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 중 우울감 다스리기
임신 전, 나는 주 3-4회 정도 폴댄스를 다니던 폴 러버였다.
새로운 사람들 앞에서 나를 소개해야하는 상황이 온다면, 나이, 사는 곳, 회사, 직무, mbti 보다 먼저 떠오르는 것이 '폴 타는 것을 사랑하는 사람' 일 정도로.
폴댄스를 처음 시작한 것은 약 4년 전으로, 그 당시 나는 막 4번째 연애를 끝내고 '이제는 남자 말고 다른 것에 나를 몰두시키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있었다. 연애하기가 유일한 취미였던 속 빈 강정같은 20대를 지내오며, 내 에너지를 타인이 아닌 스스로를 향하여 발산하고 싶다는 욕망이 있었다. 이를 위해, 마음을 먹고 시행하기 까지 영겁의 시간이 걸리는 ISFP의 본능을 이겨내고 몇 가지 시도를 하긴 했었다. 그 일환으로 남들이 다 한다는 베이킹, 크로스핏, 클라이밍, 유화 그리기 등에도 관심을 붙여보려고 했으나, 내 열정은 늘 세 달을 채 넘기지 못했다.
그러던 와중, 우연히 헬스 유투버 김계란이 1일 폴댄스 체험을 하는 콘텐츠를 접하게 됐고, 우아한듯 하나 체조에 가까워 보이는 이 운동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그 날 나는 바로 강남 소재의 한 폴댄스 학원의 체험 수업을 신청했고, 이 날 나는 폴댄스에 크게 매료되었다. 이 날은 내 스스로를 향한 몰두의 여정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내 인생에서 어떤 일보다도 더 깊이 빠져, 자발적이고 성실하게 이 활동을 지속해오고 있다. 사실 폴댄스는 나에게 취미 이상의 의미를 가지며, 나는 이 운동을 나의 은인으로 여긴다. 그 이유를 정리해보면 이렇다.
✨ 폴을 타며 자존감과 자신감을 크게 높일 수 있었다. 불가능해 보이는 동작을 성공할 때 마다 실시간으로 분출되는 도파민은 일상생활에서 쉽사리 느끼기 어려운 큰 성취감을 느끼게 해주었다.
✨힘이 세지고 건강해졌다. 전신 근육을 골고루 쓰며 단련하는 이 운동을 꾸준히만 한다면, 당신은 정말 세질 수 있다. 전문가 3급 과정을 마친 후, 나는 풀업 10개까지 성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운동은 유연할수록 가동 범위가 늘어나 더 많은 동작을 성공할 수 있기에, 스트레칭을 늘 함으로써 혈액순환도 잘 된다.
✨학원에서 오랫동안 수업을 들으며 정이 든 고인물 수강생들과의 소소한 스몰톡과 연대를 통해, (사람을 모처럼 잘 만나지 않는 초 내향인으로서) 자칫 결핍되기 쉬운 소셜라이징 게이지를 채울 수 있었다.
폴댄스는 여러 면모로 나의 내면을 늘 충만하게 채워주었고, 일이나 인간관계로 인생이 삐끗해지려고 할 때에도 늘 나를 일으켜 세워주었다.
이처럼 폴댄스에 대한 애정과 집착이 크던 나에게,
임신 확인은 곧 '활동 중지'를 의미했다.
임산부의 운동 가능 시기에 대해서는 의료진마다 의견이 다르지만, 초기 유산 경험이 있던 나에게 원장님은 안정기(16주) 진입 후에 운동을 다시 시작하기를 권장하셨다.
