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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과 별과 등대 Jul 07. 2020

여름

4. 비와 당신



(부제: 비와 스쿨버스)

 이른 아침 시끄러운 빗소리에 잠에서 깼다. 커튼을 걷어보니 누가 하늘에 수도꼭지라도 튼 것 마냥 비가 쏟아졌다. 이렇게 여름 장맛비가 오는 날이면 쓸데없이 기억력이 풍부해져 많은 생각이 떠오른다.

 다른 친구들은 엄마가 데리러 와 전부 우산을 쓰고 나란히 걸어가는데 나는 우산이 없어 비를 흠뻑 맞고 울며 집에 왔던 기억. 초등학생 때 문구사 앞 하수구에 빗물이 넘쳐 무릎까지 빠져 가방을 머리에 이고 등교를 했던 기억. 새로 산 우산을 쓰고 걷다가 바람이 불어 우산이 뒤집혀 하늘로 휭 날아올라 당황한 기억.

이런저런 비에 관한 생각에 잠겨 있다 문득 고등학생 때 겪은 일이 떠올랐다.

 그날도 오늘같이 비가 세상을 가려 앞이 보이지 않는 아침이었다. 스쿨버스를 타고 학교에 가다 피곤해 깊게 잠이 들었다. 얼마를 갔을까. 귀에 웅성웅성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 짜증을 내며 눈을 떴다. 무슨 일이 생겼는지 친구들이 바닥을 가리키며 불안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가만히 나도 발밑을 보니 빗물이 버스 안에 가득 차오르고 있었다. 당황한 친구는 이리저리 물을 피해 도망 다니고 적당한 허세를 자랑하는 친구는 놀이기구를 타는 기분이라며 괜한 농담을 했다. 밖을 보니 차들은 반쯤 물에 잠겨 옆을 지날 때마다 흙탕물을 튕기며 물보라를 일으켰다. 빗물 때문에 버스는 계속 휘청거렸고 거북이걸음으로 조금씩 움직이는 차 바닥에 물도 계속 첨벙거렸다. 땀을 뻘뻘 흘리며 우리의 안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아저씨의 운전대를 잡은 팔뚝에 불거져 나온 힘줄이 얼마나 어려운 상황인지 짐작게 해주었다. 겨우 안전지대에 도착해 학교까지 무사히 등교했지만 머리에서 발 끝까지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된 우리는 투덜거렸다.

 “야, 저기 무지개다.”

친구의 외침에 바라본 하늘에 언제 비가 왔냐는 듯 무지개가 어여쁘게 다리를 만들었다.

맑게 갠 하늘에 남아있던 그리움이 만들었을까? 함께 바라본 무지개는 서로의 가슴에 좋은 기억으로 자리 잡았다. 가끔 비가 오는 날이면 일곱 빛깔 무지개로 남은 친구들의 얼굴이 그립다.



 ‘비는 이별’이라는 트라우마는 내 오랜 고질병이다. 마음 깊이 새겨진 공식은 비가 오는 날이면 천둥 같던 목소리를 소환해낸다. 20년이 훨씬 지난 일임에도 어제처럼 선명한 두려움으로 기억을 뚫고 성큼 다가선다.

 시커멓고 어두운 하늘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세상을 잿빛 그림자로 덮었다. 무서워 한달음에 집으로 뛰었다. 심장을 부여잡고 들어간 집은 깨진 물건들이 나뒹구는 돼지우리였고 동생의 놀란 울음소리는 달팽이관을 찔러 귀가 멍하게 울렸다. 방으로 데려가 끌어안고 상황을 조심스레 파악했다. 밖에는 오랜 울분을 토해내듯 요란스럽게 천둥이 치고 또 쳤다.

 부모님의 싸움은 조금 전 본 하늘과 다를 바 없었다. 엉망이 된 두 사람의 얼굴에는 분노와 원망이 가득했다.

엄마의 허망한 눈에서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이 분명했다.

 “내 자식 아니니 키우든지 버리든지 마음대로 해!”

매몰찬 말로 문을 박차고 나가던 아빠의 뒷모습엔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말이 숨어있었다. 초등학교 1학년인 나는 이별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신발도 신지 못하고 멀어지는 아빠를 따라 달려갔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앞서가는 어깨를 보았다. 다급함이 묻은 발자국은 어느새 뛰고 있었다.

  “아빠! 가지 마. 아빠!”

목이 터지라 부르고 또 불렀다. 한 번이라도 돌아보지 않을까 하는 간절함에 어린 가슴은 울지도 못했다.

자식의 목소리가 하늘을 울리는 천둥소리보다 컸지만 끝내 당신은 야멸찬 뒷모습만 보인 채 빗속으로 멀어져 갔다. 멀어져 갔던 그 길로 다시 돌아오지 않을까.  정말 미안했다고 꼭 안아주지 않을까.  비가 그치고 하늘이 파란 날 맑은 해처럼 다시 와주지 않을까. 꼭 그럴 것만 같아 하염없이 기다렸다. 나는 알지 못했다. 여름 장마는 길고 길다는 것을…… 이별의 비는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상처 난 시간은 흔적을 남긴다는 걸 몰랐다.

 눈을 뜨니 집이었다. 뛰쳐나간 나를 찾아 헤매다 비를 맞고 길에 쓰러져있어 데려왔다고 했다. 온몸에 가시가 뚫고 나왔는지 아팠다.

