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성규 Oct 15. 2024

천의 바람이 되어

사고가 일어난 시각은 밤 9시 35분경이다. 그날 내게 소울이와 먼저 밥을 먹으라고 한 아내는 양주의 한 지방도로에서 교통사고를 당했다. 중앙선을 침범한 승용차가 아내가 운전하던 차의 운전석을 정면으로 들이받은 것.


아내의 차를 들이받은 승용차의 운전자가 정연주이며, 그 옆자리에 타고 있던 동승자가 허재현이다. 당시 정연주는 음주 상태였으며, 사고 후 측정한 혈중알코올농도는 0.04퍼센트였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차의 소유주는 허재현이었으며, 그 역시 음주 상태였다. 하지만 운전자가 아니었기에 그에 대한 혈중알코올농도 측정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주위에선 수군거렸다. 혹시 허재현이 사고를 낸 후 정연주와 운전자 바꿔치기를 한 게 아니냐고. 누가 봐도 의심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증거가 없었다. 유일한 목격자인 아내는 의식 불명이며, 아내 차의 블랙박스에는 녹화된 영상이 없었다. 또한 사고차량의 블랙박스에 녹화된 영상으로는 운전자가 누구인지 확인할 수 없었다.

 

당시 사건 조사를 맡은 양주경찰서의 박영태 형사는 아내 차의 블랙박스 영상이 남아 있지 않은 이유를 파악하기 위해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데이터 복원을 의뢰했다고 밝혔다. 박 형사는 만약 영상이 복원되면 그걸 토대로 수사를 하면 된다며 나를 안심시켰다.


나는 세계적인 수준의 영상 복원 기술을 지닌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을 믿었고, 나에게 협조적인 박 형사를 믿었다. 그러나 블랙박스의 영상 복원은 실패했고, 영상이 남아 있지 않은 원인 또한 밝혀지지 않았다.

 

유일한 희망은 사고지점으로부터 약 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설치된 지방도로의 방범용 CCTV였다. 사고가 일어나기 전 허재현의 차는 그곳을 통과해서 사고 지점으로 향했던 것. 그 영상에는 허재현의 승용차가 찍혀 있었지만 화질이 좋지 않아 운전자의 용모를 파악하기 불가능한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박 형사는 내게 허재현과 합의를 해야 할 이유에 대해 비교적 상세히 알려주었다.

 

우선 음주운전을 했다는 것만으로는 특정범죄 가중처벌법, 즉 일명 윤창호법을 적용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음주 상태에서 차량을 몰다 사고를 냈다 해도 운전자가 과연 음주의 영향으로 정상적인 운전이 불가능했는지의 여부가 정확히 밝혀지지 않으면 패소할 수 있다는 것.

 

따라서 검찰도 피의자의 음주가 사고를 일으켰다는 사실을 입증하지 못할 경우 그보다 안전하고 쉬운 교통사고처리특례법 위반으로 기소하곤 한다고 했다. 더구나 정연주의 혈중알코올농도를 감안할 때 윤창호법의 적용은 거의 어려운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아내처럼 간병인의 보호 없이는 생명 유지가 어려운 식물인간 상태가 된 경우 사망사고에 준해서 처리하므로 구속영장 청구대상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최근에는 사망사건의 경우에도 증거인멸 및 도주우려가 없다면 법원에서 영장을 발부하지 않는 추세라고 했다.


마지막으로는 정연주의 경우 정상참작 사유가 매우 크다는 점이었다. 정연주와 허재현은 사고 직후 아내의 차가 2차 사고로 이어지지 않게 보호 조치를 했으며, 즉시 119에 신고해 구호 조처를 취했다. 이런 경우 검찰이 구속영장을 청구해도 법원에서 정상참작을 이유로 기각한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생각이 조금 달랐다. 둘이 함께 술을 마셨는데, 허재현이 자신의 차를 정연주에게 맡겼다는 건 납득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CW그룹의 창업주인 할아버지 허주철 회장, 그리고 2대 회장인 아버지 허건구와 달리 허재현은 복잡한 사생활로 가끔씩 매스컴을 타곤 했다.


해외 유학 시절의 마약 복용 사건, 유명 연예인과의 스캔들, 그리고 음주운전 사건 등 내가 기억하는 것만 해도 한 손을 모두 꼽을 정도다. 더구나 그는 음주운전 경력으로 인해 당시에 무면허 상태인 것으로 알려졌다. 운전자 바꿔치기의 정황은 충분한 셈이다.


