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닐하우스>는 제27회 부산 국제영화제에서 CGV상, 왓챠상, 오로라미디어상의 3관왕을 달성한 이솔희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데뷔작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탄탄한 서사와 내밀한 캐릭터가 화면을 장악한다. 연민을 부르는 가녀린 문정, 순수함과 사악함의 양극을 달리는 순남, 보고만 있어도 위로가 되는 마음 넓은 태강. 그리고 한적한 교외에 덩그러니 혼자 자리한 검은 비닐하우스까지 하나의 캐릭터처럼 보일 정도다.
불투명한 비닐하우스와 투명한 여인
문정(김서형)은 가끔 머리를 때려 스스로를 벌하는 사연이 궁금한 여성이다. 고단한 하루를 보내고 돌아온 집은 다름 아닌 허름한 비닐하우스다. 소년원에서 곧 출소할 아들과 번듯한 집에서 함께 살날을 고대하며 1년째 집을 보러 다닌다.
최근 자해 치료 상담 모임에서 순남(안소요)과 급속도로 친해졌다. 위급한 상황에 처한 순남에게 잠자리를 마련해 준 게 화근이었을까. 나보다 어려운 사람을 위한 배려였지만 순남은 모든 걸 걸고 집착하기 시작한다.
문정이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곳은 바로 돌봄 가정이다. 치매를 앓고 있는 화옥(신연숙)과 시력을 잃은 태강(양재성)의 요양사로 일한다. 이 집은 아늑하고 대체로 평화롭다. 치매에 걸려 심술을 부려대는 화옥을 잘 타이르기만 하면 점잖고 친절한 태강과 안온한 집을 잠시나마 가져볼 수 있다. 가사를 도우며 그만한 돈을 벌기도 쉽지 않았기에 늘 노부부에게 감사했고 성심성의껏 간병인이자 유사가족으로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태강이 친구와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잠시 집을 비웠을 때 비극이 일어나고야 마라. 여느 때와 같이 화옥을 목욕시키던 중 갑작스러운 사고를 당하고, 이를 감추기 위해 문정은 선 넘는 행동을 이어간다. 점입가경으로 도 넘은 선택을 하면서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선한 사람들이 무너지는 아픈 이야기
영화는 현실의 어느 부분을 툭 하고 떼어 온 것처럼 강도 높은 리얼리티에 덥석 빠져들게 만든다. 그뿐만 아니라 캐릭터가 압도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세 배우의 연기가 각자의 독립성 유지하며도 하모니를 이룬다. 지금까지 보여주었던 강렬한 연기와는 결이 다른 소녀다운 김서형의 독특한 억양이 짙은 여운을 준다.
‘더 글로리’의 경란으로 얼굴을 알린 안소요는 감정과 충동,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날 것 그대로 드러내는 순남을 맡아 사랑스럽지만 께름칙한 얼굴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앞이 보이지 않지만 이를 티 내지 않으려는 태강 역의 양재성은 자연스러운 연기로 깊은 슬픔 속으로 자연스럽게 이끈다.
다 쓰러져 가는 비닐하우스에서 사는 문정과 죽음을 준비하는 태강의 확연한 대비는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안긴다. 순남은 아예 집이 없어 시설과 남의 집을 전전하고 있어 더욱 절망적이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선량한 사람들이 무슨 잘못을 했길래 형벌처럼 고난의 길을 걷는 걸까.
천천히 쌓아가는 서스펜스 충격적인 결말
사회적 약자, 선한 사람들이 어떤 계기로 무너지는지를 면밀하게 들여다본다. 문정은 악착같이 살고 있으나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다. 천성이 착하고 성실해 누군가를 돌보는 데 자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아들과 아픈 엄마를 돌볼 수 없는 형편이다. 여성이자 엄마, 딸인 문정의 어깨는 무척이나 버겁게 보여, 모호한 문정의 마지막 표정이 오랜 인상을 남긴다.
악행과 선행의 경계를 확실하게 지어주지 않아 보는 사람에 따라 각자의 마음으로 완성할 수 있는 열린 결말이다. 오히려 발버둥 치다 늪에 빠진 문정을 해방시켜주는 것 같았다. 자녀, 부모, 타인을 돌보는 것을 떠나 주체적이고 독립적으로 살길 응원하는 듯했다.
영화는 돌봄, 치매, 요양보호 등 고령화 사회에서 빼놓을 수 없는 키워드를 다루었다. 치밀하게 리얼리티를 차곡차곡 쌓아가다가 한순간에 공포로 치달아 가기 시작한다. 그게 바로 <비닐하우스>가 품고 있는 기이한 마력이다. 1994년생 이솔희 감독은 곁에서 봐온 어머니들의 희생적인 삶에서 착안했다고 연출 의도를 전했다. 아이일 때는 돌봐주었던 부모가 나이가 들면 돌봐주어야 하는 관계의 전복에서 시작되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피를 나눈 가족 보다 타인에게 베푸는 호의가 쉽다는 것에 착안해 돌봄, 요양사라도 가족을 돌보는 건 어려운 일임을 살리고 싶었다고 전했다. 악행은 있지만 악인 없는 서글픈 이야기. 불편하더라도 세상에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는 비장한 전언처럼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