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시선이 당겨진 자리

김은령 작가의 첫 시선을 당기다

by 레옹



브런치 김은령 작가님은 시인이며 화가이다.
언어와 선(線)이 서로 기대어 피어나는 순간을 오래 바라보고,
그 삶의 여백에서 이야기를 그려 나가는 작가다.


보는 법이 태어나는 순간


브런치 작가님들의 글을 읽다 보면 따로 책을 펼칠 시간이 필요 없을 만큼,

한 편의 글이 온몸과 마음을 오래 붙잡아 두는 순간을 만난다.
오늘 사유하게 된 김은령 작가님의 시와 그림 연작 첫 시선을 당기다가 그랬다.
이 시와 그림은 나의 걸음을 멈춰 세웠다.

어떤 이미지는 새로운 것을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이미 보고도 보지 못했던 방식을 다시 불러낸다.
그래서 그 앞에 서면 놀라기보다 오래 머물게 된다.


이 글은 브런치 김은령 작가님의 시·그림 연작 〈첫, 시선을 당기다〉를 읽고 사유한 기록입니다.
원문과 작품은 아래 링크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https://brunch.co.kr/@somejerome/33


글의 문 앞에 존 버거의 인용문이 먼저 놓였다.


존 버거

[그리고 사진처럼 덧없는

우리들의 얼굴, 내 가슴] 중


이미 있어 온

것들은

우리를 놀라게 할 수 없다.

(...)

시계(視界)와 빛은

서로를 향해 달려,

그들의 포옹으로부터

낮이 태어난다.

눈들이 망아지처럼

크게 떠지고,

지절대는 강은

한순간 더

안개를 껴안는다.

산봉우리들은

그들의 신호를

하늘에 적는다.

(...)

해가 떠오름에 따라

수풀 우거진 언덕은

그들의 높이를 스스로 재고 있다.

(...)

놀라움은

죽음과 탄생의 수행원인

우리를 향해 다가온다.



“그리고 사진처럼 덧없는 우리들의 얼굴, 내 가슴”이라는 문장은 이렇게 들린다.

우리는 고정된 얼굴이 아니라, 보이는 순간마다 달라지는 상태라는 것.


“이미 있어 온 것들은 우리를 놀라게 할 수 없다.”


이 문장은 곧바로 나의 기대를 꺾었다.
새로운 것을 보러 온 마음이 아니라, 새롭게 보게 되는 마음으로 들어오라는 신호처럼 들렸다.

여기서 ‘놀라움’은 감탄이 아니었다.
놀라움은 죽음과 탄생의 수행원이라고 했다.
낡은 시야가 한 번 죽고, 새로운 시야가 탄생할 때 그것을 놀라움이라 부른다.

그래서 존 버거의 인용문은 작품을 소개하거나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독자의 시야를 조정하는 듯하다.


“당신의 시계(視界)는 지금 어디까지 열려 있는가?”


이 인용문을 통과한 뒤에야 비로소 시와 그림이 열린다.

그리고 하나의 질문을 남긴다.


지금,
나는 세계가 막 태어나려는 기척을 정말 듣고 있는가?





제목은 이미 그림과 겹쳐 있다.


첫, 시선을 당기다


이 제목은 능동형이다.

‘시선을 받다’가 아니라, 당긴다는 말.
그림 속 나무 또한 그렇다.
소리치지 않았지만, 가만히 보는 이를 깊은 곳으로 끌어당긴다.

화면 전체를 채우며 소용돌이치는 붓질은 공기가 아니라 감정이 흐르는 하늘처럼 다가오고,
그 결은 문득 빈센트 반 고흐의 고독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이 화풍은 모방이라기보다 같은 방향을 향한 사유의 진동에 가깝게 느껴진다.

이것은 첫사랑의 첫 시선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처음으로 제대로 바라보는 순간의 시선처럼 느껴졌다.


어떤 그림은 “예쁘다”로 끝나지 않는다.
한 번 보고 지나치려다, 발걸음이 뒤로 당겨진다.
마치 누군가 내 안쪽 옷깃을 살짝 잡아당기듯,
“여기, 아직 안 봤지?” 하고.

오늘 내가 붙들린 것이 그림 속 한 그루의 나무였다.
불타는 하늘 한가운데, 묵묵히 서 있는 검은 몸.
따뜻한 색이 가득한데도 이상하게 편안하지 않았다.
그 온기는 위로가 아니라, 견딤의 체온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둠과 빛, 두 고독의 포옹


시는 어둠과 빛을 대립시키지 않았다.

