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거운 침묵과 환한 미소
아침 일찍 눈을 뜬 태호는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공항으로 향했지만,
바람이 심해 비행 편이 취소되었다.
하는 수 없이 지프를 타고 무스탕의 관문 카그베니로 향한다.
예정에 없던 일본인 부부와 동행하게 된 태호는 영 불편함이 가시질 않는다.
지난여름 우기 때 훼손된 고산지대의 비포장길을 다섯 시간 넘게 달려
도착한 카그베니는 마치 폐허 같았다.
칼리 간다키강과 종강이 만나는 이곳은
오랜 세월 동안 천장을 포함한 티베트 불교의식을 간직한 채
고요히 존재하고 있었다.
믿기 어렵지만 이 작은 마을도 한때는 왕국이었다.
무스탕 지역은 1991년부터 제한적으로 외국인의 출입을 허용했으며,
매년 단 1,000 명의 외국인만 입장이 허락된다.
태호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가이드와 함께 외국인 출입 허가증을 발부받기 위해 관공서를 들렀다.
“죽으러 가는 길도 절차를 따라야 하니 귀찮군.”
태호는 입버릇처럼 혼잣말을 내뱉었다.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일행은 탕게로 향했다.
지프에는 태호 외에도 일본인 부부가 함께 탑승해 있었다.
중년의 그 커플은 포카라부터 동행한 이들이었고,
거절하기 힘든 친절한 말투로 질문을 건네왔다.
태호는 귀찮게 느끼면서 건성으로 대답했다.
“작가입니다. 천장을 취재하러 가는 중이에요.”
그들은 대학 동창 부부로, 결혼 20주년을 기념해
무스탕 트레킹을 왔다며 본인들도 천장을 체험하고 싶다며
웃는 표정으로 자신들을 소개한다.
태호는 마음속으로
‘20년을 잘 지냈나 보군.’ 하고 냉소를 품었지만,
정작 입 밖으로는 “부부 사이가 참 좋아 보이네요”라며
그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자신은,
이야기에 진심을 담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이었다.
카그베니를 막 벗어나려는 길목에서,
보리밭 한가운데서 일하던 현지인 가족들이 눈에 들어왔다.
지프차가 지나가자 열 살 남짓한 여자아이가 보리 이삭을 한 손에 쥔 채,
다른 한 손으로 하늘 높이 뻗은 손을 흔들었다.
벌어진 윗니 사이로 웃는 얼굴이 태호의 마음을 어딘가 간지럽히는 듯했다.
일본인 부부가 환하게 손을 흔들었고,
태호 역시 자신이 손을 흔들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소녀에 비하면, 아주 조심스러운 손짓이었다.
살아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않게 하려는 듯한.
차랑 마을을 코앞에 둔 일행은 강물의 유속이 너무 빨라 지프로 건널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
강 건너 차랑 마을에서 트랙터가 강을 건너오는 모습이 보였다.
트랙터는 마치 외지인을 실어 나르는 거대한 짐승처럼,
거친 숨을 내뿜으며 자갈을 튕기며 강을 건넜다.
강을 넘은 뒤,
태호는 마을 사람들이 내어준 락시(현지 증류주의 한 종류) 한 잔을 받아 들었다.
목 넘김은 부드러웠고, 속이 뜨거워졌다.
한 때는 죽을 만큼 술을 마시기도 했지만, 죽지 않고 살아 여기까지 왔는데...
이곳 사람들은 살기 위해 술을 마신다. 추위와 자연에 맞서기 위해...
물론 죽을 만큼 마실 술은 존재하지도 않겠지만...
락시 몇 잔으로 휴식을 취한 그들이 향한 곳은
해발 3240미터의 마을, 탕게.
그곳에서 하룻밤을 머무를 예정이다.
식사 후, 태호는 숙소 밖으로 나와
어둑해지는 서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구름이 느리게 지나가고, 바람이 코끝을 스쳤다.
그때, 마을을 한 바퀴 돌아보고 오는
타카시와 마사미 부부가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오늘… 많이 피곤하셨죠?”
마사미가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태호는 그녀의 눈을 잠시 바라보다
짧은 웃음과 함께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타카시가 조용히 덧붙였다.
“그래도… 그 아이가 손을 흔들어줘서,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어요.”
마사미가 뒤따라 말했다.
“그러게요… 꼭,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같았어요.
우리를 향해 그렇게 웃는데, 괜히 마음이 찡했네요.”
그 말에 태호는 문득,
보리 이삭을 들고 손을 흔들던 그 소녀의 얼굴을 떠올렸다.
찬 바람 사이로 그 미소가 아른거렸다.
‘그 아이는 정말, 누굴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
그리고 문득, 떠오른 생각.
'죽고 싶은 사람과,
행복하고 싶은 사람이,
같은 길 위에서 마주 보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엔 여전히
‘죽음’이라는 단어가 또렷이 맴돌았다.
삐걱이는 좁은 침대 위에 누운 태호는
무겁게 내려앉은 눈꺼풀을 감았다.
어둠은 천천히, 깊은 잠의 언저리로
그를 데려갔다
#무스탕가는길 #보리밭소녀 #죽음과삶사이 #네팔여행기 #브런치에세이
#죽고싶은마음 #살아야할이유 #레옹에세이 #마틸다처럼향기로운숨결
#죽음의여행 #낯선동행 #행복하고싶은사람 #천장여행기 #슬픔은거짓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