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신이 죽으면 영혼은 몸을 떠나 물고기나 새, 심지어 관목 숲 등에서 다른 집을 찾는다.’
그렇다. 이 문구는 분명 내가 예전에 읽었던 책에 나와 있던 내용이 틀림없다. 많은 책을 읽었지만 이 문구가 특별히 기억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예전에 시간이 날 때마다 자주 끄적이던 전자일기장을 떠올린다.
내가 20대 후반일 때 우리나라의 한 대학생이 개발한 ‘발자국 99’라는 전자일기장이다. 당시에는 혁신적인 제품이었지만, 수많은 디지털 기기의 등장으로 요즘에는 그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는 전자일기장의 흔적을 들쳐보기로 한다. 그러고 보니 전자일기장에 글을 쓴 지 꽤 오래 된 것 같다.
압축 해제와 특정 파일의 실행 등 약간의 윈도우 버전 변경 절차를 거치니 발자국 99는 이상 없이 실행된다. 비밀번호를 입력한 후 일기장 전부보기 메뉴를 클릭한다. 그러자 마치 어릴 적 화장실 벽에 했던 우스꽝스런 낙서처럼 예전에 내가 썼던 일기들이 줄줄이 검색된다. 오래된 그 화장실 벽은 무너지지 않은 채 아직도 그 장소에 굳건히 서 있다.
목록을 살펴보니 내가 그 벽에 가장 많이 낙서를 했던 시기는 2000년대 초반이다. 아내와 연애를 하던 시기여서인지 감상적인 글이 무척 많다. 아내와 만나 식사를 하고 카페에 가서 나눈 얘기 등이 꽤 상세하게 적혀 있다.
실험을 하면서 내가 느낀 점, 독서를 하다 기억에 남는 문구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석 등을 적은 글도 눈에 띈다. 유튜브에 댓글로 달려 있던 문구는 2003년 12월에 적은 일기 내용으로서, ‘영혼의 해부’라는 책의 내용 중 한 구절이다.
‘그럼 현대인의 영혼이 기거하기 좋은 장소는 어디일까’라는 문구는 ‘육신이 죽으면 영혼은 몸을 떠나 물고기나 새, 심지어 관목 숲 등에서 다른 집을 찾는다.’라는 구절에 대한 나의 감상평이다. 별로 유명하지 않은 책의 인용 문구와 나의 감상평까지 정확히 일치한 댓글을 누군가가 올린 것이다. 그 댓글의 마지막 문구인 ‘색깔도 소리도 무게도 없는 이곳이 이처럼 편안할 줄이야’라는 말은 도대체 무슨 뜻일까?
화장실 벽의 낙서는 3년 전을 끝으로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마지막 일기가 적힌 날짜를 어림잡아 계산해보니 교통사고로 의식을 잃은 아내가 식물인간 판정을 받은 무렵이다. 아내가 부재했던 세월의 흔적을 더듬으며 나는 마우스를 클릭해 그날의 일기를 연다. 그런데 일기 속의 한 문구를 읽는 순간 뇌리에 번개가 스치듯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다.
‘연빈이는 마치 자신을 침대 위에 박제시킨 듯하다. 이제 나의 사랑도 박제시켜야 할까.’
그 문장은 보라매날다가 처음으로 내게 보내온 메시지의 내용과 거의 일치한다. 이 문장을 읽지 않고서는 그런 메시지를 보낼 수 없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보라매날다가 단풍이야기의 채팅 창을 통해 내게 보내온 메시지는 ‘연빈이가 깨어난다면 박제된 사랑도 다시 시작되겠죠’이다. 여기서 중복되는 말은 연빈, 박제, 사랑의 세 단어뿐이다.
박제와 사랑은 일반명사라서 누구나 사용할 수 있다고 쳐도, 고유명사인 연빈은 누구나 다, 흔히 사용할 수 있는 단어가 아니다. 동일한 단어의 사용보다 더 의심스러운 건 문장 전체에 깃들어 있는 내 특별한 상황과의 일치성이다.
