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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성규 Oct 15. 2024

CCTV에 찍힌 지하철 패륜녀

4월의 첫째 월요일, 나는 무작정 집을 나선다.

 

연구소를 그만두고 과학 칼럼니스트와 과학 저술가가 된 나의 일상은 매우 단순하다. 보통 작가들은 모두가 잠든 밤에 글을 쓰는 경우가 많지만, 나는 연구소에 다닐 때의 업무 시간에 맞춰서 일을 시작하고 끝낸다. 오전에는 원고를 쓸 자료를 수집해 정리하고, 오후에는 원고를 쓴다. 그러다 소울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저녁식사를 준비해서 함께 밥을 먹은 후 밤에 간단한 산책과 운동을 하고 TV 뉴스를 본다.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는 그렇게 원고와 칼럼 쓰는 일에 집중하고, 주말엔 아내가 있는 요양병원에 가거나 소울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곤 했다. 때문에 평일 낮의 외출은 나에게 있어서 무척 생소하다.


지하철을 탈 때까지 갈 곳을 정하지 못한 나는 문득 종로구 신문로의 주택가에 있는 한 미술관을 떠올린다. 도심 한가운데에 있으면서도 야트막한 산자락에 자리 잡은 덕분에 꽤 널따란 숲이 있는 그 미술관은 아내와 내가 첫 데이트를 한 곳이다.


지금 그 미술관에서 무슨 전시회가 열리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평일 낮에 갈 목적지가 생겼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다. 중년의 남자가 혼자 다녀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장소이기도 하다.


오래된 기억의 흔적을 더듬으며 찾아간 미술관 전시실의 벽에는 큰 카메라를 든 채 허공을 멍한 표정으로 응시하고 있는 여인의 사진이 걸려 있다. 현수막에 적힌 문구를 읽어 보니 비비안 마이어라는 미국 사진가의 전시회다.


미술관에서는 다른 전시회도 열리고 있지만, 나는 처음 듣는 여성 사진가의 전시실 속으로 빨려들어 가듯 입장한다. 비비안 마이어의 초점 없는 눈동자가 요즘 아내의 표정과 너무나 흡사했으므로.


전시실 입구에 적힌 작가 소개글을 읽어 본다. 보모로 생계를 유지하며 수십 만 장의 사진을 찍은 이 여성은 자신의 사진을 평생 동안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다고 한다.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도 없었으며 속내를 떨어놓을 수 있는 친한 친구도 없었다. 괴팍하고 고집이 세고 지적이었던 그녀가 세상과 소통한 유일한 창구는 바로 사진이었다.

 

수수께끼 같은 이 여성의 사진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계기 또한 매우 드라마틱하다. 시카고의 역사 보존과 관련해 글을 쓰던 어떤 작가가 지역의 옛날 사진을 찾기 위해 노력하던 중 우연히 임대료를 내지 못해 경매에 나온 창고를 통째로 낙찰 받았던 것.

 

그런데 창고의 물품 속에서 비비안 마이어의 네거티브 필름들이 발견됐다. 그는 무명 사진가의 작품을 인터넷에 올린 후 반응이 좋자 전시회를 추진했으며, 전시회마다 흥행에 성공해 전 세계 순회전시로 이어졌다.

 

나는 전시관의 영상실에서 비비안 마이어의 일대기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보며 문득 지금도 내 책상 위의 투명한 사육통 안에서 홀로 기어 다니고 있을 달달이를 떠올린다. 달달이에게 카메라를 쥐여 주면 비비안 마이어처럼 싫증내지 않고 매일 사진을 찍을 수 있을까. 마치 먹이의 색깔에 맞춰 매일 다르게 배출하는 색색의 똥처럼 말이다.


전시회 구경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지하철을 탈 때까지만 해도 내가 끔찍한 사건에 휘말리게 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나이도 많이 쳐 먹은 새끼가 지하철을 왜 탔어? 돈이 없으니까 타고 다닐 자가용도 없지?”

 

소리가 난 곳은 내가 앉은 좌석으로부터 우측으로 2미터쯤 떨어진 곳의 맞은편 좌석이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80대로 보이는 할아버지와 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성이 서로 대치하고 있다. 방금 그 말을 쏟아낸 이는 노인이 아니라 비교적 곱상한 생김새의 젊은 여성이다.


평화로운 오후의 지하철 안에서 소낙비처럼 갑자기 쏟아진 험한 말에 전동차에 탑승하고 있던 승객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곳으로 집중된다. 마치 사열하는 지휘관을 바라보는 병사들의 눈동자처럼. 순간 지하철 안에 정적이 흐른다.


“내가 다리가 좀 불편해서 그래요. 젊은 분이 이해를 좀 해줘요.”


“다리가 불편하면 택시를 쳐 타던지. 경로석은 왜 있어? 여기 모든 자리가 너 같은 늙은이들 앉으라고 만들어 놓은 줄 알아?”


