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오펜하이머>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첫 번째 전기 영화이면서 영화 역사상 흑백 IMAX 필름 촬영이 구현되었다. 오펜하이머를 프로메테우스에 비교한 책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를 바탕으로 했다. 디지털 시대에 무겁고 시끄러운 IMAX 카메라와 필름 사용하고 극도로 CG 사용을 꺼리는 행동. 세트를 만들고 폭발 장면도 실제로 터트린다. 이번에는 CG 제로를 선언했다. 플롯에 과학적 주제(인터스텔라-천체물리학, 테넷-열역학 등)를 입혀 자신만의 스타일로 천착해 온 외길 인생의 또 다른 도전이다.
그래서일지 몰라도 그가 다루는 인물은 어떨까 궁금증 해졌다. 영화를 보고 나니 시공간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재능이 비범한 인물과 만나자 시너지가 커졌다. 1인칭 시점은 오롯이 주인공의 심리와 일치되었다. 더 이상 쪼개질 수 없는 우라늄 원자가 중성자로 인해 우연히 '분열'되면서 폭발의 연쇄 반응이 일어나 '융합'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불우했던 청년기와 화려했던 중장년기, 국가 영웅이었지만 죄인으로 살았던 노년기의 생애를 훑는다. 'J. 로버트 오펜하이머'를 크리스토퍼 놀란의 첫 번째 인물탐구로 삼은 것은 어쩌면 예견된 미래였다.
전기 영화의 새로운 지평
영화는 비선형적 구조를 취하며 크게 두 시점으로 진행된다. 오펜하이머(킬리언 머피)는1904년 부유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유대교를 믿지 않았다. 부모의 영향으로 문학적이고 예술적인 기질을 살려 다양한 분야를 섭렵했다. 시, 그림, 음악 등에 심취했고 언어에도 탁월했다. 6개월 만에 네덜란드어를 배워 물리학 연구를 브리핑하고 산스크리트어를 배워 힌두교 경전에도 관심을 보였다.
미국 하버드 대학 생활 이후 영국 케임브리지에서 유학 시절을 보낸다. 쉽게 적응하지 못했고 실험도 자주 실패했다. 지독한 향수병과 우울증은 꽤 심했는데 자신에게 모멸감을 준 교수의 사과에 독약을 넣을 정도로 불안했다. 이후 독일 괴팅겐 대학에서 양자물리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미국에 돌아온다. 훗날 맨해튼 프로젝트까지 이어지며 원자폭탄의 아버지가 되는 가장 유명한 일화가 펼쳐진다.
이 과정은 핵분열(Fission)이란 제목의 컬러 화면으로 진행된다. 미국 원자력 위원회(AEC) 비밀 청문회다. 맨해튼 프로젝트를 성공한 후 프리스턴 고등 연구원에서 루이스 스트로스와 아인슈타인을 만났다. 원자폭탄의 위험성을 이유로 수소폭탄 개발에 반대한다. 국가는 그의 애국심을 확인하고 보안 허가를 심사한다는 명목으로 협박했다. 그로 인해 사찰, 도청으로 얼룩진 사생활 폭로가 이어져 동료들이 증인으로 출석할 때마다 처참히 짓밟힌다.
또 다른 시점은 원자력 위원회 창립위원 '루이스 스트로스(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공개 청문회다. 핵융합(Fusion)이란 타이틀과 더불어 흑백으로 펼쳐진 스트로스의 회고록이다. 자수성가했지만 오펜하이머에게 열등감을 느껴 대립각을 세운 스트로스는 사적 복수심에 불타 오펀하이머를 괴롭힌다. 매카시즘의 순교자인 척한다며 극도로 몰아세웠지만 결국 자신이 파 놓은 함정에 빠진다.
불우한 청년기를 거쳐 영웅으로 등극
오펜하이머는 독일에서 배운 양자 물리학을 미국으로 가져와 응용하기에 이른다. 1930년대 이후 미국의 대공황과 나치의 출현으로 어수선했다. 이윽고 2차 세계대전까지 발발하자 미국으로 망명 온 유대인 과학자들은 조바심이 났다. 독일이 전쟁에 강력한 폭탄을 쓸지도 모른다는 압박에 시달렸다. 과학자들은 똘똘 뭉쳐 아인슈타인을 대동하고 대통령에게 성명서를 낸다. 나치로부터 서구 민주 문명을 지켜야 한다는 굳건한 결의였다.
