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5월 5일 금요일 날씨 맑음
오늘은 어린이날이었다.
하나도 신나지 않았다. 즐겁지도 않았다.
엄마가 일기검사를 할 거니 쓰고 일찍 자라 했다.
놀이터에 놀러 갔는데 소연이가 부모님께 받은 곰 인형을 자랑했다.
이름은 ‘바비’라고 얄밉게 웃으면서 나한테는 뭐 받았느냐고 물었다.
집에 가면 엄마가 줄 거라 했더니 너만 선물이 없다고 놀렸다.
집에 와서 계속 엄마를 따라다녔다. 아무리 기다려도 선물을 주지 않았다.
오늘은 최고로 슬픈 날이다.
왜냐하면 친구들은 전부 부모님께 선물을 받았는데 나만 선물을 못 받았기 때문이다.
예쁜 바비인형을 갖고 싶다. 머리도 빗기고 옷도 갈아입히고 싶다.
다음 어린이날에는 엄마가 공주님 세트를 꼭 사주셨으면 좋겠다.
어린이날 일기 끝!
(부제: 자전거⚌짜장면?)
5월은 가정의 달. 가장 기다리는 어린이날이 있다.
크리스마스처럼 우리는 봄날의 산타를 기다린다. 예쁜 양말을 머리맡에 두고 선택의 권한 없이 산타의 선물을 받아야 하는 겨울보다 가지고 싶은 선물을 부모님께 강하게 사 달라고 조를 수 있는 봄이 어쩌면 더 기회의 계절이다. 초등학교를 들어가기 전에는 어린이날을 몰랐다. 학교에 들어가 친구들이 인형이며 장난감을 받았다는 선물 자랑을 듣기 전까진 특별한 날의 존재를 경험하지 못한 일상이었다. 난생처음 봄에도 산타가 있음을 알게 되고는 어서 포근해지기만을 따스한 바람이 불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드디어 5월. 나뭇잎은 초록으로 염색하고 스치는 바람은 하루에도 몇 번씩 휘파람을 불었다. 매일 등굣길은 신났고 친구들과의 얘깃거리는 온통 ‘어린이날 선물’이었다. 가지고 싶은 것을 써오라는 숙제는 생각보다 쉽게 할 수 있었다.
‘자전거’
꼬부라진 글씨를 지우개로 지우고 쓰길 반복해 세상에서 제일 예쁜 글씨로 적어냈다.
다음 날. 신기하게도 엄마는 가지고 싶은 게 있느냐고 물어봤다.
“자전거요! 자전거요!”
이 질문은 분명 산타께 힌트를 주려는 엄마의 눈속임이 틀림없다.
몇 번이나 되풀이했고 종이에 적어도 주었고 그림도 그렸으니 모를 리가 없었다. 잘 알았다는 듯이 살짝 웃는 엄마의 미소는 이미 선물을 준비한 여유 있는 모습이었다. 드디어 어린이날 선물을 받는구나.
심장은 콩닥콩닥 거렸고 눈은 달력만 바라보았다.
기다리던 어린이날. 참새들의 수다 소리에 번쩍 눈을 떠 선물부터 찾았다. 생각해보니 머리맡에 있기에는 자전거가 너무 크니까 밖에 있구나 싶어 마당으로 뛰쳐나갔다. 그런데 대문 앞에도 부엌에도 창고에도 없었다. 눈에는 눈물이 흐르는데 여기저기 계속 찾았다. 한참을 그렇게 찾다 결국 포기를 하니 실망의 울음이 통곡으로 변했다.
“왜 울어? 왜 그래. 응?”
세상이 무너져라 우는 소리에 놀라 신발도 안 신고 달려온 엄마였다.
“자전거가 없어요. 어린이날인데. 선물이 없어. 엉엉”
어떤 말이 위로가 될까? 아무리 달래도 소용이 없었다.
“자전거를 달라고 했는데 짜장면으로 들은 모양이네. 어쩌지.”
자전거 갖고 싶다고 했는데 짜장면 사달라고 한 줄 알았단다. 말도 안 된다. 그 날의 위로는 실패였다. 온종일 집은 눈물바다였다.
미안한 엄마의 마음에는 때 이른 매미가 찾아와 종일 맴맴 울었다.
6월에 들어선 계절이 봄과 여름의 경계에 지칠 때쯤 생각도 하지 않게 산타의 선물을 받았다. 그토록 눈이 빠지게 기다렸던 자전거였다.
어린이날 받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래도 신났다.
약간 낡아 칠이 벗겨지고 바퀴가 구를 때마다 터덜거리는 소리가 났지만 생애 첫차를 가지게 된 기쁨에 마냥 행복했다. 친구들과 골목길을 내달리며 함성을 지르던 자전거가 지금도 눈을 감으면 가슴에 가득하다.
어른이 되어 알게 된 사실은 그 날 엄마는 내 소원을 잘 못 들어서 짜장면 핑계를 댄 것이 아니었다. 사줄 형편이 안 되고 꼭 사주고 싶은데 자전거를 살 돈이 필요하니 시간을 벌어야 했다. 자식의 울음을 안아주며 당신의 가슴은 아마 비가 내렸겠지 생각하니 코끝이 찡했다.
