭔지 알면 '어떻게 다시 풀어야 할지'를 알려줄 수 있을 것 같아서, '잘못 나온 답'이 뭔지를 요구했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이는 끝까지 '잘못 나온 답'은 알려주지는 않고 답이 안 나온다는 이야기만 몇 번이고 되뇌고 있었다. 급기야 면도를 하다 말고 책상 앞으로 가서, 다시 되물었다.
"아니.. 그니까, 답이 뭐가 나왔냐고.."
"아니. 안 나왔다니까!!!!"
나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검산한다고 문제를 풀었을 것이고, 원했던 답이 안 나왔다면 뭔가 다른 답이 나왔다는 소린데, 왜 그 답에 대해서 알려주지 않는 것일까. 이제는 이 아이의 머릿속이 너무 궁금했다.
"루다야. 네가 푼 답을 알려달라고. 그게 뭔지가 궁금하다고!"
나는 뭔가 격양되기 시작했고, 덩달아 아이도 점점 소리가 높아져갔다. 도돌이 대화는 계속 이어져갔고 결국엔 내가 다시 문제를 풀어서 원인을 발견했다. 그리고는 훈계를 늘어놨다.
"빨간색 하고 파란색 하고 더하면 보라색이야. 그런데, 네가 섞었는데 주황색이 나왔어. 그러면 파란색이 아닌 노란색을 섞은 거야. 그래서 아빠가 답이 뭐가 나온 지를 계속 물었던 건데.. 왜 너는 그 답을 안 하고 자꾸 안 나왔다고만 하니..."
아이 눈시울이 붉어졌다. 내가 한 말이 잘못된 말이 아니고 논리도 이유도 완벽했는데, 아이에게는 상처만 되었다. 못마땅해 하는 아이를 이해시려고 상처만 될 뿐인 말들을 몇개나 더 늘어놓았다. 시간이 흘러 아이는 등교를 해야 했다. 뭔가 감정의 정리가 안된 채 아이는 밖으로 나갔다.
나의 말에는 문제가 있었다.
아직.. 아이인데..
애한테 맞게,
잘... 말했으면 됐는데..
‘잘...’ 말이다.
잘 말하기
나는 아이가 외계인인 것을 잊고 있었다. 아직 지구에 적응하기 위해 시간이 필요한 아이에게 나는 사십여년의 지구어 내공으로 이해시키려 들었다. 직장상사도 아니면서 나는 부장의 마인드로 논리와 합리성을 따져 물었고,.... 나는 말싸움에서 이겼지만..
아이는 눈으로 "나빴어"라고 말하고 있었다. 아이가 원했던.. 나 또한 원했던 '아빠'의 역할과 태도는 완전히 실패했다. 그동안 잘 사주고, 잘 놀아주면 뭐하는가. 가장 기본이 되어야 하는 생활의 대화에서 눈높이 격차를 보이는데 말이다. 아이가 '미안해요'라고 말할 때는 너무 허탈했다. <어쩌다 어른>이 된 아빠의 성적표다.
나는 오후에 카톡으로 미안하다는 메시지를 써서 보냈다. 금방 해맑은 표정의 이모티콘을 쏘는 아이를 보면서 나는 당장 회초리라도 맞고 싶을 만큼 부끄러웠다.
'말 잘하기’와 ‘잘 말하기’는
확실히 차원이 다른 문제다.
논리나 이성, 지성, 사고, 이치, 원칙, 철학, 합리성을 갖춘 번지르르한 말의 기술이 아니라 상대가 받아들일 수 있는 말을 하는 것, 상대의 감정과 수준, 상황에 맞는 말을 하는 것..
나는 참으로.. 말을 잘 못했다..
말 한마디의의 무게를
아이들을 통해 느끼게 될 줄이야.
잘 하자.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