처남도 허재현을 의심했다. 자신의 하나뿐인 누이를 식물인간으로 만든 진범을 알아내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관할도 아니고 담당 분야도 아닌 사건이어서 한계가 있는 듯했다.

 

결국 나는 허재현과의 합의를 거부했다. 대신 박 형사에게 허재현 일행이 술을 마시고 차를 처음 출발시킨 곳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요청했다. 그곳에서부터 사고 지점까지 개인이 설치했을 수도 있는 CCTV를 모두 찾아볼 작정이었다. 그래야만 가장 슬픈 표정으로 바라보는 아내를 나도 똑바로 쳐다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 형사는 그건 개인정보이므로 알려주고 싶어도 줄 수 없다고 했다. 그는 난처한 표정으로 자신이 그에 대한 수사를 진행하고 있으니 믿고 기다려 달라고 했다.

 

믿고 기다렸으나 수사는 지지부진했고, 피고인 정연주에 대한 법원의 처분은 관대했다.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 벌금 500만원, 그리고 운전면허 정지 100일이 전부였던 것. 재판부는 한 사람의 인생과 그 가족들의 삶까지 모두 망친 범죄자에게 경미한 처분을 내린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사고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피고인의 음주라기보다는 운전 미숙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이며 후속조치 실시 여부, 보험 가입 여부, 피해자에 대한 보상 의지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한 결과라고.

 

합의를 해주지 않았는데도 재판부가 피해자에 대한 보상을 운운한 것은 정연주가 법원에 걸어놓은 꽤 많은 액수의 공탁금을 의미하는 듯했다. 물론 그 돈은 허재현의 주머니에서 나온 것이겠지만.


그 후로 잊고 있던 허재현의 이름을 티브이 뉴스를 통해 듣게 된 지 일주일 후 나는 처남의 전화를 통해 그의 이름을 다시 듣게 된다.


“매형, 저예요. 잘 지내시죠?”


“오랜 만이네.”


“혹시 며칠 전에 뉴스 보셨어요? 삼성동에 있는 대형 전광판이 해킹 당한 사건 말이에요.”


“응, 나도 봤어. 뉴스야 항상 보니까.”


“그럼 ‘요기놀자’ 해킹 사건도 아시겠네요. 둘 다 CW미디어가 보유하고 있잖아요.”


“그 전광판과 ‘요기놀자’가 같은 전산망을 사용한다면서?”


나는 일부러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물어본다. 그런데 이어지는 처남의 말은 최근 일어나고 있는 해킹 사건에 대한 나의 의혹이 인지편향 탓만은 아니라는 확신을 들게 만든다.


“애초에 ‘요기놀자’가 해킹 당했다는 사실은 CW그룹에서 극비로 부치고, 보도가 나가지 않게끔 그룹 차원에서 관리를 했나 봐요. 그런데 익명의 제보 메일이 주요 언론사의 담당 기자들에게 여러 차례 전달되면서 일이 커진 거죠. 그 메일에는 ‘요기놀자’의 해킹으로 누출된 숙박예약정보와 개인정보 등의 구체적인 사항이 담겨 있었고요. 즉, 누군가가 이 사건과 관련된 내용을 사회적으로 확산시키고 있다는 거죠. 그 누군가는 바로 해킹을 한 당사자일 가능성이 높고요.”


처남은 그뿐만이 아니라고 한다. ‘요기놀자’를 해킹한 범인은 당시 유출된 숙박 이용내용을 토대로 수천명의 이용자들에게 ‘00년 00월 00일 00호텔에서의 하룻밤은 즐거우셨나요?’라는 내용의 문자를 보냈다는 것. 그 문자를 받은 고객들의 항의 전화가 ‘요기놀자’의 소비자상담센터에 빗발쳤으며, 일부 고객들이 경찰에 신고하면서 현재 수사가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보통 블랙 해커들이 해킹을 하는 목적은 돈이거나 자신의 실력을 과시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이번 경우는 좀 특이하다. 범인은 CW미디어 측에 돈을 요구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실력을 특별히 과시하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허기야 사회적 파장이 클수록 자신의 명성이 높아지겠지만.