사실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단어와 문장과 말은 전체 구성원 간의 약속에 기반한 일반성의 기호일 뿐이다. 그런데 그 일반성을 특수성으로 바꾸는 건 특별한 상황이다. 누구나 아는 일반적인 단어를 사용한 문장이어도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배치시키느냐에 따라 특별한 문장으로 탄생할 수 있다. 보라매날다는 어떻게 그런 특별한 문장을 조합할 수 있었던 걸까.
“매형, 저예요. 몸은 좀 괜찮으세요?”
처남이 전화를 해온 건 지하철 패륜녀 사건이 벌어진 지 사흘 뒤다. 뉴스에 보도되고 그 사건의 동영상이 온라인에 널리 퍼지고 난 후 전화를 수없이 받았다. 내 얼굴이 모자이크 처리되었지만 지인들은 나를 용케 알아봤다. 친구들을 비롯해 전 직장동료와 출판사 담당자들, 심지어 시골에 계시는 친척 어르신들까지 연락을 해왔던 것이다. 저 영상 속의 남자가 혹시 너 아니냐고.
그럴 때마다 나는 뚝 잡아뗐다. 나도 깜짝 놀랐다고, 내 모습과 너무 닮아서……. 내가 요즘 외출할 경황이 어디 있냐는 말까지 덧붙이면 대부분은 그 말에 수긍하면서 전화를 끊곤 했다. 하지만 처남에게만은 그런 거짓말을 할 수 없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잠시 망설이는 내게 다음과 같은 말을 늘어놓았기 때문이다.
“그 사건 저한테 넘어왔어요. 매형이 지하철에서 당한 그 사건요.”
“아니, 처남 부서에서 그런 사건도 조사해?”
해킹과 관련된 사이버 사건을 전담하는 처남이 지하철에서 일어난 사소한 폭행 사건을 맡았다니 의아할 수밖에 없다.
“물론 폭행 부분은 사건이 발생한 지역의 관할 경찰서에서 조사하고 있는데요, 제가 맡은 부분은 좀 다른 거예요.”
“그게 무슨 말이야? 폭행 말고 다른 부분도 조사할 게 있어?”
“이상한 게 좀 있어서요. 혹시 매형도 유튜브에 올라온 동영상들을 보셨어요?”
“뉴스에도 나오고 해서 나도 좀 찾아봤지.”
“그럼 보셨을 수도 있겠네요. 동영상 대부분은 주위 승객들이 휴대폰으로 촬영한 건데요, 그중 하나는 지하철 전동차 내의 CCTV로 찍힌 게 있어요.”
처남이 말하는 건 이상한 댓글이 달린 동영상임이 틀림없다. 사람들의 시선 위에서 흔들림 없이 찍힌 그 동영상은 누가 봐도 CCTV 화면이었으니까. 내가 예전에 쓴 전자일기장의 내용을 떠올리며 나는 조심스레 처남에게 묻는다.
“그 동영상이 왜? 혹시 어떤 문제라도 있는 거야?”
“동영상 자체는 문제가 없는데, 유출 경위가 좀 이상해서요.”
“유출 경위라니? 누가 일부러 퍼뜨리기라도 했다는 뜻이야?”
“네. 그걸 누가 유출했는지, 어떤 경로를 통해 유출되었는지를 제가 조사하는 거예요.”
그 후 이어진 처남의 말을 간단히 요약해보면, 전동차에 달린 CCTV의 영상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곳은 해당 열차의 기관실과 지하철종합관제소뿐이다. 전동차 내의 비상인터폰이 작동되거나 범죄 신고가 들어오면 기관사나 지하철종합관제소에서 CCTV를 통해 열차 내부 상황을 파악한 다음 경찰을 출동시키는 등의 필요한 조치를 취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이번 사건에서는 기관사나 지하철종합관제소에서 CCTV를 확인하기도 전에 그 동영상이 거의 실시간으로 경찰청 종합상황실로 전송되었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해킹을 하지 않고서는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 그래서 처남이 이 사건을 맡게 되었다는 것이다.
“도대체 누가 그런 짓을 했을까? 해킹을 해서 자기한테 득이 될 일도 없을 텐데.”