여자는 분이 풀리지 않은지 소리를 지르며 계속 험한 말을 내뱉는다. 상황을 미루어 짐작컨대 빈자리가 나서 여자가 앉으려는데 노인이 그보다 먼저 자리를 차지하면서 비롯된 다툼인 듯하다. 노인은 어쩔 줄 몰라 주위의 승객들에게 도움의 손길이라도 청하는 듯 전동차 안을 이리저리 두리번거린다.

 

그러나 노인의 눈길이 향하는 곳마다 지휘관을 바라보던 시선들이 하나둘씩 제자리를 찾아갈 뿐이다. 흠흠, 헛기침을 하는 소리와 쯧쯧, 혀를 차는 소리만 나지막이 전동차 안에 맴돈다.

 

“어르신, 여기 제자리에 앉으세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 봉변을 당하고 있는 노인을 향해 손짓으로 내 자리를 가리킨다. 노인은 잠시 망설이다 내 자리로 옮겨 앉는다.

 

분명 평소의 나답지 않은 행동이다. 나는 남의 일에 끼어들거나 참견하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편이다. 그런데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노인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만약 이런 상황에 맞닥뜨린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기 때문이다.


나에게 향하는 승객들의 시선을 뒤로 한 채 나는 무심한 표정으로 시커멓게 이어지는 차창을 바라보며 서 있다. 바로 그때 상상조차 하기 싫은 사달이 나고야 만다.

 

“아이고, 정의의 사도 나셨네. 아저씨가 뭔데 나서고 지랄이야?”


뒤를 돌아보니 노인에게 욕설을 내뱉던 여자가 이번엔 나를 향해 삿대질을 하고 있다. 내 자리에 앉은 노인의 난처한 표정과 승객들의 호기심 섞인 시선들이 뒤섞여 나에게 달려든다. 대꾸를 하면 여자가 더 흥분할까봐 나는 등을 돌린 채 가만히 서 있는다. 그러자 둔탁한 소리와 함께 뒷덜미에 큰 충격이 가해진다.


“야! 이 새끼야. 내 말이 안 들려? 너도 귀 먹었냐?”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와 함께 여자는 어깨에 메고 있던 숄더백으로 나에게 두 번째 공격을 가해 온다. 나는 살짝 피하며 여자의 숄더백을 손으로 잡는다. 내게 숄더백을 잡혀서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게 된 여자는 더욱 발악한다.


“이 손 못 놔? 더러운 손 놓으라고 이 새끼야.”


여자는 숄더백을 잡지 않은 다른 손으로 내 얼굴을 할퀸다. 맞대응을 했다간 자칫 일이 커질 것 같아 나는 잠자코 숄더백만 잡고 있다.

 

“내 남친이 검사야.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알아. 내가 너 인생 종 치게 해줄게.”


여자가 이번엔 휴대폰으로 내 머리를 가격하기 시작한다. 숄더백을 잡지 않은 한 손으로 막아 보지만 마구잡이로 휘둘러 대는 여자의 공격엔 속수무책이다. 미지근한 액체가 이마를 타고 흘러내린다.

 

피까지 흘리면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내 처량한 모습을 보다 못한 승객들이 하나둘씩 나서기 시작한다. 남성 둘이 다가와서 휴대폰으로 더 이상 나를 내려치지 못하도록 여자를 제압한다.

 

“젊은 여자가 너무하네.”


“애비 에미도 없이 자랐나.”


다른 승객들도 한 마디씩 거든다. 남성들에게 양손을 제압당했지만 여자도 호락호락하지 않다. 들고 있던 숄더백과 휴대폰을 바닥에 내팽개치더니 온몸을 비틀며 고함을 지른다.

 

“야, 내 몸에 손댔냐? 너희들 모두 성폭행범으로 감방 가고 싶어?”


여자의 발악에 나를 거들어주던 남자들도 지쳐갈 즈음 지하철 문이 열리며 경찰이 탑승한다. 내가 여자과 다툼을 벌인 후 세 번째 전철역에 정차했을 때다. 그새 누군가가 신고를 한 모양이다.


“모두 일단 내리세요. 내린 다음에 말씀 들을게요.”


시비가 붙은 당사자들을 확인한 경찰은 여자와 나 그리고 여자를 말리던 남성 두 명을 지하철에서 내리게 한다.

 

“제 손목 좀 보세요. 이 분들이 꽉 잡아서 여기 자국이 생겼어요. 그 때문에 제가 휴대폰을 놓쳐서 다 망가졌어요.”


