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윤 진 Jun 10. 2021

나를 이해해주세요.

당신을 격렬하게 오해해요.

친구니까, 부모니까 나를 이해해줘야지!!!

내가 나를 모르는데 타인이 나를 온전히 이해하는게 가능할까? 




원가족의 갈등과 상처로 인해 집은 나에게 쉼의 공간이 아니었다. 나에겐 집보다 학교가 더 편하고 사랑받는 공간이었다. 친구들과 갈등을 겪거나 관계로 크게 아파한 적도 없었고, 상위권의 성적을 유지하였고, 운동을 잘했던 나는, 말수가 적었음에도 불구하고 친구들에게 꽤나 인기가 있었다. 화이트데이에 내 자리에는 으레 초콜릿이나 꽃이 올려져 있었다. 누가 두었을지 대충 짐작이 갔지만, 모른척 했다. 몇 개월간 매일 책상위에 과자와 들꽃이 올려져 있었던 적도 있었고, 어떤 친구에게는 지속적으로 편지를 받기도 했다. 중, 고등학교 때의 나는 몸이 여리여리 했지만 커트머리에 운동을 좋아하는 학생이었고, 그 덕에 여자친구들에게 관심을 받았다. 그때는 그 친구들의 마음에 진심으로 감사할 줄 몰랐다. 핑계를 대자면 내 삶을 살아내기가 무척 힘들었달까... 이제와 생각해보면, 처참한 삶 속에서도 버틸 수 있었고 학교 생활을 즐길 수 있었던 건, 그렇게 무조건적으로 나를 아껴준 친구들이 늘 주변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나를 아껴주는 동료들과 함께하기에 멈추는 일이 반복되어도 다시 용기를 낼 수 있다.


친구들의 마음을 알아차리진 못했지만, 그 시절의 나는 관계에 대해 오랜시간을 들여 깊이 생각하곤 했다. 17세 여름방학 때 단짝 여자친구들 5명이 근처 바닷가에 놀러갔었다. 친구들은 수박, 아이스크림, 라면, 냄비 등 을 챙기며 양손 무겁게 시외버스에 올라탔는데, 나는 법정스님의 <무소유> 중_오해편을 커다란 종이에 필사해서 들고 갔었다.(진정 짐은 그거뿐이었을까? --;;) 한창 철학책에 몰입해 있던 시기였는데, 무소유의 오해편이 오래도록 마음에 머물러 친구들이 꼭 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세상에는 대인관계처럼 복잡하고 미묘한 일이 또 있을까. 

까딱 잘못하면 남의 입에 오르내려야 하고, 때로는 이쪽 생각과는 엉뚱하게 다른 오해도 받아야 한다. 그러면서도 이웃에게 자신을 이해시키고자 일상의 우리는 한가롭지 못하다.

이해란 정말 가능한 걸까,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가 상대방을 이해하노라고 입술에 침을 바른다. 그리고 그러한 순간에서 영원을 살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 이해가 진실한 것이라면 항상 불변해야 할 텐데 번번이 오해의 구렁으로 떨어진다.

"나는 당신을 이해합니다"라는 말은 어디까지나 언론 자유에 속한다. 남이 나를, 또한 내가 남을 어떻게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그저 이해하고 싶을 뿐이지. 그래서 우리는 모두가 타인이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 중심적인 고정관념을 지니고 살게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물에 대한 이해도 따지고 보면 그 관념의 신축 작용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의 현상을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은 걸 봐도 저마다 자기 나름의 이해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 나름의 이해'란 곧 오해이 발판이다. 우리는 하나의 색맹에 불과한 존재다. 그런데 세상에는 그 색맹이 또 다른 색맹을 향해 이해해 주지 않는다고 안달이다. 연인들은 자기만이 상대방을 속속들이 이해하려는 맹목적인 열기로 인해 오해의 안개 속을 헤매게 된다.