“그러게 말이에요. 암튼 제가 조사하는 것은 매형과 관련이 전혀 없고, 폭행 관련 건에 대해서는 아마 관할 경찰서에서 매형에게 연락이 갈 거예요. 사실 오늘 제가 전화한 이유는 따로 있어요. 전에 매형이 저한테 단풍이야기의 해킹 건에 대해서 부탁한 적 있죠. 소울이 아이디를 누가 도용해서 게임을 하고 있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오늘 제 후배한테서 연락이 와서 매형과 통화를 좀 하고 싶다고 하네요. ‘단풍이야기’에 근무하는 후배인데, 일전에 매형한테도 한번 말한 적 있죠?”
“왜? 무슨 일로……?”
“자세한 건 그 후배한테 들어보세요. 제가 매형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었으니 아마 곧 전화가 갈 거예요. 그럼 다음에 또 연락할게요.”
서병린 경사는 갑자기 바쁜 일이라도 생겼는지 서둘러 전화를 끊는다. 처남의 말대로 통화가 끝난 지 약 10분 후 휴대폰의 착신음이 울리면서 저장되지 않은 전화번호 하나가 액정에 표시된다.
“예, 민동수입니다.”
나는 약간 깍듯한 어투로 전화를 받는다.
“안녕하세요. 저는 단풍이야기 개발팀에 근무하는 강창기입니다.”
“네, 병린이한테 이야기 들었습니다. 저번에 제가 문의한 건으로 도움 많이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아이고, 아니에요. 병린이 선배님한테 제가 훨씬 더 많이 신세지고 있죠.”
게임회사의 개발자답지 않게 푸근한 말투다.
“사실 제가 오늘 선생님께 전화한 것도 그와 관련해 좀 궁금한 게 있어서요.”
“그것이라면……?”
“병린이 형을 통해 저한테 추적을 부탁하신 보라매날다 말이에요.”
“아, 네. 좀 더 알아내신 게 있으신가요? 누가 그런 짓을 하고 있는지…….”
“그게 아니라, 뭐라고 말씀 드려야 할지.”
잠시 망설이던 그는 처음과 달리 약간 사무적인 말투로 말을 이어간다.
“선생님께서 보라매날다의 존재를 처음 인지하신 게 정확히 언제인가요. 아니…, 존재라고 하면 어폐가 좀 있고, 그러니까 아드님의 아이디가 도용당하고 있다는 걸 처음 아신 시점이라고 해야겠죠.”
“소울이가 떠난 지 엿새 후니까 지난 3월 21일 저녁 무렵이었어요.”
“혹시 아드님께서 예전에 게임을 할 때 자신의 아이디가 해킹 당한 것 같다든가 아니면 좀 이상하다는 말을 한 적이 없나요?”
‘예전’이라는 말이 유난히 내 귓가에 맴돈다. 이제 소울이는 예전 속에서만 존재한다.
“네. 그런 말을 한 적은 없습니다.”
나는 일부러 ‘없었습니다’가 아닌 ‘없습니다’라고 대답한다. 내게 소울이는 여전히 현재형이므로. 여전히가 아닌 앞으로도 영원히.
“선생님께선 왜 그날 단풍이야기에 로그인 하셨나요? 아, 오해는 하지 마시고요. 저희가 확인한 바에 의하면 선생님께서 키우는 B라코차라는 캐릭터는 4년 전에 로그인 한 이후 전혀 게임을 하지 않다가 그날 다시 본인 인증을 거친 후 로그인 하셨더라고요.”
소울이의 아이디가 도용당하고 있다고 신고한 이는 바로 나인데, 꼭 내가 조사받고 있는 느낌이다. 하지만 나는 사실 그대로 털어놓는다. 아이의 물품을 정리하다가 단풍이야기의 아이디와 비밀번호가 적힌 메모지를 발견하고 로그인 했더니 접속 중이라고 해서 확인 차 내 아이디로 들어가 봤다고 말이다. 소울이 아이디를 해킹한 이의 정체를 밝히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기대하면서…….
“그날 이후 B라코차의 레벨을 상당히 빨리 올리셨더라고요. 게임 시간도 상당히 길었고요.”
“제 나름대로 해커의 정체를 밝히려고 그랬습니다. 보라매날다와 레벨이 비슷해야 게임을 하고 있는 마을로 가서 직접 동향을 파악할 수 있으니까요.”