폴댄스는 순간적으로 복압을 세게 주는 동작이 많고, 낙상의 위험이 있다. 그렇기에 임신 초기에는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애초에 임신과 출산, 육아의 길을 선택함에 있어서는, 내가 사랑하는 이 운동을 한동안 할 수 없음에도, 임·출·육의 과정이 나에게 장기적으로 가져다 줄 가치가 더 크다는 판단 하에 결정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이 활동에 제약이 생기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고, 내가 감수해야할 부분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참으로 간사하게도, 막상 운동을 쉬니 아쉬움이 스멀스멀 몰려왔다. 산책 외에는 배에 힘이 들어가는 운동 자체를 아예 하지 않았기에 좀이 쑤시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견디기 힘든 것은, 주기적으로 큰 성취감을 주던 도파민의 원천이 사라졌다는 것. 임신 호르몬 자체가 사람을 무기력하고 우울하게 만드는 것도 있지만, 내 천연 항우울제였던 운동을 하지 못하는 것이 내 기분 하강에 박차를 가한 것 같았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같이 고급반 수업을 수강하던 친구들이 내가 꼭 배우고팠던 동작들을 멋지게 성공하는 인스타 피드가 올라올 때 마다, 형언할 수 없는 씁쓸함이 느껴졌다. '아 나도 이거 잘 할 수 있는데...' 라는 생각이 들 때 마다 고개를 저으며 바로 앱을 꺼버렸다. 내가 임신을 한 당시에는 전문가 3급 과정을 끝내고, 고급반 수업을 주 3회씩 들으며 그 어느 때 보다 근력과 유연성이 가장 높던, 운동 상의 '커리어 하이'를 찍을 때 쯤이어서 이 아쉬움은 더 강했던 것 같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커리어 하이' 일 때 왜 임신을 택했냐고 궁금해한다면, 이렇게 답하고 싶다.
나는 결혼 전부터 아이를 일찍 갖고 싶어했다. 그런 나에게는 지난 유산으로 인한 상처가 너무 컸고, 이 예상치 못한 사건은 가슴 속 깊이 트라우마처럼 남아있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마음이 많이 괜찮아진 것은 사실이었지만, 늘 '내가 앞으로 다시 정상 임신을 할 수 있을까' 라는 불안감이 있었던 것이다. 이런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다시 최대한 빠르게 임신을 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물론 임신과 출산, 육아로 인하여 나의 업무적인 커리어와 운동은 잠시 멈춰가겠지만, 언젠가는 어떤 방식으로든 다시 재개할 수 있을 것이라는 근자감도 한 몫했다.
주치의 선생님이 권장한 '마의 16주'를 참지 못하고,
나는 결국 다시 학원에 전화를 걸어 재등록 의사를 밝혔다.
임신 14주차쯤, 즉 운동을 쉰지 2달이 다 되어갈 때이다. 입덧이 거의 사라지고 체력이 올라왔지만 일상의 큰 기쁨과 활력을 잃은 내 하루는 매일 침울하기 짝이 없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의도적으로 암막 커튼을 걷지 않고, 어둠 속에서 멍을 때리는 시간이 길어졌다. 마음이 공허해지면 식탐이 강해지는 행동 습관이 다시 올라오는 것도 느꼈다. 분명 임신 초기보다 컨디션은 좋고, 아이에 대한 불안감도 줄고, 일이나 인간관계로부터 오는 스트레스도 거의 0에 가까운데 행복하다는 느낌이 좀처럼 들지 않았다.
주치의 선생님이 폴을 타도 괜찮다고 허락한 주수까지는 아직 2주가 남았지만, 정말 조심스럽게 몸만 푸는 정도로 타면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루에도 20번씩 한 후 나는 결국 학원에 전화를 걸었다. 기존에 열정적으로 다니던 고급반 수업이 아닌 초보자를 위한 수업을 끊고 나는 마음이 매우 평화로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 삶에서 폴댄스가 차지하던 부분이 너무나도 컸다는 것을 다시 깨달을 수 있었던 순간이다.
그리하여... 나는 임신 25주차인 현재에도 폴을 타고 있다!
내가 이번에 재등록을 하며 가졌던 마음가짐과, 중기 임산부로서 폴 타는 것에 대한 후기는 다음 편에 남겨보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