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꽃이 살랑살랑 바람에 춤을 추면 마음이 괜히 설렌다. -햇살이 좋으니 나가볼까? -소풍 가기 좋은 날씨인데. -누구랑 가면 재밌을까?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소풍을 간다. 얼마나 신나면 산골짝의 다람쥐도 도토리 점심 가지고 소풍을 갔을까. 내 기억에 남는 소풍은 초등학교 때가 마지막이다. 선생님이 주신 안내문을 받고 발이 안 보이게 달려 집에 갔다. “엄마 내일 소풍 간대요. 김밥 맛있게 싸줘요.” 안내문을 한참을 보던 엄마는 얕은 한숨을 쉬고 말했다. “김밥은 손이 너무 많이 가니 이번에는 그냥 분식집에서 사 가자.” 집에서 싸준 맛있는 김밥을 기대했던 나는 실망감에 풀이 죽었다. 친구들에게 자랑도 하고 선생님께 드리려고 했던 계획이 한꺼번에 무너졌다. 우울했다. 어깨가 축 처졌다. 훌쩍이는 뒷모습을 보던 엄마는 시장바구니를 들고나갔고 한참 후 바구니가 터질 만큼 장을 봐왔다. 부엌으로 가서 김밥 재료를 씻고 손질하고 만드느라 분주했고 손이 큰 엄마는 쟁반에 50줄이 넘는 김밥을 만들었다. 동그란 탑처럼 쌓아 올린 모습은 보기만 해도 배가 불렀다. “선생님도 드리고 친구들이랑 나눠 먹어.” 도시락에 예쁘게 썰어 깨소금을 뿌려 넣어주었다. 소풍날은 날씨가 맑고 하늘은 파랗고 구름은 새하얗게 떠다녔다. 친구들과 둥글게 모여 앉아 서로 도시락을 꺼내 자랑을 했다. 알록달록 예쁘게 꾸민 김밥, 새콤달콤한 유부초밥, 분식집에서 사 온 김밥, 동그란 주먹밥, 오므라이스 등 다양한 종류가 있었다. 하나씩 나눠 먹으며 품평회 겸 미식회가 열렸다. 우리는 수다를 떨며 각자 엄마가 해 주신 사랑을 맛있게 먹었다. 그중에서도 엄마가 싸준 김밥이 당연히 일등이었다. 솟아오른 어깨에 으쓱함이 넘쳤다. 집에 도착해 신이나 방방 뛰며 자랑을 했다. “엄마, 엄마 김밥이 제일 맛있었어. 인기 최고였어. 완전 짱!” 머리를 쓰다듬는 엄마의 손길이 따스했다. 다리에 누워 사르르 잠이 들었던 기분 좋은 기억이 가슴에 남아있다. 한동안 산처럼 쌓인 김밥은 우리 가족의 일용할 양식이 되었다. 그 날 이후 다시는 엄마표 김밥을 먹을 수 없었다. 왜냐면 싸기 힘들다고 분식집에서 해결했기 때문이다. 그때는 몰랐다. 당신의 얇은 지갑에는 자식에게 넉넉한 김밥을 사 줄 만큼 돈이 없었음을. 홀로 감당했을 외로운 시간과 헤쳐나가기 벅찬 가난한 생활을 어떻게 견디며 살아냈을까? 올해는 내가 김밥을 싸서 봄 소풍을 가자고 말해야겠다. 파란 잔디 언덕에 앉아 배가 부르게 김밥을 먹고 싶다.
