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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과 손글씨

by 이성규

雲牋闊展醉吟遲(운전활전취음지)

흰 종이 펼쳐놓고 취기에 시를 못 짓다가

草樹陰濃雨滴時(초수음농우적시)

수풀이 잔뜩 흐려 빗방울 떨어질 때

起把如椽盈握筆(기파여연영악필)

서까래 같은 붓을 손에 움켜쥐고

沛然揮洒墨淋漓(패연휘쇄묵림리)

장쾌히 휘두르니 먹물이 흥건히 스미네


不亦快哉行(불역쾌재행) 중에서 / 정약용


취중의 오랜 고민 끝에 일필휘지로 붓글씨를 써내려가는 정약용 선생의 모습을 상상하니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그런데 요즘 세대엔 이런 즐거움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A라는 중학생은 중간고사 성적표를 받아본 뒤 교무실로 향했다. 만점이라고 생각했던 영어에서 한 문제가 틀린 것으로 표시돼 있었기 때문이다. 선생님께 직접 확인해본 결과 자신이 쓴 알파벳 ‘C’가 선생님에게는 ‘2’로 보여서 감점 처리된 것으로 드러났다.

당장은 A가 억울할 수도 있겠지만, 악필을 오답으로 처리한 그 선생님의 훌륭하신 의도는 A의 성장에 큰 도움이 되리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요즘 악필 때문에 고생하는 애들이 많은 이유는 손글씨를 잘 쓰지 않기 때문이다. 수업 시간엔 선생님들이 요점을 프린트물로 나눠주고, 어쩌다 해가는 수행평가도 컴퓨터로 작성해 제출한다. 또 친구들과 주고받는 쪽지도 스마트폰을 사용하다보니 손글씨를 쓸 일이 거의 없다.


컴퓨터 자판에 더 익숙한 요즘 아이들은 손글씨를 쓰는 것에 대해 거부 반응을 보인다. 초등학생들이 일기를 쓰기 싫어하는 가장 큰 이유는 글씨를 직접 쓰기 싫어서라고 하며, 대학생들조차 손글씨로 리포트를 써오라고 하면 부담스러워 한다.

대다수 학부모들이 자녀가 취학 전에 한글을 깨우치도록 가르치지만 올바른 글쓰기를 지도하는 이는 거의 없다.


그럼 손글씨와 컴퓨터 자판 중 작문에 유리한 필기법은 과연 무엇일까. 작문 발달과 작문 장애를 연구하는 미국 워싱턴주립대 버지니아 버닝거 교수는 실제로 이에 대한 실험을 진행한 적이 있다.

200여 명의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펜과 컴퓨터 자판을 이용해 주어진 주제로 10분 동안 에세이를 쓰게 한 것. 그 결과 대부분의 아이들은 컴퓨터 자판보다 펜을 이용해 손글씨를 쓸 때 더 빨리, 그리고 더 긴 분량의 에세이를 작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손글씨의 장점은 이뿐만이 아니다. 인디애나대학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손글씨를 쓸 경우 컴퓨터 자판으로 문장을 작성할 때보다 뇌의 활성화가 잘 되어 자신이 쓴 내용을 더 잘 기억한다고 한다.

손글씨의 감소 추세는 비단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다. 미국의 대다수 학교에서는 부모 세대가 사용했던 영어 필기체 글쓰기 교육을 더 이상 하지 않고 있으며, 필기체로 쓴 글씨는 유행에 뒤떨어지는 것으로 여기는 경향조차 있다고 한다.

또한 영국의 한 인쇄업체가 실시한 조사 결과에 의하면, 영국인의 1/3은 자신이 직접 쓴 손글씨조차 제대로 읽지 못한다는 것.

영어 디지털(Digital)은 ‘손가락’을 뜻하는 라틴어 ‘디지투스(digitus)’에서 유래했다. 그런데 디지털 문명으로 인해 손글씨가 사라져가고 있으니 참 아이러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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