길가에 버려진 자전거 두 대는 척척박사 손을 거쳐 한 대의 멋진 선물로 다시 태어나 가난한 동심의 산타가 되어주었다. 시기를 놓친 봄날의 크리스마스는 자전거는 짜장면이라는 우리 집만의 공식을 만들어 주었다.
한동안 어린이날에는 짜장면만 먹었으니 말이다.
아이를 낳아 초보 엄마가 되어보니 알겠다. 나뿐만 아니라 엄마에게도 어린이날은 참 아픈 기억으로 시간을 흐르고 있다는 걸.
추억의 자전거는 아직도 멈추지 않고 달리고 있다.
나이 들어 좋은 점은 나이를 따라 잊힘이 많아서 인 줄 알았다. 그런데 나쁜 기억은 이상하리만큼 더 또렷하게 살아남는다. 일 년을 열두 달로 나눠 봄 여름 가을 겨울이란 계절의 옷을 입히고 각자의 시간마다 삶의 방식을 준 하늘의 깊은 뜻을 따라 나이를 먹는다.
유독 봄이면 준비 없는 이별을 불쑥불쑥 하고 지워지지 않는 아픔을 많이 겪는 이유를 인간의 짧은 깨달음이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남은 상처는 정확히 때가 되면 생각의 틈을 비집고 나와 기억의 싹을 틔운다.
올해도 어김없이 5월이면 어린이날이 온다. 영원히 어린이처럼 살라는 숙명인지 어른이 되어도 철이 없을 거란 선견지명인지 음력도 양력도 아닌 윤달 5월 5일에 태어났다.
왜 가난하면 똥구멍이 찢어져야 하는지 묻기도 전에 생일파티가 뭐야?라는 질문이 나오기 전에 윤달이 자주 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내 생일은 불문율이 되었다. 그렇게 생일이 없는 아이로 살던 초등학교 1학년 때 봄이었다.
학교에 갔다 오니 마루에 생일상이 차려져 있었다. 작은 상에는 케이크랑 과자며 사탕, 과일들이 다닥다닥 붙어 생일 축하 노래를 기다렸다.
“빨리 온나. 오늘 니 생일이다.”
“생일? 나 생일 없잖아.”
“윤달 생일이라꼬 엄마가 준비했다 아이가. 빨리 촛불 끄라.”
학교 갈 때 언니가 양 갈래로 묶어준 삐삐 머리를 하고 입이 귀에 걸려 마당에 신발을 내동댕이치고 마루에 올랐다.
케이크에 앉은 장미꽃의 달콤한 향 때문에 입안이 침이 가득 고였다.
언니는 자리에 앉기 무섭게 성냥을 꺼내 초에 불을 붙였다.
“생일 축하 노래 부르자.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
딱 거기까지 불렀다. 태어나 날을 축하하는 노래였다. 그런데 큰 방문이 부서지라 열리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노래를 잘랐다. 늘어지게 낮잠을 자던 큰오빠였다. 뭐가 그리 마음에 안 들었는지 어린 가슴에 바늘 수백 개가 날아왔다.
“뭐가 이리 시끄럽노. 가스나 생일이 뭐 그리 대단하노. 옛날 같으면 윤달 5월 5일에 태어난 가스나는 임금 잡아 먹는다꼬 다 쥑있다. 알고 있나.”
이 무슨 생일 축하 인사인가! 옆집 똥개한테도 그리 말하지 않아야 하는데 목에 걸린 숨이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않는다. 열아홉이나 어린 막냇동생에게 보내는 인사치 고는 너무 고약하고 서러웠다. 멍해진 머릿속에 가득 찬 눈물은 기어이 원망이 되었다. 아무 말 없이 나를 불쌍하게 쳐다보던 엄마와 언니의 얼굴은 가난한 집 천덕꾸러기로 태어난 현실을 각인시키기 충분했다.
처음으로 받은 생일상의 촛불을 끄지 못했다. 어린이날에 맞은 생일은 지독한 트라우마로 남아 지금도 생일은 남의 이야기다. 큰오빠는 왜 모질고 독하고 동생을 싫어했을까? 아직도 모르겠다.
그 이유를.
오빠가 아주 아프다는 연락을 받았다.
“죽기 전에 한 번은 봐야지.”
신장이 아파 신장투석기를 집에 놓고 매일 치료를 받아야 한다 했다. 당뇨합병증으로 걸음도 제대로 못 걷고 살이 다 빠져 볼품없단다. 가 봐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입 밖으로 알겠다는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어린 기억에 남은 충격으로 오랜 시간 우리는 가까이하기에 너무 먼 사이가 되어 버렸다. 심장에 찌르르 전기가 흘렀다.
한마디의 말이 인생을 얼마나 크게 흔드는지 알았더라면 오빠가 그랬을까. 생각 없이 던진 말에 삶은 맞아 죽기도 한다. 어떤 날은 시퍼렇게 군데군데 멍들어 스치기만 해도 따갑다.
잃어버린 시간 속에 나쁜 기억은 나이테를 입고 더 두꺼워졌다. 켜켜이 쌓인 지독한 기억이다.
눈물겨운 하루를 내려놓은 자리에 5월은 또 어린이날과 생일을 들고 찾아올 것이다. 문밖에 도착한 아픔이 문을 두드린다. 똑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