날씨가 포근해지고 햇볕이 따스해지면 사람들은 같은 생각을 한다. 오늘은 소풍 가기 정말 좋은 날이라고. 설레는 맘으로 맛있는 도시락을 싸고 아이처럼 신이나 괜히 콧노래도 흥얼거린다. 봄 햇살이 가득한 얼굴에 가벼운 발걸음은 스치는 사람들과의 인사도 즐겁게 한다. 달콤한 소풍의 계절이 오면 비가 쏟아지길 간절히 바랐던 가난한 소녀가 있었다. “여러분, 다음 주 금요일은 소풍이에요. 즐겁죠? 안내문 부모님께 꼭 보여드리고 용돈 너무 많이 가져오면 안 돼요.” 맑은 선생님의 목소리가 오늘은 무겁게 가슴에 들렸다. 축 처진 어깨에 가방끈이 아슬하게 매달려있다 툭 떨어졌다. 순간 화가 나서 바닥에 굴러다니던 콜라 캔을 힘껏 찼다. 집에 도착했지만 문을 열지 못하고 한참을 서 있었다. 방문을 여니 엄마가 환한 미소로 반겨주었다. 이상하게 눈물이 났다. 나쁜 짓을 하다 들킨 것처럼 가슴이 콩닥거리고 눈물이 줄줄 흘렀다. “무슨 일이야? 왜 울어.” 놀란 엄마의 물음에 냅다 소리를 지르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학교에서 다음 주에 소풍 간대요. 소풍 싫어! 안 갈 거야.” 학교 앞 문방구 작은 평상에 앉았다. 어렸지만 우리 집 형편에 소풍을 가려면 돈이 필요하고 몸이 아픈 엄마가 힘들게 일해 벌어온 돈을 쓰고 나면 생활이 더 힘들어진다는 걸 나는 알았다. 아빠 없이 동생과 나를 키우는 어려움에 밤마다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하루를 살아가는 모습을 보았기에 더 소풍을 말하기 어려웠다. 한참을 있다가 집 대문을 열고 들어와 계단에 앉았다. 어떻게 알았는지 문을 열고 내 손을 잡고는 크게 말했다. “우리 별이 소풍이면 신나야지. 김밥도 싸고 간식도 사고 새 옷도 사려면 일주일이 바쁘겠다. 그 치?” 믿지 않았다. 약속을 지키려면 돈이 필요했기에 마음이 먼저 포기를 했다. 며칠 뒤 약속을 지킨 엄마의 손을 잡고 시장에 갔다. 예쁜 옷들이 너무 많아 뭘 사야 할지 정신이 없었다. -이건 목이 너무 좁아서 머리 안 들어가겠다. -너무 공주 드레스라 입고 다니기 힘들겠다. -사이즈가 너무 딱 맞아 올해 입으면 못 입겠네. 고르는 옷마다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더니 ‘30% 명품 보세 세일’이라고 형형색색의 스티커가 붙은 매장에 들어가 새 옷이 아닌 헌 옷들 속에서 땅굴을 파듯 뒤져 몇 벌을 사 왔다. 물론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 온 옷을 손빨래하는 엄마의 등은 탈춤을 추는 사람처럼 덩실거렸다. 소풍 전날은 생각보다 빨리 왔고 날씨에도 신이 있다면 비를 왕창 내려주길 간절히 빌었다. 저녁이 되어 김밥 재료를 준비해놓고 함께 김밥을 만들었다. 김을 깔고 밥을 올려 단무지, 달걀지단, 우엉조림, 햄, 제일 좋아하는 어묵은 두 개, 맛살도 두 개, 시금치는 하나만. 동그랗게 말아내면 완성!!! 쟁반 가득 쌓인 김밥을 도시락에 썰어 담고 남은 꽁다리와 터진 김밥은 저녁밥이 되었다. 소풍날 날씨 신은 맑고 화창하길 바라던 친구들의 편이었다. 하나같이 등에 유행하는 원숭이 인형을 매고 새로 산 옷으로 치장하고 두둑한 용돈을 자랑하며 즐거워했다. 점심시간이 되어 둘러앉은 친구들의 도시락은 참 화려했다. 주변 눈치를 보다 열지 못한 뚜껑을 어렵게 열자 예상대로 놀려댔다. “에이. 별이는 그냥 김밥이래요. 맛없겠대요.” “웃기시네. 우리 엄마 김밥이 제일 맛있거든.” 놀리던 친구들이 너도나도 먹어 본다고 달려들어 하나씩 집어먹었다. “우와. 진짜 맛있다.” “김밥에 시금치 없어 좋겠다.” 비싼 키티 도시락도 앙증맞은 곰돌이 도시락도 깨끗이 비워져 돌아오는 길은 가방이 훨씬 가벼웠다. 가만히 생각하니 좋은 옷 원숭이 인형 비싼 소풍 가방은 중요하지 않았다. 나에게는 친구들이 부러워하는 최고의 요리사 엄마가 있었다. 으쓱한 어깨에 내려앉은 봄바람이 휘파람을 불었다. “엄마. 뭐해?” 4살 딸아이의 물음에 둥글게 말던 주먹밥을 내려놓았다. “응. 우리 딸 내일 소풍 가니까 도시락 싸고 있지. 엄마 도시락이 제일 맛있을걸!” 맛이 좀 없으면 어떠랴 사랑과 정성이 가득한 도시락인데. 엄마의 마음도 지금의 나와 같았으리라. 아릿한 그리움이 봄 속에 완연하다.