 “엄마, 비 그쳤어요?”

한참을 바라보던 엄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없이 따뜻한 품에 차가워진 나를 안아줬다. 어깨가 들썩이며 울음을 삼키려고 자꾸만 머리를 쓰다듬는 작은 흐느낌에서 알 수 있었다. 가장 길고 가장 아픈 장마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지금도 한여름 더위와 함께 장마가 온다는 일기예보를 들으면 무의식 속에 숨어있던 그 날이 당신의 뒷모습을 비로 그린다. 가슴의 반을 나눠 생명을 준 자식을 놓고 갈 만큼 소중했던 삶은 과연 잘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빗속에 남겨진 딸은 어른이 되어 비가 오는 날이면 흐려지는 창밖을 보며 속울음을 운다.

부디 행복하기를.





 지루한 장마가 기분까지 우울하게 만드는 일요일 아침이었다. 눅눅해진 일상은 사람도 처지게 하고 만사 귀찮아 대충 시간을 보내는 하루를 던져주었다. 그날도 창밖으로 내리는 비를 보며 커피나 한잔 할까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띵똥, 띵똥.”

오래도록 울리지 않아 뻑뻑해진 초인종이 짧게 두 번 소리를 냈다. 찾아올 사람이 없는 현실에 갸우뚱하며 문을 열었더니 낯선 남자가 비를 흠뻑 맞고 서 있었다. 보통 키에 짧은 머리.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얼굴에는 약간의 긴장감이 묻어났고 젖은 작업복에는 비 비린내가 살짝 풍겼다.

 “누구세요?”

 “안녕하세요. 저는 앞집 2층에 사는 사람입니다.”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한 남자는 오래 알고 지낸 이웃처럼 스스럼없이 웃으며 자기소개를 했다. 우리 집에 왜?라는 의문의 표정을 읽기라도 한 듯 시키지도 않았는데 위대한 달변가처럼 구구절절 이야기를 꺼냈다. 묘하게도 멍하게 서 있는 나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모두가 쉬고 있는 일요일 아침에 일면식도 없는 집을 방문한 이유는 급히 일을 하러 가려는데 집사람이 아이를 데리고 친정에 가버려 출근할 차비가 없다는 사실이 주 요지였다. 많은 집중에 우리 집 문을 두드린 이유는 지나다니면서 몇 번 얼굴을 봤고 바로 앞집이라 양해를 구하기 쉽지 않을까 하는 부연설명도 기가 막히게 따라붙었다.

 “저녁에 집사람이 오면 갚겠습니다. 2만 원만 빌려주면  너무 감사하겠습니다.”

유난히 촉촉이 젖은 까만 두 눈으로 간절히 쳐다보며 부탁을 했다. 너무나 당당하게 금전차용을 요구하는 남자에게 최면이라도 걸린 걸까? 주머니에서 지폐 두 장을 꺼내 건넸다. 고맙다며 머리가 땅에 닿을 만큼 인사를 꾸벅하고 만원 지폐 두 장을 정확히 사등분으로 접어 소중하게 주머니에 넣고 빗속을 잰걸음으로 사라졌다. 신발에 톡톡 떨어지는 빗방울이 경쾌했다.

 방 안에 있다 밖의 소리를 듣고 나온 딸아이가 누구냐고 물었다. 대충 설명을 했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엄마는 바보냐며 속사포를 날렸다. 기가 막힌다고 한숨을 쉬었다.

 “엄마, 우리 앞집은 단층집이고 할아버지랑 할머니만 계신데 애기가 어디 있냐고요. 무슨 사기를 집까지 찾아와서 치는지 모르겠네. 그것도 몇만 원을.”

순간 현실로 돌아온 머릿속이 정리되었다. 매번 사람을 믿고 말을 믿어 당하면서도 돌아서면 또 고개를 끄덕이며 이번이 마지막이라 마음을 다잡는다. 그래 놓고 애들도 안 당하는 어리석은 일을 쉽게 당하고 만다.

조금만 생각하면 되는 일을 우습게도 딱 그때만 회로가 고장이 나는지 똑같은 일의 반복이다. 괜히 미안해 아이에게 뭔가 급한 일이 있어서 왔겠지 둘러댔다.

 여름 장맛비가 하염없이 내렸다. 우중충한 바람이 축축하게 불었다. 골다공증이 걸린 가슴에 군데군데 구멍이 숭숭 났다. 짧은 만남에 애처로운 생각이 가져온 결과물이 그리 좋지는 않지만, 커피 한잔을 마시며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남에게 돈 이야기를 하지 못할 어려움이 있는 사람이라 믿자.

생활이 어려워 천원이 아쉬웠던 시절에 절절했던 간절함을 알기에 내민 손에 작은 보탬을 주었다. 어쩌면 그 돈이 정말 차비가 되었을 수도 있고 아이의 과자나 우윳값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앞이 안 보이는 거센 비를 뚫고 수많은 집중에 우리 집 문을 두드린 인연은 하늘이 준 선물일 수도 있다. 혹시 그는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 인지도 모른다. 잠시 길을 잃어 하늘로 돌아갈 차비가 필요했던 천사. 별의별 생각에 잠겨 혼자 웃어보았다.

은은한 커피 향을 머금은 빗소리에 멀어져 가는 발자국을 기억해 본다. 부디 내 예상이 맞기를 바라며 창문을 닫는다. 아! 이 비는 언제쯤 그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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