여자는 의외로 경찰 앞에서 고분고분하다. 목격자이자 사건 당사자이기도 한 남성들의 증언이 없었다면 내가 꼼짝없이 성폭행범으로 몰릴 판이었다. 경찰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한 나는 근처의 병원에 들러 상처를 치료했다. 피는 꽤 흘렸으나 상처가 깊지 않아 간단한 치료를 받은 후 귀가할 수 있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저녁 식사를 마친 후 텔레비전을 켠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소울이가 떠난 후 이렇게 밥 한 그릇을 후딱 비우고 텔레비전을 보는 것은 처음이다. 아니, 아내가 그렇게 되고 난 이후 이처럼 식사를 맛있게 하고 티브이 뉴스를 마음 편히 보는 게 처음인 듯하다.


하지만 그 같은 평화는 곧 깨어지고 만다. 앵커가 소개하는 뉴스 화면이 ‘지하철 패륜녀’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조금 분노를 유발하는 소식 하나 전해드리겠습니다.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서 확산된 영상인데요, 이 영상 속의 상황은 오늘 오후 지하철 5호선 전동차 내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젊은 여성이 노인에게 욕설을 퍼붓고 있는 장면이 보입니다. 그때 한 남성이 일어나 노인을 자기 자리로 옮겨 앉게 하자 여성이 이번엔 그 남성에게 시비를 겁니다. 여성은 남성에게 들고 있던 가방과 휴대폰으로 마구 폭행을 가합니다. 남성은 한 손으로 가방을 막고 다른 손으로 휴대폰을 막아보려 하지만 머리에서 피가 흘러내릴 정도로 심한 폭행을 당합니다.”


텔레비전 화면 속의 내 얼굴에는 피가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흘러내리고 있다.

 

“20대로 보이는 이 여성은 80대 노인에게 ‘나이도 많이 먹었는데 지하철은 왜 탔냐? 인간 같지도 않은 놈들은 죽어야 한다’고 막말을 했으며 이를 말리던 남성에게는 ‘나 검사 백 있다. 너 인생 종치게 해줄게’라고 말하면서 폭행을 가했다고 합니다. ‘지하철 패륜녀’라는 제목의 이 영상으로 인해 국민들의 공분이 확산되자 경찰은 이 여성을 특수상해 혐의로 입건해 조사할 예정이라고 밝혔습니다.”


1인 미디어와 온라인 커뮤니티가 아무리 발전했다고 하지만, 조금 전에 내가 당한 일이 이처럼 뉴스를 통해 생생하게 보도될 줄 몰랐다.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확산된 영상의 출처를 찾아보기 위해 컴퓨터를 켜서 인터넷을 검색한다.


그 영상은 이미 유튜브에도 여러 개 올라와 있다. 내가 폭행을 당할 때 주변 승객 몇 분이 휴대폰으로 촬영하고 있었으며, 그중 어떤 분은 명함을 주면 이메일 주소로 자신이 촬영한 영상을 나에게 보내주겠다고까지 했다. 경찰 조사에서 증거로 활용하라는 의미였다.


TV 뉴스에서 방송된 영상은 이 동영상들 중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촬영한 영상인 것 같다. 그런데 유튜브에 올라온 동영상들 중에 이상한 영상이 하나 있다.

 

다른 영상들은 모두 수평적 시선으로 촬영됐지만 그 영상은 위에서 약간 아래로 내려다보는 수직적 시선으로 촬영되어 있었던 것. 또한 수평적 시선으로 촬영된 영상들은 약간의 흔들림이나 움직임이 있으나, 그 영상은 처음부터 끝까지 화면이 고정되어 있다. 전동차 내에 설치된 CCTV로 촬영된 영상임이 틀림없다.


영상은 노인과 여성이 자리다툼을 한 사건의 발단부터 경찰이 와서 사건 당사자들을 지하철에서 모두 내리게 할 때까지의 상황들을 정확히 담고 있다. 다른 영상들과 마찬가지로 이 동영상에도 댓글이 많이 달려 있다.


‘저 여자 신상 털기 가야 합니다.’


‘용기 내서 노인 구해준 대가가 폭행이라니.’


‘그래도 아직 살만한 세상입니다. 자기 일처럼 나선 분들 모두에게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중에서 이상한 문구 하나가 내 시선을 끈다.


‘육신이 죽으면 영혼은 몸을 떠나 물고기나 새, 심지어 관목 숲 등에서 다른 집을 찾는다. 그럼 현대인의 영혼이 기거하기 좋은 장소는 어디일까. 색깔도 소리도 무게도 없는 이곳이 이처럼 편안할 줄이야.’


물론 댓글의 특성상 사건과 전혀 관련이 없는 내용도 있기 마련이다. 또한 자기만의 독특한 시선으로 사건을 바라보는 댓글도 있다. 이 동영상에도 젠더와 노소 갈등을 부추기는 댓글, 나를 폭행한 여성의 외모를 칭찬하는 댓글, 특정 민족이나 국가를 비하하는 댓글 등이 달려 있다.


그럼에도 사건의 내용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그 문구가 유독 내 시선을 사로잡은 까닭은 어디선가 분명 본 듯한 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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