“그렇게 접촉했을 때 보라매날다가 혹시 수상한 행동을 하지는 않던가요?”
보라매날다가 보낸 메시지의 내용이 떠올랐지만, 말하지 않기로 한다. 그 내용이 내 오래된 전자 일기장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까지는 밝히기 싫으므로. 어쩌면 게임 세계 속에서 일어난 일을 모두 알고 내게 확인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글쎄요. 내가 다가가면 다른 장소로 이동하더라고요.”
“혹시 의심이 가는 사람은 없나요? 아드님의 친구라든가 아니면 아드님이 해킹방어대회에서 만나 친해진 사람이라든가.”
게임회사에서는 소울이가 해킹방어대회에 나간 것까지 알고 있다. 난 그저, 비록 게임 캐릭터일지라도 소울이가 키우던 것을 누가 마음대로 훔친 게 못마땅해서 시작한 일인데 게임회사에서 이렇게까지 신경 쓰는 이유가 무엇일까.
“현재로서는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실례가 안 된다면 좀 여쭤 봐도 될까요? 뭐 때문에 이렇게 조사를 하시는지요?”
강창기는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예의 그 푸근한 말투로 말을 잇는다.
“하하, 제가 너무 꼬치꼬치 물어본 것 같아 죄송합니다. 사실 이건 밖으로 누출되어서는 안 되는 정보인데, 뭐 병린이 형도 다 알고 하니 말씀 드리겠습니다. 보라매날다가, 아니 아드님의 아이디를 도용한 친구가 우리 시스템을 해킹해서 확률형 아이템을 대량으로 훔쳐갔습니다. 그것까진 괜찮은데 관계 기관과 언론사에 제보를 했더라고요. 자신이 가져간 확률형 아이템을 모두 열어본 결과 단 한 번도 원하는 추가 성능을 부여받지 못했다고 말이에요. 즉, 확률형 아이템의 확률이 조작되었다고 온 세상에 알린 거죠. 그러자 단풍이야기의 이용자들이 격분해서 트럭 시위도 하고 지금 저희 회사가 난리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보라매날다 때문에 단풍이야기가 곤란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는 말씀이군요.”
“뭐, 그렇다고도 볼 수 있지만, 저희가 간과한 부분이 이번에 터진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게임 이용자들도 그동안 확률형 아이템에 대한 의혹을 꾸준히 제기해 왔거든요. 하지만 해킹 건은 분명 범죄이니 보라매날다의 게임 계정은 오늘부로 차단 조치되었습니다. 선생님께서도 알고 계셔야 할 것 같아서요.”
강창기는 통화에 응해주어서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다시 한 번 미안하다고 말하며 전화를 끊는다. 언젠가는 터질 문제였다면 보라매날다의 해킹으로 인한 단순 사고가 아니라 게임회사가 그동안 숨겨온 잘못이 이번 건으로 인해 드러났다고 볼 수 있다.
강창기의 말은 사실이었다. 단풍이야기로 포털사이트의 뉴스를 검색해보니 ‘확률 조작’이라는 헤드라인을 내건 기사들이 쭉 나열된다.
‘단풍이야기는 해당 아이템이 균등한 확률의 무작위 아이템이 아닌, 불필요한 성능에 가중치를 부여한 조작 아이템임을 인정했다’
‘격분한 단풍이야기 유저들은 여의도 국회 앞에서 트럭 시위를 진행하며 게임사에 투명한 정보 공개를 요구하고 있다’
‘소비자단체는 모든 게임사의 확률형 아이템 조작 여부를 관련 정부기관에서 전수 조사해야 한다고 밝혔다’
‘단풍이야기는 이용자 간담회를 개최해 이번 사태에 대해 사과하며, 고액의 경품을 내건 대대적인 이벤트를 실시한다고 밝혔다.’
여러 건의 기사를 꼼꼼히 읽어 보아도 이번 사건이 어떻게 해서 드러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보라매날다가 해킹한 아이템, 아니 확률 조작 의혹을 받고 있는 단풍이야기의 아이템이 ‘환생의 불꽃’이라는 사실만 알 수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