두 고독이

마주하고,

포옹하고,


싸우지 않고, 가르지 않고, 마주하고, 포옹하는 것.

그림 속에서도 하늘은 불타오르지만 나무는 타지 않는다.
빛은 넘치지만 어둠은 밀려나지 않는다.

마치 그림이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고독은 하나가 아닌 서로 다른 두 고독이 만날 때 비로소 하나의 장면이 된다.



경계를 짓는 -
찰나의 노을빛은

잔혹하리만큼 아름답다.



위 문장은 이 시와 그림이 만나는 핵심처럼 읽힌다.

노을은 늘 경계 위에 있다.
살아 있음과 사라짐의 사이, 머무를 수 없기에 더욱 선명해지는 순간.

노을이 아름다운 이유는 곧 사라질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아름다움을 “잔혹하리만큼”이라고 말한 감각은 나의 마음과도 정확히 겹쳐진다.

낮도 밤도 아닌 시간, 사라짐과 도착이 동시에 일어나는 순간.

그래서 노을은 위로라기보다 하나의 통과의식처럼 다가온다.


그 경계가

얇아지려는 순간,

수평선은 마치 무대장치처럼

밤을 빨아들여 어둠울 흡수하고

세계에 첫빛을 분사하니


새벽의 기척 -

터지듯 깨어난다,


그 경계가 얇아질 때, 수평선은 무대장치처럼 밤을 흡수하고 세계에 첫빛을 분사한다.

그림 속 붉은 하늘 역시 그랬다.

따뜻하지만 편안하지 않았고, 아름답지만 머물 수는 없었다.

그건 아마도 내 내면의 상태가 그렇다는 반증일 것이다.

수평선을 무대장치에 비유한 대목에서 세계는 자연이 아닌 의식으로 다가온다.
현실과 꿈의 경계, 의식과 무의식의 막처럼.

밤을 흡수한다는 말은 고통을 지운다는 뜻이 아니라, 견뎌온 시간을 품는다는 뜻으로 읽힌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


“새벽의 기척—
터지듯 깨어난다.”


희망을 말하지 않아도 이미 희망은 와 있다.
우리가 매일 아침, 새로 깨어나듯이.

‘밝아진다’가 아니라 ‘깨어난다’는 말.
이것은 세상이 변한 것이 아니라 보는 내가 변했다는 선언처럼 들린다.

실제로 그림을 바라보는 관객의 시선은 변한다.

좌에서 우로~(우상향되는 느낌은 나만 그럴까.)



그림과 시가 만나는 지점


그림 속 나무는 새벽을 만들지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나무를 끝까지 바라본 사람은 어느새 새벽에 와 있다.

이 시 또한 그렇다.
위로하지 않고, 설명하지 않고, 그저 경계에 오래 서 있게 만든다.

이 시는 이렇게 말을 건넨다.

빛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경계를 견딘 사람 안에서 터져 나온다고.


이미지라는 ‘본 흔적’


존 버거의 말로 돌아가 보자. 이미지는 사물 자체가 아니라, 사물이 한 번 그렇게 보였던 방식의 흔적이다.

이 나무는 특정한 종(바오밥)의 재현이 아니라, 어둠과 빛이 포옹하는 순간 누군가가 자기 자신을 그렇게 보았다는 기록이다.

그래서 이 시를 품고 있는 그림은 설명될 수도, 요약될 수도 없다.
시와 그림은 같은 질문을 서로 다른 언어로 건넬 뿐이다.

빛은 언제 태어나는가.
어둠이 사라질 때가 아니라, 경계가 얇아질 때라고 말하는 듯하다.


이 글을 빛의 시학에 남기는 이유는 분명하다.
이 작업은 빛을 찬미하지도, 어둠을 밀어내지도 않는다.

대신 이렇게 말하고 싶다.

세계는 언제나 이미 거기 있었고, 우리는 다만 보는 법을 다시 배울 뿐이라고.

첫 시선이 당겨진 자리에서 나는 단정 짓는 대신 다시 나 자신에게 묻는다.


어둠과 빛이 포옹하는 그 경계에서, 나는 지금 내 안의 새벽을 정말 듣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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