그런데 처남이 내게 전화를 한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매형, 누나 교통사고 있잖아요. 지금 경찰 감찰부에서 당시 관할경찰서 및 담당수사관들을 조사하고 있대요.”


“3년 전의 사고 담당자를 조사하는 이유가 뭐야?”


“이거 역시 익명의 제보가 들어왔대요. 당시의 수사 비위를 밝힌 아주 구체적인 증거와 함께요.”


순간 자신을 믿고 기다려달라는 박 형사의 난처한 얼굴 표정이 떠오른다.


“그럼 그 박 형사도 조사받겠네.”


“네. 지금은 파주경찰서 교통사고 조사계 팀장이죠. 들리면 소문에 의하면 박영태 경위가 당시의 모든 수사 상황을 조작한 것 같아요.”


“조작했다고? 혹시 허재현의 운전자 바꿔치기가 사실이야?”


“네. 그런 거 같아요. 사고차량의 블랙박스에 녹화된 영상을 바꿔치기 하고 정연주의 혈중 알코올 농도도 조작한 거죠. 심지어 국과수의 감정회보서까지 폐기했다는 말도 들려요. 지금 1차 조사가 마무리되어서 보도자료가 배포된다고 하니 곧 뉴스로 보도될 거예요”


처남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날 저녁 뉴스는 온통 재벌 3세의 비행으로 채워졌다.

 

“음주운전 경력이 있는 CW미디어의 허재현 대표가 무면허 상태에서 다시 음주운전을 하다 교통사고를 일으킨 뒤 옆에 타고 있던 기상캐스터 정연주 씨와 운전자 바꿔치기를 한 사실이 3년 만에 밝혀졌습니다. 사고는 지난 2019년 1월 30일 밤 9시 35분경 파주시에서 일어났습니다. 당시 허재현 대표는 정연주 씨와 식당에서 술을 마신 뒤 자신의 승용차를 몰고 운전을 하다 중앙선을 침범해 마주 오던 차량을 들이받았습니다. 피해차량에 탑승하고 있던 운전자는 아직까지 식물인간 상태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허재현 대표는 자신이 아니라 정연주 씨가 운전한 것으로 경찰에 진술했습니다. 문제는 경찰이 운전자가 허재현 대표라는 사실을 알아냈음에도 사고를 조작했다는 점에 있습니다. 당시 목격자와 사고차량의 블랙박스에 녹화된 영상을 통해 경찰은 허재현 대표가 운전했다는 사실을 알아냈음에도 불구하고 피의자 신문조서 등을 조작해 사실을 은폐했습니다. 또한 정연주 씨의 혈액을 바꿔치기 해 혈중 알코올 농도도 속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사고 직후의 혈액이 아니라 사고 후 12시간이 지난 뒤의 혈액을 보내 혈중 알코올 농도를 측정한 것이죠. 덕분에 정연주 씨는 음주운전 가중처벌법인 윤창호법이 아니라 교통사고처리특례법으로 기소돼 집행유예를 받았습니다.


피해차량의 블랙박스에 들어 있던 메모리 카드도 바꿔치기 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사고 전후의 영상이 녹화된 메모리 카드를 빼내고 조작된 메모리 카드를 국과수에 보낸 것이죠. 그 후 국과수에서 발급된 블랙박스 메모리 카드에 대한 감정회보서를 폐기함으로써 경찰은 이 같은 사실을 숨겼습니다. 경찰은 당시 수사 담당자였던 박모 경위가 허재현 대표에게 금품을 제공받은 것으로 보고 그의 통장 내역 등을 추적 중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또한 이 같은 수사 비리가 경찰서 윗선까지 연결돼 있는지의 여부도 추가 조사 중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동안 나를 내내 짓눌러 왔던 의혹들이 이제야 풀렸다. 늦은 밤도 아니었고 그렇게 큰 사고가 났는데 왜 목격자가 없었을까. 유일한 증거인 아내 차량의 블랙박스는 왜 사고 당시의 영상을 기록하지 못했을까.

 

박 형사가 자신을 믿고 기다려 달라면서 난처한 표정을 지은 이유도 알 것 같다. 다른 사건의 수사로 항상 바빴던 그가 내게는 유독 친절했던 까닭도…….


다음날 오후, 나는 아내가 입원해 있는 요양병원으로 향한다. 아내에게 자신을 누가 그렇게 만들었는지 알려주기 위해서다. 그동안 아무것도 밝혀내지 못했던 무능한 남편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이기도 하다. 이게 기쁜 소식인지 아니면 아내를 더 슬프게 만들 소식인지는 알 수 없지만…….


