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글의 ‘마정방종’

by 이성규

常願身爲萬斛舟(상원신위만곡주)

많은 곡식을 싣는 배가 되기를 항상 원하지

中間寬處起柁樓(중간관처기타루)

배의 넓은 곳에 망루를 세우고

時來濟盡東南客(시래제진동남객)

때맞춰 각지로 가는 손님을 실어주고

日暮無心穩泛遊(일모무심온범유)

해가 저물면 무심히 물 위를 떠다니리


與守初(여수초) / 이항복


조선 중기의 문신 이항복이 청년 시절에 친구들과 함께 배를 기다리면서 지은 시다. 험한 세상에 곡식과 사람들을 건네주는 큰 배가 되고 싶다는 그의 생각은 이타주의의 표본이라 할 수 있다.


‘마정방종(摩頂放踵)’은 자기를 돌보지 아니하고 남을 위해 희생한다는 뜻의 고사성어이다. 원래 이 말은 중국 전국시대의 사상가인 묵자의 ‘겸애설’에서 비롯되었다. 모든 사람을 이롭게 해주어야 한다는 그의 겸애설은 극단적인 이타주의로 분류된다.


묵자는 전국시대의 정치 혼란과 사회악은 이타주의의 부재에서 비롯되었다고 단정했다. 때문에 청대 말의 사상가였던 양계초는 그를 ‘작은 예수’라고 일컫기도 했다.


19세기 프랑스의 철학자 오귀스트 콩트에 의해 처음 정의된 이타주의는 인간을 동물과 구별 짓는 특성 중 하나로 이해됐다. 약육강식이 판치는 냉혹한 정글의 세계에선 이처럼 인간적인 이타주의가 존재하지 않을 거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많은 동물들의 사례에서 이타주의가 확인됐다. 이에 대해 1964년 영국의 월리엄 해밀튼은 혈연관계에 있는 가까운 친족들을 돕는다는 ‘친족 이타주의’ 이론을 폈다. 과학자들은 이 같은 이타적 행동을 혈연선택으로 설명했다. 즉, 혈연으로 맺어진 구성원들이 집단을 영속시키기 위해 이타적 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몇 년 후 미국의 로버트 트라이버스는 혈연관계가 전혀 없는 개체 사이의 협동 사례를 들어 ‘상호 이타주의’ 이론을 발표했다. 서로 간의 호혜적 협동으로 설명되는 상호 이타주의의 대표적 사례는 사흘 밤만 피를 먹지 못해도 죽어버리는 흡혈박쥐이다.


밤마다 소나 말 같은 큰 동물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이 무시무시한 박쥐들은 피를 충분히 섭취하지 못한 동료에게 자신이 먹은 피를 게워내 나눠준다. 그 후 자신이 먹이를 발견하지 못했을 때는 도움을 준 상대에게서 똑같이 되돌려 받는다. 이 같은 행동은 친척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가까운 자리에 매달려 있던 이웃 사이에서도 행해진다.


흡혈박쥐들이 만약 이 같은 이타적 행동을 하지 않을 경우의 예상 수명은 3년에 불과하지만, 그들은 서로 피를 나눠 먹는 전통 덕분에 야생에서 15년 이상을 살기도 한다.


식물들 사이에서의 이타성도 보고되고 있다. 최초로 발견된 사례는 캐나다 오대호 주변에 서식하는 바다냉이란 식물이다. 배춧과에 속하는 이 식물은 다른 과의 식물과는 경쟁하지만, 같은 과의 식물과는 수분이나 영양분을 서로 나눠가지며 성장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또한 옥수수들도 형제 사이에서는 서로 영양분을 더 나눠 가진다는 사실이 미국 연구진에 의해 밝혀졌다.


앞으론 ‘인간적’이라는 단어의 반대되는 뜻으로 ‘동물적’이라는 말을 함부로 사용해선 안 될 것 같다. 또한 ‘정글의 법칙’ 앞에 붙는 ‘냉혹한’이라는 수식어도 사라져야 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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