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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성규 Oct 15. 2024

슬픔에 모양이 있다면

여태껏 내가 본 아내의 가장 슬픈 모습은 3년 전 병실의 침대에서 지은 표정이다. 대학병원에서 요양병원으로 옮긴 직후 간병인이 잠시 자리를 비운 어느 날 나는 목구멍에서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는 아내를 위해 의료용 흡입기로 가래를 제거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편히 숨을 쉴 수 있게 된 아내와 눈이 마주쳤고, 아내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찰라 같은 순간이었긴 해도 분명 나는 아내의 눈동자에서 말로 표현하지 못할 만큼 가득 담긴 슬픔을 읽었다.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지만 펑펑 우는 것보다 몇 배나 더한 슬픔을 그날 나는 아내의 눈빛에서 느꼈다.

 

아내는 식물인간이다. 의식이 없어서 다른 사람과 어떠한 소통도 할 수 없고 운동기능도 상실했다. 그러나 뇌간은 살아 있어서 호흡과 소화 등은 자발적으로 가능하다. 말하지 못하고 움직이지 못하니 식물 같다고 해서 아내와 같은 상태의 환자를 식물인간이라 부른다.


그러나 실상은 식물에 비할 수 없이 삶의 질이 낮다. 식물은 움직이지만 못할 뿐이지 의식이 있다. 냄새로써 혹은 뿌리에서 내뿜는 화합물을 통해 의사소통을 하며, 친인척끼리는 서로 돕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살랑거리는 바람과 햇살을 느끼고, 나비와 벌을 불러들여 자손을 번식시킬 수 있다. 하지만 아내는 숨을 쉬고 눈만 끔뻑일 뿐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아내가 그렇게 된 건 교통사고 때문이다. 아내가 일하는 자연사박물관에서의 박제 작업은 주로 로드킬 등의 사고로 죽은 동물을 활용해 이루어진다. 사고를 당하던 날, 아내는 내게 전화를 해 양주까지 급히 출장을 다녀와야 하니 저녁식사는 소울이와 먼저 하라고 말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날 아내는 양주의 야생동물구조센터에서 로드킬 당한 산양을 데려오기 위해 길을 나선 것이었다. 보지 않아도 뻔했다. 천연기념물인 산양을 박제할 기회를 잡은 아내는 만사를 제쳐놓고 달려갔을 게다. 하지만 아내는 산양을 인수한 후 돌아오다가 반대 차선에서 갑작스레 중앙선을 침범한 고급 승용차와 충돌하는 사고를 당했다. 로드킬 당한 동물을 얻으려다 자신이 로드킬 당할 뻔한 것이다.


아내가 교통사고로 의식을 잃고 병원에 실려 갔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만 해도 나는 아내가 당연히 깨어날 줄 알았다. 외상은 거의 없다는 말을 경찰로부터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내는 깨어나지 않았고, 결국 식물인간 진단을 받았다. 사라 바트만처럼 아내는 병원의 침대에 박제되고 만 셈이다.

 

“안녕, 서연빈 씨. 오늘 하늘 색깔이 마치 가을처럼 푸르러. 한 번 봐봐.”


침대에 연결된 리모컨으로 병실 창 너머가 잘 보이게끔 상체를 일으켜 주어도, 아내는 항상 초점이 없는 눈동자로 허공만 바라본다. 지금 아내의 상태는 마치 잠이 들었을 때 뇌의 네트워크가 잠시 끊어져 있는 상황과 비슷하다. 우리는 잠에서 깰 때 끊어져 있던 네트워크가 다시 연결되지만 아내의 뇌는 그렇지 않다. 아내도 잠을 자고 깨어나지만 뇌는 깨어나지 않는다. 아내의 뇌는 그 누구도 살지 않는 빈집처럼 텅텅 비어 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식물인간의 뇌가 비어 있는 것은 아니다. 식물인간 중 10~30퍼센트는 숨겨진 의식을 지니고 있다. 단지 그것을 외부로 표출하지 못할 뿐이다.


전기 펄스로 뇌를 자극하면 의식이 있는 정상인의 뇌는 메아리처럼 나타나는 전기 활동이 매우 복잡한 패턴을 보이며 울려 퍼지게 된다. 이에 비해 의식이 없는 뇌에 전기 펄스를 가하면 메아리가 매우 단순한 패턴을 보인다. 마치 고요한 호수에 돌을 던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식물인간 상태의 환자들에게 전기 펄스로 뇌를 자극한 결과, 그중 몇몇 환자에게서는 마치 의식이 있는 것처럼 복잡한 메아리가 울려 퍼진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즉, 식물인간에게도 은밀하게 숨겨진 의식이 있다는 의미다.


식물인간에게 말을 건네거나 영화를 보여주며 뇌 활성을 기능성자기공명영상으로 모니터링 한 결과, 몇 명은 정상인과 유사한 패턴이 나타났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신체 조직 중 가장 복잡한 구조를 지닌 뇌는 다른 기관에 비해 10배나 많은 에너지를 소비한다. 그만큼 하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식과 운동기능이 상실된 식물인간의 뇌도 에너지 소비가 약 절반으로만 감소할 뿐 다른 기관에 비해 여전히 많은 에너지를 사용한다. 그 이유는 아직까지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볼 땐 숨겨진 의식과 관련이 있을 것 같다.

 

아내도 그 같은 숨겨진 의식을 지니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끔찍하다. 모든 것을 보고 듣고 알고 있는데도 표현하지 못하는 것만큼 괴로운 것은 없을 테니 말이다.

