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이 아닌 다른 시작
추상에서 하루를 머물게 된 일행은 마부에게서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내일 마을에… 천장이 있답니다.”
마사미 부부와 태호는 잠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말은 없었지만, 모두 마음이 흔들린 표정이었다.
밤이 깊어졌지만 태호는 쉽사리 잠들지 못했다.
창문 너머로 스며드는 바람 소리는 먼 기억을 끌어올렸다.
"아니, 자네가 동의해서 애가 나한테 얘기한 걸,
어째서 자네는 끝까지 몰랐다고 그렇게 오리발인가?"
너무도 긴 시간 태호를 괴롭혀 오던 악마 같은 사람의 목소리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눈을 감을수록 더 선명해지는 기억에 괴로운 듯, 태호는 베갯잇에 얼굴을 파 묻었다.
다음 날,
망자의 집에서 라마승의 염불이 낮게 울려 퍼지고,
망자의 정수리에 긴 꼬챙이로 구멍을 뚫는 포와(破瓦) 의식이 먼저 진행되었다.
망자는 관도 없이 흰 천에 싸였다.
짧은 기도가 이어진 후, 직계 가족은 따라나서지 않고,
먼 친척 몇 명과 천장사, 그리고 라마승만이 시신이 실린 당나귀와 함께 천장터를 향했다.
그 뒤를 태호와 마사미부부가 느린 발걸음으로 뒤따랐다. 물론 순례길을 동행한 동자승도 함께.
바람이 절벽을 핥듯 스쳐 지나갔다.
그 바람 속에는 오래된 흙냄새와 날짐승의 비린내,
그리고 묘하게도 사람의 체온 같은 잔향이 섞여 있었다.
태호는 그 냄새를 들이마시는 순간,
가슴속 깊은 곳에 묻어둔 무언가가 스르륵 떨리는 기분을 느꼈다.
칼이 뼈와 살을 가르는 소리, 날갯짓이 공기를 찢는 소리, 그리고 누군가의 억눌린 흐느낌이 뒤섞였다
마사미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타카시의 부르르 떠는 무거운 손이 어렵사리 마사미의 등을 어루만진다.
태호는 그들의 등을 바라보다가, 하늘로 시선을 던졌다.
독수리들이 원을 그리며 날고 있었다.
그 곡선이 마치 ‘언제든 돌아오라’는 패턴 같았다.
마사미가 울먹이며 숨을 삼켰다.
타카시는 입술을 깨물었고, 태호는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 생(生)을 떠나는 마지막 모습을, 마지막 육체를 보시하는 모습을..
결국, 마사미 부부의 울음이 터졌다. 세 해 전, 교통사고로 중학생 아들을 잃었던 기억이 폭우처럼 쏟아졌다. 그들은 부둥켜안고 오열했다. 태호도 그 울음 속에 무너졌다. 자신이 놓쳐버린 생(生), 지켜주지 못한 아이, 말하지 못한 수많은 ‘미안해’가 한꺼번에 쏟아졌다.
울음은 목구멍에서 잠시 맴돌다, 결국 몸 전체를 흔드는 진동이 되어 터져 나왔다.
세 사람의 울음은 깊고 길었다.
그렇게 이방인 세 명이 한참을 오열했다. 그들의 오열을 라마승과 천장사, 순례자가 말없이 바라본다.
서로에게 묻지 않았다. 아무 말도, 아무 설명도 필요 없었다.
그 자리에서 한참을 그렇게 울어냈다.
'그 아이는… 나를 원망하지 않을까.'
어미와 아비의 울음소리가 독수리 날개에 실려 자식들에게 닿을 수 있을까.
독수리들이 하늘로 날아오르자, 바람이 그 뒤를 따라 불어왔다.
그 바람 속에서, 태호는 처음으로 생각했다.
‘… 그 아이가 나를 용서하기나 할까.'
그 슬픔 속에서, 천장을 끝마친 연륜 지긋한 라마승이 다가와 조용히 말했다.
“끝이 아닌, 다른 시작이랍니다.”
그날 오후,
저 멀리 붉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로만탕의 성문이 보였다. 히말라야의 마지막 성벽도시.
초르텐을 지나 입성한 마을 안에는 25대 왕이 거주하는 4층으로 된 소박한 왕궁의 모습이 보였다.
축제를 앞둔 골목마다 색색의 룽타가 나부꼈다. 축제를 준비하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다음 날, 왕궁 앞에서 야느똥 축제가 열렸다.
