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을 '해결의 대상'이 아닌 '공존하는 친구'로 여기는 법
임신을 하고 나서 느낀 것 중 하나는,
'산전우울증'은 '산후우울증' 에 비해 덜 다루어지는 것 같다는 것이다.
임신 증상으로 인한 신체 및 정서적 불편감, 출산 및 육아에 대한 부담감, 커리어 단절에 대한 우려 등...임신이 여성에게 주는 어려움은 심심치 않게 접할 수 있다. 그러나, 여성이 이러한 어려움을 어떻게 슬기롭게 해결해나갈 수 있는지에 대한 방법은 비교적 찾기가 쉽지 않다.
특히 임신 전 기분장애로 인해 정신과 약을 복용했던 사람들에게 이러한 문제는 더 크게 다가올 수 있다. 일반적으로는 임신을 확인하면 약의 복용을 크게 줄이거나 끊는 것이 권장되기 때문이다. 이들에게는 단약으로 인한 기분 편차가 일단 디폴트로 적용되며, 그에 더해 임신 호르몬으로 인한 추가적인 기분 저하가 일어나기에 일상을 영위하기가 좀 더 불리한 것이다.
⚠️ 임신 중에는 우울증 치료를 위해 약물 사용을 피하는 것이 권장되지만, 만약 산모의 우울증이 심각하고 그로 인해 산모와 태아의 건강에 심각한 위험이 우려되는 경우, 의사는 약물 치료를 고려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임신 중 안전성이 확인된 약물을 사용하며, 반드시 전문의와 상의 후 결정해야 합니다.⚠️
오늘로 우울증약을 단약한지 약 1년 6개월차에 접어든다. 임신을 확인 한 순간부터 25주차에 접어드는 오늘날까지, '아 약 땡긴다...' 하는 순간은 수도 없이 많았다. 이 챕터에는 약의 도움 없이 남은 기간을 헤쳐나가기 위한 나의 발버둥의 기록이 담겨있다. 우울감 극복을 다루는 여러 심리학 도서와 gpt와의 긴 담론을 통해 도출해낸 방법들이며, 실제로 나에게 꽤나 효과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 글이 산전 우울감을 해소하고픈 그 누군가에게는 꼭 도움이 되면 좋겠다.
15년간 뇌 과학을 도구 삼아 우울증만 연구해온『우울할 땐 뇌 과학』의 저자인 앨릭스 코브는, ‘감정 인식과 수용’이 우울 극복의 첫 단계임을 강조한다.
우울한 감정을 무시하거나 억누르려 하지 말고, 우울함이 내 안에 있다는 사실을 먼저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감정을 억누르거나 부정하면 뇌가 더 스트레스를 받기 쉽고, 오히려 우울이 심화될 수 있다고 한다. 즉, 우울감을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의 비상 상황'이 아닌 '관찰 대상' 으로 바라보는 마음가짐을 가져본다.
'오케이, 나 지금 우울 우울 열매를 한아름 먹은 상태구나..'임을 깨달은 후에는, (만약 여유가 된다면), 우울감을 '내 임신 기간동안 챙겨줘야하는 안타까운 친구'로 여기는 것을 추천한다. 내 경우, 우울감은 내 인생 전반에 걸쳐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하는, 너무 싫지만 계속 나타나는 애증의 존재가 되어버렸다. 분명 너무 싫은 존재이지만, 이 녀석이 나타날 기미를 보이거나 이미 둥지를 틀어버리면 어떻게든 어르고 달래서 진정시키는 것이 내 정신건강에 낫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지음 작가의 『젊은 ADHD의 슬픔』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내가 이 책에서 가장 좋아하는 구절이기도 하다.
나는 ADHD에 항복하고, 질환의 파편으로 존재하는 모든 '나'를 인정하기로 했다. ADHD와 나는 원심분리기에 돌려도 분리되지 않으니,
차라리 공존을 택한 것이다.