평소에는 대중교통을 이용하지만, 나는 직접 차를 운전해 아내의 병원으로 향한다. 지하철 패륜녀 사건 이후 생긴 버릇이다. 폭행에 대한 트라우마라기보다는 지하철을 타면 왠지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고 수군거릴 것 같아서다.


나는 병원 주차장에 차를 주차한 뒤 엘리베이터를 타고 곧장 아내의 병실로 향한다. 하지만 침대에 드러누워 멍한 시선으로 창밖으로 바라보고 있을 줄 알았던 아내가 거기에 없다. 아내를 돌봐주는 간병인도 보이지 않는다.

 

비록 침대에 박제되어 있는 신세지만 아내도 가끔 검진을 받는다. 의사가 주기적으로 환자의 상태를 파악하고, 합병증 등을 예방하기 위해서다. 병실에 없다면 간병인과 함께 검진을 받으러 갔을 수도 있다.

 

나는 병동 데스크에 근무하는 간호사에게 아내의 이름을 말하고 어디에서 검진을 받느냐고 묻는다. 그런데 의외의 대답이 돌아온다. 보호자가 와서 아내를 휠체어에 태우고 병동 바로 옆의 공원에 산책시키러 나갔다는 것. 나 말고 여기서 아내의 보호자로 통하는 사람은 장모님뿐이다.


병동 출입구를 나와서 왼쪽으로 건물을 끼고 돌아가면 대나무로 둘러싸인 작은 공원이 나온다. 벤치와 작은 연못, 꽃밭 등으로 구성된 그 공원은 아늑한 분위기여서 나도 종종 찾는 곳이다.

 

공원에는 벤치에 앉은 장모님과 휠체어를 탄 아내뿐이다. 나는 장모님을 향해 반갑게 인사를 하려다 흠칫 건물 뒤에 멈춰 선다. 장모님이 핸드백에서 뭔가 꺼내 입에 갖다 대는 모습을 봤기 때문이다. 조금 거리가 있어 확실히 보이진 않지만, 작은 악기 같다.


음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후 오랫동안 음악학원을 운영한 장모님은 피아노뿐만 아니라 기타, 우쿨렐레, 하모니카, 리코더 등 다양한 악기를 다룰 줄 안다. 지금 장모님은 아내에게 자신의 연주를 직접 들려줄 모양이다.

 

나는 장모님의 연주를 방해하기 싫어 건물 뒤에 몸을 숨긴 채 조용히 그 모습을 지켜본다. 장모님이 그윽한 눈빛으로 아내를 바라보며 연주를 시작한다. 소리를 들어보니 오카리나다. 휠체어를 탄 아내는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지만, 연주에 집중하고 있는 듯하다.


장모님의 오카리나는 아름다운 영혼이 조용히 읊조리는 휘파람 소리 같은 선율을 쏟아낸다. 그 선율은 나도 아는 곡이다.

 

미국 인디언들에게서 전해오는 ‘천의 바람’이라는 시를 번역해 우리나라의 한 대학 교수가 작곡한 ‘내 영혼 바람 되어’라는 곡이다. 세상을 떠난 망자가 자신의 무덤 앞에서 슬퍼하는 이를 위로하는 이 노래의 가사는 나도 기억하고 있다.

     

  그곳에서 울지 마오.

  나 거기 없소.

  나 그곳에 잠들지 않았다오.

  나 거기 없소.

  그 자리에 잠든 게 아니라오.

  나는 천의 바람이 되어

  찬란히 빛나는 눈빛 되어

  곡식 영그는 햇빛 되어

  하늘 한 가을비 되어

  그대 아침 고요히 깨어나면

  새가 되어 날아올라

  밤이 되면 저 하늘 별빛 되어

  부드럽게 빛난다오.

     

아! 그렇다. 이 곡은 소울이가 피아노로 즐겨 연주하던 곡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영화들의 주제곡을 연주하는 것이 취미였던 소울이는 애니메이션과는 상관이 없는데도 유독 이 곡만은 피아노로 자주 연주하곤 했다.


소울아, 너 어디 있니? 혹시……, 네가 그런 거니?

이전 10화 고양이도 외로움을 느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