창을 통해 들어온 하늘은 에메랄드빛이었다. 하늘거리는 봄바람은 바람 난 봄처녀의 치마폭이었다. 가지마다 물이 오른 새싹은 몸이 간지러운지 연신 솜털을 후후 불었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소풍을 가기엔 더할 나위 없이 멋진 아침이었다. 깨우지 않아도 눈이 떠졌다. 손꼽아 기다리고 기다렸던 바다로 떠나는 소풍이었다. 중학교 2학년 봄 소풍. 바다로 떠난 마음은 이미 인어공주를 상상했고 등대를 보았고 파도를 따라 뛰어다녔다. “엄마. 김밥.” 아침밥 준비에 바쁜 어깨너머로 막내딸의 목소리를 들은 엄마의 첫마디는 완전체의 공포! 그 자체였다. “소풍은 무신 소풍이고. 안 간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가지 마라. 김밥도 안 샀다. 그냥 하루 집에 있거라. 김밥 싸는기 보통 일인 줄 아나.” 천 길 낭떠러지 위에 한 발만 내디디면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져 갈라진 땅속으로 곤두박질치는 지독한 아득함에 숨이 막혔다. 순식간에 바뀐 믿을 수 없는 현실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고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 허망함에 두 다리가 후들거렸다. 엄마는 늘 그랬다. 오직 아들에게만 열린 가슴은 한없는 사랑을 쏟아내는 화수분이었다. 본인 삶의 중심은 거룩한 종교처럼 아들을 위해 기도하고 또 기꺼이 희생했다. 맹신에 가까운 믿음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딸에게까지 올 틈이 없었다. 당신도 엄마이기 전에 여자이면서 내 딸만큼은 나처럼 살지 말라고 귀에 딱지가 앉도록 되뇌면서 언제나 결론은 아들이었다. “오빠가 소풍 갈 때는 용돈도 주고 가방이 터지도록 싸줬잖아. 나는 왜 김밥도 안 싸주노. 왜 그라는데.” 분하고 억울했다. 일방적인 사랑은 항상 제일 끝에 있는 나에게는 순서가 없었다. 우리 집에서 막내라는 자리는 외롭고 무시당하고 있으나 없으나 별 표가 안 나는 먼지 같은 존재였다. 요즘처럼 돈만 있으면 척척 집보다 더 맛있는 김밥을 살 수 있는 분식집이 없는 그 시절엔 일 년에 한두 번 소풍날 먹는 기다림이 전부였다. 친구들과 바닷가에 앉아 수다도 떨고 사진도 찍고 점심도 먹고 등대도 보려 했는데 엉망이 되었다. 갈매기랑 술래잡기도 하고 모래성도 쌓고 바다를 향해 소리도 지르고 싶었는데 근사한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끝내 소풍을 못 갔다. 좋은 추억으로 남겨 두고 싶었던 날이 엄마의 빗나간 자식 사랑으로 영원히 가슴 아픈 날이 되었다. 생각해보면 그냥 갈 수도 있었을 텐데 굳이 서로 팽팽한 기싸움을 하며 소풍을 포기했던 가슴에는 미움이 가득했다. 그날부터 나는 사랑받지 못함에 익숙해지는 법을 조금씩 익혔다. 상처 받지 않으려 스스로 강해지는 삶을 선택하니 그리 나쁘지 않게 나이를 먹으며 무뎌졌다. 적당히 둥글어졌다. 우리에게 시간은 각자의 삶에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방식을 제시했다. 아픈 기억은 결국 상처를 치료하지 못했고 보듬지 못한 관계는 어색한 바라보기로 끝이 났다. 아들만을 위해 살았던 간절한 모성은 주기만 했지 받지는 못하는 늙은 어미의 한으로 가는 길을 붙잡았다. 서로에게 남긴 흔적이 너무 크다. 나는 아직도 가지 못한 봄 소풍을 가끔 상상한다. 작은 소녀의 바다는 지금도 인어공주를 꿈꾸는데 현실은 아침 햇살에 물안개로 사라진 중년이다. 그 날 소풍을 갔더라면 어땠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