 

정상인의 의식이란 것도 사실은 시각과 청각, 촉각 같은 감각을 통해 받아들인 정보를 캄캄한 두개골 속에 갇혀 있는 뇌가 마음대로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하다. 그럼 호수처럼 잔잔해진 아내의 뇌는 지금 어떤 환상을 빚어내고 있을까.


‘연빈아. 오늘 생일인데 무슨 선물을 갖고 싶어? 아, 물론 비밀이겠지. 자기가 갖고 싶은 선물은 미리 알려주는 게 아니라 상대방이 몰래 사왔을 때 감동이 더 커진다는 게 당신의 평소 지론이잖아. 그런데 이번 선물은 뭘 준비해야 할지 정말 생각이 안 나. 당신이 힌트 좀 줄래?’


2주 전 아내의 생일 때 아내의 휴대폰으로 보낸 메시지 내용이다. 그날은 소울이가 떠나기 이틀 전이다. 그날 오전에 메시지 알림음이 울려서 휴대폰을 보니 3년 전에 찍은 12장의 사진이 도착했다고 되어 있었다.


메시지와 연결된 웹페이지 주소로 들어가니 사고를 당하기 전 아내의 생일에 찍은 사진들이 음악과 함께 슬라이드 식으로 재생되었다. 그날 아내와 소울이와 나는 사진관에서 모처럼 기념사진을 찍고 동네에 새로 생긴 스테이크 집에 갔다.

 

식탁 옆의 벽에 걸어둔 가족사진이 바로 그때 찍은 사진이다. 그날 사진관에 들어가는 모습과 식사를 하는 모습을 내가 휴대폰으로 찍은 사진들이 클라우드에서 자동으로 전송돼 3년 만에 다시 추억의 메시지로 온 것이다.


그 사진들 속에서 아내의 눈은 초롱초롱하고 입가엔 다정한 미소가 묻어 있다. 중학교 1학년이 막 된 소울이의 얼굴엔 초등학생의 장난기 많은 티가 그대로 남아 있다. 불과 3년 전인데 까마득한 옛날처럼 느껴지는 사진들이다. 그날 나는 그 사진들을 모두 아내에게 다시 메시지로 보냈다.

 

그날뿐만 아니라 나는 아내에게 메시지를 자주 보낸다. 원고를 쓰다가 잠시 쉴 때에, 혼자 점심 식사를 한 후에, 혹은 비가 오거나 날씨가 너무 좋을 때 아내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물론 아내는 그 메시지를 볼 수 없다.

 

하지만 아내는 그 메시지를 들을 수 있다. 병실에 갔을 때 내가 침대맡 탁자 서랍 속에 넣어둔 아내의 휴대폰을 꺼내 그대로 읽어주기 때문이다.

 

“연빈아. 이날 기억나? 이때만 해도 우리 소울이 참 어렸지. 이런 아기가 해킹 대회에 나가서 상을 받아 왔을 때 당신의 그 뿌듯해하던 표정이란.”


나는 아내의 3년 전 생일 때 찍은 사진을 아내의 휴대폰 메신저로 보여준다. 물론 아내의 뇌는 소울이의 그때 얼굴밖에 기억하지 못한다. 아내는 그로부터 두 달 후에 사고를 당했으므로.

 

“연빈아. 장모님이 우리집에서 처음 주무신 날 기억나? 소울이와 헤어지기 싫어서 장인어른이 기다리시는 데도 가지 않으셨잖아. 그 다음날 처남이 데리러 안 왔으면 하룻밤 더 주무셨을지도 몰라.”


먼 산을 바라보며 눈만 끔벅이는 아내에게 나는 메신저 내용을 읽어주며 가족과의 추억에 대해 자주 이야기한다. 가족과의 따뜻한 추억을 들려주는 것이 잠들어 있는 뇌를 깨우는 열쇠가 될 수 있다는 외국의 한 연구결과를 보았기 때문이다.


아내는 내가 들려주는 이야기들 중 딱 한 번 눈동자의 초점을 내게 맞춘 적이 있다.


“털코뿔소의 멸종 이유가 기후변화로 인해 당시에 갑자기 상승한 온도 때문일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어. 털코뿔소의 DNA를 분석한 결과 멸종할 무렵 기온이 급속히 상승했다는 사실이 밝혀졌거든.”


박제사로서 아내의 꿈은 털코뿔소의 복원시킨 형상을 박제처럼 만드는 것이었다. 아내가 수많은 멸종동물 중 털코뿔소에 특히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는 딱 하나다. 지금은 아프리카나 열대지방에만 서식하는 코뿔소의 사촌인 털코뿔소가 아주 오래 전에는 한반도에서도 서식했다는 증거가 발견됐기 때문이다.


멸종은 죽음만큼 외롭고 슬프다. 아니 죽음보다 더한 외로움과 슬픔이다. 죽음은 그 종의 번성을 위한 생명체의 선택이지만, 멸종은 그 종 자체가 죽음을 맞는다. 아내는 털코뿔소의 그런 외로움과 슬픔을 박제에 담아내고 싶었을까.

 

외로움과 슬픔에 모양이 있다면 아내는 그것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상태에 처해 있는지도 모른다. 아내가 지금 바라보고 있는 외로움과 슬픔은 형상일까 색감일까, 아니면 그저 천천히 지나가는 흐름이나 고임 같은 것일까.

 

그런데 보라매날다는 어떻게 아내가 식물인간임을 알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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