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전 KDN 사보 | 연재 IT 칼럼
'내가 예전에는 말이지...'라고 시작하는 말 중에, 제법 많이 하는 말이 있다. 도서관에서 먹고살다시피 했고, 새벽에 일찌감치 자리 맡으려고 줄선 적도 많고, 자리도 못잡은 날은 여기저기 빈자리 찾아 메뚜기 하면서도 시험 하나는 끝내주게 잘 봤다. 하지만 요즘 이런 말 하면, 듣고 있는 젊은 세대들 코웃음을 치는 세상이다. 도서관에서 메뚜기를 할 수 없는 환경이 됐기 때문이다. 이유인즉, 휴대폰이나 PDA, 노트북을 통해 도서관의 자리를 미리 예약해둘 수도 있고, 빈자리를 확인할 수도 있으니 무식하게 시간버려가며 짐싸서 이동하는 메뚜기 스타일의 학구파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다. 그런데 이런 메뚜기 같은 유형이 뜻밖의 장소에서 빚어지기 시작했으니, 그들을 가리켜 또다른 신인류 플리퍼(flipper)족이라 부른다.
플리퍼족은 원래 리모콘을 손에 쥐고 수시로 채널을 바꿔가며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책이나 노트 등의 페이지를 한 장씩 넘긴다는 뜻의 영어단어 flip에서 유래한 말로, 성격이 급해진 현대인들이 TV를 시청하면서도 흥미를 잃거나 재미가 없다 싶을 때 가차없이 채널을 돌려버리는 습성을 표현하는 말이 되었다. 당신이라고 예외겠는가. 최근 케이블과 위성 TV는 플리퍼족들이 서식하기 딱 좋은 환경으로, 수십개에서 많게는 백여개에 이르는 채널을 골라먹듯이 쏙쏙 찍어볼 수 있어, 모르긴 해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 플러퍼족에 합류해 있을 것이다. 오죽하면, TV에 등장하는 프로그램 MC 들의 멘트에 너무도 자연스럽게 ‘채널고정’ 이라는 말이 나올까 싶다. 그뿐인가, 15초 안에 웃기거나 호기심을 자극하는 그 무엇이 없으면 냉정하기 그지 없는 시청자들은 즉시 리모콘으로 총성 한 방을 날려 바로 제껴버린다.
그런데 이 플리퍼족들이 이제 인터넷과 기타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 서서히 포진하기 시작하니 우리의 일상 전체에 플리퍼족 스타일이 자연스럽게 자리매김을 하게 되었다. 이른바 디지털 플리퍼족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한번 그들의 일상을 살펴보자. 인터넷으로 자료검색을 하더라도, 8초안에 해당 페이지가 뜨지 않으면 얄짤없이 그 페이지는 퇴장감이다. 그러니 다운받아보는 동영상이나 기타 자료의 속도가 덤하다면 이 역시 단칼에 내침을 당한다. 또 요즘 인기곡 수백곡을 다운받아 MP3 플레이어에 담더라도, 모든 수록곡을 차근차근 순서대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앞부분 전주부분, 혹은 첫소절만 듣고 바로 다음곡으로 넘어갈 정도라니 정말 호흡이 가빠지고, 자판기 앞에서고 그 잠깐을 못 기다려 손부터 넣었다가 손을 데는 일도 넘친다. 게임을 할 때도 한가지에 몰두해 즐기려는 성향보다는 여러 게임을 짧은 시간에 해치우는 경향이 있어, 더욱 자극적이고 선정적이고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류의 게임이 제조되는 것이다. 이런 디지털 플리퍼족의 스타일은 단순히 온라인에서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오프라인으로도 이어지기 마련이다. 사람을 만나고 유대관계를 갖는 사회 속에서 일회성으로 사람을 만나고, 자기 필요에 의해서만 찾게 되는 경향이 짙어짐으로써, 양으로는 풍성할지 모르나 질적으로는 아주 가볍고 덧없는 관계가 되고 만다.