나를 힘들게 하고 때로는 무너뜨리게 하는 이 녀석을 이렇게 유쾌하게 생각할 수 있다니. 한 방에 없앨 수 없다면 그냥 공존을 택해버리는 그녀의 유쾌하고 건강한 승화법은 내게 큰 울림을 주었다.
임신 초기,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입덧+졸음+무기력의 불쾌한 3종 콜라보였다. 무기력감은 입덧이 사라진 14주차에도 지속되었으며, 자매품으로 우울감도 함께 끌고왔다. '분명 입덧도 거의 사라졌고 체력도 많이 올라왔는데, 왜 이렇게 우울할까?' 라는 생각으로 꽤나 괴로운 나날을 보내곤 했다. 그리고 도저히 이렇게는 안되겠다 싶어 그 이유를 생각해보았다.
당시 나는 프리랜서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하루 근무 3~4시간을 제외한 시간에는 특별한 하루의 루틴이 없었다. 그것도 주 3회만 근무했으니, 일주일 중 꽤나 오랜 시간이 다소 무계획적으로 흘러가고 있었던 것이다. 임신 전에 회사를 다닐 때에는 '회사-운동-집'을 반복하며 하루를 채웠는데, 퇴사 후 '회사-운동'의 파이가 확연히 줄어든 이 시기에는 하루가 너무 길게만 느껴졌다. (운동은 거의 나의 유일한 취미였는데, 계류 유산 경험이 1회 있던 나에게 주치의 선생님은 안정기까지 운동 중단을 권고했다.)
'마땅히 할 일이 없음 → 무기력해짐 → 아무 것도 안하니 우울해짐' 의 사이클이 반복되는 것을 자각한 후에 스스로에게 내린 처방은 '하루 루틴 만들기' 였다. 그럼 루틴을 어떻게 짜면 될까? 우선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것을 리스트업 해보니, 크게 '취미'와 '의무'의 2가지 카테고리로 나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도 머리를 쓰거나 몸을 쓰는 것들로 세부적인 영역을 나눌 수 있었다.
ㆍ운동 : (안정기 진입 후) 폴댄스, 요가, 산책
ㆍ손으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 : 글쓰기, 요리하기
ㆍ마음을 정화시키는 것 : 독서
ㆍ배우기 : 부동산, 재테크 st 공부등
ㆍ인간관계 : 주기적으로 친구, 가족 만나기
ㆍ커리어 고민 : 파트타임 공고 확인, 포트폴리오 정리
ㆍ집안일
이렇게 몇 가지 할일이 정리되니, 그 다음은 한결 수월했다.
'취미'와 '의무' 영역의 세부 카테고리들을 적절히 섞어가며 그 날 하루의 일과를 만드는 것이다. 계획이 너무 촘촘하면 스트레스를 받는 나의 성격 상, 요일/시간대별 할 일까지 촘촘히 나누지는 않았다.
<임산부 하루 루틴짜기>
✅하루에 눈을 뜨면 그 날 할 것을 적절히 리스팅하기
ex) 폴댄스 수업 1개 듣기 - 재테크 관련 영상 2개 시청하기 - 심리학 에세이 1챕터 읽기
✅실천하면 체크를 하며 소소한 성취를 느끼기
✅하루가 마무리 될 쯤에는 그 날 어떤 기분이었는지 간단히 메모하기
다소 체계적인듯 하면서도 다소 루즈한 느낌의 이러한 루틴을 세우고, 실천한지 어느덧 3개월 정도가 되어간다.
놀랍게도 단 며칠 만 이런 생활을 함으로써 내 하루 기분은 크게 개선되었고, 일상을 이끌어 나갈 의욕과 활력이 생겼다. 할 일이 있다는 것은 나를 움직였고, 내가 내 하루를 통제한다는 느낌은 소소한 성취감을 준다.
물론 가끔 너무 피곤하거나, 루틴 자체가 스트레스로 다가오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루 종일 자거나 유투브만 보는 날들도 있다. 그러나 일단 이러한 날들을 보내다보면, 루틴이 어느정도 생겨버린 하루로 다시 돌아오기는 아주 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