그러고 보면 사랑한다는 것은 이해가 아니라 상상의 날개에 편승한 찬란한 오해다. "나는 당신을 죽도록 사랑합니다"라는 말의 정체는 "나는 당신을 죽도록 오해합니다"일지도 모른다.


언젠가 이런 일이 있었다. 불교 종단 기관지에 무슨 글을 썼더니 한 사무승이 내 안면 신경이 간지럽도록 할렐루야를 연발하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속으로 이렇게 뇌고 있었다. '자네는 날 오해하고 있군. 자네가 날 어떻게 안단 말 인가. 만약 자네 비위에 거슬리는 일이 라도 있게 되면, 지금 칭찬하던 바로 그 입으로 나를 또 헐뜯을 텐데. 그만두게, 그만둬.'

아니나 다를까, 바로 그 다음 호에 실린 글을 보곳는 입에 개거품을 물어 가며 죽일 놈 살릴 놈 이빨을 드러냈다. 속으로 웃을 수 밖에 없었다. '거 보라고, 내가 뭐랬어. 그게 오해라고 하지 않았어. 그건 말짱 오해였다니까.'


누가 나를 추켜세운다고 해서 우쭐댈 것도 없고 헐뜯는다고해서 화를 낼 일도 못된다. 그건 모두가 한쪽만을 보고 성급하게 판단한 오해이기 때문이다. 오해란 이해 이전의 상태가 아닌가. 문제는 내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느냐에 달린 것이다. 실상은 말(言)밖에 있는 것이고 진리는 누가 뭐라 하건 흔들리지 않는다. 온전한 이해는 그 어떤 관념에서가 아니라 지혜의 눈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그 이전에는 모두가 오해일 뿐이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무슨 말씀, 그건 말짱 오해라니까.'


-무소유, 오해-





지금 읽어봐도 구구절절 옳은 말이다. 그때도 너무나 잘 이해되던 글, 이렇게 쉽고 간결하게 진리를 전달할 수 있는 법정스님의 필력에 다시 한번 놀란다. 우리는 '이해(理解)'라는 단어에 굉장히 갈증을 느낀다. 여기서 말하는 이해란 남의 사정을 잘 헤아려 너그러이 받아들인다라는 의미이다. 즉 공감과 비슷한 뜻을 가지고 있다. (이익과 손해나 지식을 쉽게 이해함이 아니다) 17세의 나는 내 존재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가지고 있었고,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야하는가?'에 대해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물론 여전히 그 물음의 답을 찾는 중이다.) 그리고 가정에서 존재의 이유를 찾지 못했기에 다른 곳에서 나를 증명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날 밤, 바닷가의 파도소리를 들으며 두루마리처럼 말린 종이를 펼치고 친구들에게 잘 들어보라고 했다. 결과는 어찌되었을까? 예상하신 대로다. 세줄이 넘어가자, 뭐가 그리 길고 복잡하냐며 친구들은 안듣겠다고 하며 각자의 편한 자리를 찾아 눕거나 다른 놀이를 찾아냈다.


아, 나는 친구들을 말짱 오해하고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당연히 친구들도 좋아할 거라는 나만의 착각이었다. 내가 깊이 빠져든 학문과 책을 통해 얻은 깨달음의 기쁨을 원하지 않는 이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나의 욕심이었다. 어쩌면, 나는 17세의 실수를 오늘도 했는지 모른다. 누군가에게 또는 나의 자녀에게라도.


가족이니까 서로 대화를 통해 이해해야지!!! 젠장, 그건 서로에 대한 오해를 더욱 격렬하게 하는 일의 시작일 수도 있다. 특히 마음을 건드리는 대화를 지금 하기 싫어하는 상대라면, 대화의 시도가 오히려 관계의 단절이 될지도 모른다. 아침에 본 13살 아들의 코에 난 솜털의 색이 까매지기 시작했다. 녀석이 사춘기가 되면, 나는 대화의 시도보다(잔소리라고만 생각할지도) 알면서도 모르는 척 속아넘어가주는 지혜도 발휘해야 할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