신입사원 L씨는 자기가 맡은 업무에 필요한 선배나 동료를 먼저 파악해둔다. 그리고 어렵고 벅찬 일들은 자신의 사회경험 부족을 탓하며 뒤로 빼고, 완성도 높은 결과가 나오면 결국 그들과는 차갑고 낯설게 등을 돌린다. 스스로는 그런 자신을 일컫어 쿨한 사람이라며 칭찬까지 곁들인다. 플리퍼족다운 약삭빠름이다. 고루한 사고방식의 C부장, 밥 먹고 나서는 꼭 차 한잔을 해야 한다며, 커피 한잔은 후배에게 부탁한다. 그리고 한입 마시곤 다이어트 빙자해 또다른 후배사원에게 웰빙차를 한잔 부탁한다. 역시 한입 마시곤 싸늘하게 식으면 떫다면서 짜증을 내고 또다른 사원에게 시원한 물 한잔을 부탁한다. 이리하여 C 부장의 부하직원 모두, 차 나르는 일로 오후를 보낸다. 그놈의 미각까지 플리퍼족스럽다. 머리 나쁜 P대리는 회의 시간에 꼭 딴소리만 하다가 끝내놓고는, 시간마다 일거리를 순서도 없이 비중의 차이도 없이 하나씩 전달해주는 통에, 이 일 집적거리다 저 일 집적거리다 급기야 퇴근시간 무렵엔 당장 호통과 날벼락은 고스란히 후배 몫으로 돌아간다. 호흡이 짧은 플리퍼족은 기억력까지도 리모콘을 눌러 조절하는 모양이다.
극단적인 사례이긴 하지만, 이미 우리 모두는 어느 정도 플리퍼족에 발을 담그고 사는 중이다. 그것은 이미 우리의 주변 환경이 그렇게 변화했기 때문에 어쩔수없이 수용해햐 하는 결과다. 전문가들의 견해를 빌자면, 디지털 플리퍼족들은 넘쳐나는 정보 속에서 다 내것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작용하고 있고, 편리한 세상을 문화로 즐기기보다는 소비해야 하는 것으로 착각하기 때문에 빚어지는 현상이라고 한다. 이렇게 TV 리모콘을 시작으로 이미 깊숙하게 자리잡은 성향인만큼, 행동양식은 호흡이 짧고 이것저것에 산만한 관심을 보일지라도, 인간관계에 있어서만큼은 스스로 노력해야 할 것이다. 사람을 만날 때 목적을 가지고 만난 후 그 목적이 달성되면 뒤로 밀어버리는 식의 관계는 스스로를 수렁에 빠뜨리는 것이니, 한 명을 만나더라도 깊게 유대관계를 맺고, 메일이나 블로그 안부인사, 문자 메시지 같은 또다른 디지털 방식으로 극복하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실속있는 플리퍼족으로 디지털 시대를 지혜롭게 살아가자.
그렇다고 술도, 양주 한 모금, 와인 한 모금, 소주 한 모금, 맥주 한 모금도 모자라 구름과자 한 모금까지 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글 | 정윤희 (디지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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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내가 예전에는 말이지...라는 첫문장을 보고, 박장대소했다. 라떼는 말이지와 같지 않은가. 오래전 칼럼들의 내용이 사실 지금과 판박이인 것도 놀랍지만, 세대가 변해도 결국 시대의 속성은 달라지지 않는 것도 신기하다. 이 플리퍼족은 결국 지금 OTT의 썸네일을 이리저리 써핑하며 무슨 영화를 볼까 망설이는 일로 시간을 채우거나 영상을 1.5배속으로 즐기며, 도파민 중독으로 문화를 즐기는 MZ들인 셈이다. 디지털이 사람에게 끼치는 영향 중 역기능에 해당하는 것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