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전하는 말(기도)
옅은 갈색으로 물든 보리밭, 그 사이로 현장학습을 나온 초등학생 무리가 지나가고 있었다. 태호는 낯설지 않은 풍경에 발걸음을 멈췄다. 그 순간, 한 소녀가 태호를 향해 환하게 웃으며 소리쳤다.
"아빠~!"
그 웃음소리에 태호의 가슴 한편이 아릿하게 저려왔다. 손을 뻗으려는 찰나, 그의 눈꺼풀 위로 새벽바람이 스쳤다. 잠에서 깬 태호는 천장이 낮게 드리운 탕게의 낡은 숙소 안에 누워 있었다.
몸은 무거웠고, 마음은 그보다 더 무거워짐을 느낀다.
소녀의 웃음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아침 식사는 네팔식 밧, 따뜻한 렌즈콩 수프와 밥, 소박한 채소 볶음이었다. 태호는 무심하게 수저를 움직였지만, 밥알이 넘어가는 목 언저리가 까끌까끌하다. 아침 식사를 마친 일행은 숙소 앞 공터에 모였다.
탕게마을은 아직 어둠이 묻어 있었고, 먼저 기다리고 있던 동자승 한 명과 마부가 두 마리 당나귀의 고삐를 느슨하게 잡고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이분들이 안내할 겁니다."
앞서 출발하는 마부와 동자승이 마니차(기도수레)를 돌린다.
추상으로 향하는 길은 예상보다 험난했다. 바람은 차가웠고 발걸음은 더 무거웠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 서두를 수 없는 고원의 순례길.
웬일로 태호가 일본인 부부를 향해 질문을 던진다.
"무스탕까지 가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타카시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3년 전 아들을 떠나보냈습니다. 사고였어요.
그 후로 3년 동안, 우리는 서로를 원망하고 외면하며 지옥 같은 시간을 보냈죠.
이젠 마음에서 놓아주려고 여기까지 오게 된거고요."
마사미가 눈물을 글썽인 채 말을 이었다.
"여긴... 떠나보내는 곳이라잖아요.
이곳에 오기까지, 우리는 자신을 용서하는 법을 배우려 애썼어요.
그런데도 이상하게, 아들을 떠나보내려 온 이 길에서, 오히려 그 아이를 안고 가고 있는 기분이 들어요..."
태호는 그들의 이야기에 가슴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상처가 저릿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그 자신도 가슴에 묻은 한 생명이 있었다.
슬픔과 죄책감을 안고 계속 걸었다. 그러나 묘하게 외롭지 않은 따뜻한 침묵과 함께.
좁은 산길이 절벽 끝을 따라 이어졌다. 태호는 문득 발걸음을 멈추고 절벽 아래를 바라보았다. 까마득한 협곡 아래로 바람이 휘몰아쳤다.
'저 바람에 내 몸을 온전히 맡길 수 있다면...'
그가 한 걸음 더 내딛으려던 찰나, 타카시의 목소리가 낮고 단호하게 울렸다.
"그렇게 쉬운 방법을 택할 거라면, 왜 여길 오셨습니까?"
태호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타카시의 눈빛 속엔 평소의 온화함 대신 참을 수 없는 날카로움이 담겨 있었다.
마사미가 타카시의 팔을 가볍게 붙잡으며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태호 씨, 자신을 포기하지 마세요.
아들을 그렇게 떠나보내고 나서, 우리도 같이 따라가고 싶었죠. 그런데요…
우리가 살아야 하는 이유는 분명해요. 아이가 바라지 않는다는거요."
이 모습을 지켜보던 동자승이 조용히 한 마디 덧붙였다.
"바람은 벼랑에서 떨어진 육체를 천국으로 데려가지 않아요. 우리의 기도를 전할뿐..."
"어서 길 안쪽으로..." 마사미의 목소리가 떨렸다.
태호는 한참을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이내 눈을 감고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마사미와 타카시 부부가 급히 태호에게 다가와 양팔을 조심히 감쌌다.
그들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마사미와 타카시의 눈빛 속엔 말할 수 없는 아픔과, 그럼에도 누군가를 붙잡고 싶어 하는 간절함이 담겨 있었다. 태호는 마사미 부부가 묵묵히 걷는 모습을 보며 협곡 너머 안나푸르나의 설산을 바라보았다.
한참을 걷던 중, 길가에 작은 돌무더기들이 나타났다. 마부는 당나귀를 멈춰 세우고 그중 하나인 마니돌탑 앞에 무릎을 꿇어 돌을 하나 쌓았다. 동자승은 배낭에서 손바닥만 한 룽타(風馬)를 꺼내더니 조심스럽게 돌탑 위 나무기둥에 매달았다. 색색의 천조각에는 작은 불경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태호는 그들의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마부가 고개를 들어 일행에게 말했다.
"길 위엔 매일 누군가를 위한 기도가 매달리죠. 바람이 불 때마다 그 기도가 하늘로 닿게 하려고요."
동자승이 태호 곁으로 다가와 천조각을 가리켰다.
"돌무덤은 떠나간 자리지만, 매달린 룽타는 남아있는 사람들의 마음이에요."
태호는 말없이 룽타를 바라보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펄럭이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는 마치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듯했다.
'이 길 위의 바람은, 묻지 않아도 들리는 기도인가.
누군가를 잃은 사람만이 들을 수 있는 소리, 그게 순례길의 바람인 걸까.'
그 순간 태호는 자신도 모르게 바지 주머니를 뒤적였다. 꺼내든 것은 구겨진 손수건 한 장. 태호는 그것에 펜으로 무언가를 써서 조심스레 마니돌탑 위에 매달았다. 누가 시키지 않았지만, 그것이 해야 할 일처럼 느껴졌다.
태호는 처음으로 '살아남아도 괜찮은 걸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해질 무렵, 일행은 추상 마을에 도착했다. 황량한 마을이었지만, 순례자들에게 따뜻한 차를 건네는 현지인의 미소는 포근했다. 태호는 그날 밤, 텅 빈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하지 못했던 한 마디를 마음속에서 뱅뱅 맴돌리고 있었다.
마사미 부부와 창(네팔 발효주)을 나누며 태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도… 아이를 보내지 못한 아버지입니다."
타카시는 말없이 그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마사미는 눈물을 머금고 고개를 숙였다.
그들은 말없이 같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모든 질문이 멈춘 순간, 해답이 걸어오는 법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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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스탕 가는 길 / 레옹
무거운 발걸음 티벳의 땅
바람은 차갑고 마음은 더 차갑다
침묵이 깃든 이 황량한 길
그 속에서 미소가 흔들린다
척박한 돌멩이들 속에서
무언가 빛나기 시작한다
마지막이라 느껴지는 이 길 위에
나는 처음으로 세상을 본다
끝이지만 시작 같아
무스탕의 하늘이 날 부른다
황량한 들판에 홀로 서 있다
하늘은 낮고 구름은 무겁다
하지만 눈길 닿는 모든 곳
새롭게 물든 자연이 있다
침묵 속에서 들리는 소리
내 안에서 울리는 노래
무스탕의 바람이 속삭인다
마지막은 끝이 아니라는 걸
마지막이라 느껴지는 이 길 위에
나는 처음으로 세상을 본다
끝이지만 시작 같아
무스탕의 하늘이 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