북소리가 가슴을 울리고, 사원 앞마당에 모인 사람들이 춤을 췄다.
색색의 옷을 입은 아이들이 손에 뭔가를 들고 마을을 뛰어다녔다.
마사미 부부는 그 웃음을 오래 바라보았다.
그리고 태호도 마사미 부부와 함께 아이들을 바라보며 웃었다.
참, 오랜만에 웃는 태호의 모습이었다.
태호는 또 혼잣말을 한다.
"살아남은 자의 몫은 무엇인가, 남겨진 자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 걸까."
마사미 부부가 그런 태호를 바라보며 미소 짓는다.
눈을 크게 깜빡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카트만두로 향하는 지프 안, 차창밖으로 안나푸르나의 설산이 움직이는 병풍처럼 멀어져 가고 있었다.
태호는 그 풍경을 오래 붙잡듯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마사미 씨, 타카시 씨… 고마워요.”
마사미가 잠시 창밖을 보다 고개를 돌렸다.
"고맙긴 저희도 마찬가지예요. 그리고 이젠 편히 부르세요, 형님."
그들은 그렇게 불렀다.
서로 다른 시간, 다른 나라에서 같은 주말을 체험하고 온 사람들.
태호는 15년 전, 마사미 부부는 1년 전이었다.
부부가 서로를 다시 바라보게 하는 그 주말이,
태호에겐 이미 지나간 일이 되었지만,
여전히 남아 있는 호칭이었다. 태호는 실패한 주말이었지만...
“형님, 세상은 좁잖아요. 언젠가… 슬픔이 흘러간 강물 끝에서, 또 보게 될 거예요.”
태호는 그 말을 가슴속에 고이 접어 넣었다.
그는 알았다.
이 여정이 끝이 아니라는 걸.
언젠가, 슬픔이 흘러간 강물을 따라,
그 모든 걸 받아낸 바닷가를 걷는 날이 올 거라는 걸.
안나푸르나 설산이 천천히 멀어지며 잘 가라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더는 무겁지 않은 숨이, 조용히 그의 가슴속을 오갔다.
https://youtu.be/cs0ku5uWH90?si=f0YOGrdJsDr3HM2o
무스탕의 끝에서 / 레옹
무스탕의 끝에서…
난 내 안의 두려움을 놓아버렸어.
아니, 그렇다고 믿고 싶었어.
붉은 흙길,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끝이 어딘지 모른 채 발걸음은 느려지고
발자국은 흩어져, 기억도 그처럼 사라질 듯
근데 내 가슴은 여전히 무거워
구름은 멈춰, 산맥은 숨죽여
이 고요 속에, 내 삶은 어디쯤일까
시간이 덮어버린 온기, 찾고 싶어
내 심장 속 불씨, 다시 피우고 싶어
사라진 온기, 돌아올 수 있나
흐릿해진 내 안의 불빛
꺼진 줄만 알았던 사랑
아직도 깊은 곳에서 숨 쉬고 있어
강물은 속삭여, “삶은 계속 흘러가”
근데 난 바보처럼 나를 잃어갔지
햇빛 속 먼지처럼 마음은 흩날려
그 빈자리에 그리움만 내려앉아
무너진 시간 위로, 발을 다시 내디뎌
사랑은 감정만이 아냐, 내 삶의 이유야
길을 잃어도, 길이 사라져도
나는 다시 찾을 거야, 내 안의 온도를
잃어버린 사랑, 돌아올 수 있나
흐릿해진 내 안의 불빛
꺼진 줄만 알았던 사랑
아직도 깊은 곳에서 숨 쉬고 있어
빛바랜 기억 속, 남아 있는 따스함
그날의 숨결이 바람에 실려 와
내 안을 적셔줄 그 순간까지
난 걷고 또 걸어, 무스탕의 끝까지
꺼져 있던 불씨, 결국 피워 올릴 거야
시간 속에 가려져 있던 내 사랑
나를 살게 한 마지막 이유
다시 한번 심장 속에 피워볼게
무스탕의 끝에서…
끝은, 시작일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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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미 부부와 태호는 ME(Marriage Encounter : 부부가 대화를 깊게 하고 사랑을 새롭게 하는 주말 부부성장 프로그램) 주말을 체험했다.
태호는 15년 전 체험했으며, 마사미 부부보다 한 살이 더 많다.
태호는 이혼한 지 5년이 지났다.
*나뭇잎 소설 속 태호는 간간히 그 모습을 드러낼 참입니다.
부족한 글 읽어주시고 라이킷과 댓글로 응원해 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