이 뜻은 받아들여져 총괄자 '레슬리 그로브스(맷 데미먼)' 장군 주도로 극비리에 진행된다. 1942년부터 로스앨러모스에서 3년 동안 4천여 명의 사람들이 맨해튼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최초의 원자폭탄 트리니티(Trinity)가 개발되고 이로써 평화가 찾아올 거란 희망에 부푼다. 테스트는 1945년 7월 16일 뉴멕시코 사막 지역에서 진행되었다. 트리니티에 대한 말은 분분한데 '내 마음을 때리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이라는 설과 힌두교의 브라마(창조자), 비슈누(유지자), 시바(파괴자)로부터 영감받았다고도 알려져 있다.
모든 학문이나 사조에 열린 마음으로 대했다. 동생 프랭크와 제수 재키, 연인이던 진 태트록(플로렌스 퓨), 아내 키티(에밀리 블런트), 동료 중에도 많은 공산주의자가 있었지만 본인은 공산당에 가입한 적은 없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으로 스페인 내전에도 꾸준히 관심을 두며 난민을 도왔다. 하지만 맨해튼 프로젝트 이후에는 발목 잡는 프레임이 되어버린다.
윤리적인 고민과 국가의 대의 사이에서 갈등했던 오펜하이머는 개인 성취의 대가를 당연한 죗값으로 받아들이면서 살았다. 영웅이자 살인마라는 역설적인 괴로움으로 반전 운동에 매진했다. 분열된 자아로 고통받던 영혼을 힌두교에서 얻기도 했다.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오펜하이머를 그리스 신화의 '프로메테우스'와 비교하는 것은 탁월한 선택이다. 그리스 신화 속 프로메테우스는 상징적으로는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준 벌로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 먹히는 고통을 반복하는 아이러니한 존재다. 과학이 언제나 모순과 양면성의 학문이란 말이다.
인류 발전과 평화에 큰 영향을 끼친 기술 이면에는 발전과 절망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과학자의 본분을 다했을 뿐인데 수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갔다. 종전을 위해 애국심을 불태웠지만 훗날 공산주의자로 몰려 마녀사냥의 희생양이 되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로 향한 원폭 투하 이후 '과학자의 죄'라며 평생 고초를 자처했다. 프로메테우스의 끝없는 고난이 자연스럽게 겹친다.
또한 그를 '프로테우스'와 비교해봐도 좋다. 과거, 현재, 미래를 통달한 재주꾼으로서 조언을 얻으려면 도망가지 못하게 묶어 두어야 한다고 전해진다. 도망가면서 변신하게 되는데 그전에 잡히면 모든 지혜를 쏟아 놓는다. 그래서 '프로티언(protean)'이란 말은 다양한, 변화무쌍, 다재다능함으로 해석된다. 오펜하이머를 프로티언이라 부르는 것도 조직과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 다층적인 사람이란 뜻이었을 것이다.
맨해튼 프로젝트 시절에는 뛰어난 카리스마로 좌중을 압도하고 자기주장이 강한 과학자들을 통솔하는 리더로 활약했다. 어찌 보면 오케스트라를 진두지휘하는 유능한 마에스트로였다. 연구와 실험, 현실과 이상, 개인과 공동체, 국가의 완벽한 조화는 끈끈했고 맨해튼 프로젝트를 자신과 동일시하게 된다.
'놀란'이 해석한 오펜하이머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오펜하이머를 완벽해 보였지만 결함 많은 사람, 그래서 알아가고 싶은 복합적인 인물이라 해석했다. 불안한 물리학 생도에서 뛰어난 과학자로 존경받았으며, 정치가로 변신했다가 반전운동가로 살았다. 한 인물을 소개하고 영화적으로 접근하는 법을 핵분열과 핵융합의 과정을 빌었다. 수없이 쪼개지면서 주변인과 융합하며 엄청난 파괴력을 과시하는 원자 폭탄처럼 말이다. 무엇 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인간의 내면을 킬리언 머피를 통해 보여준 3시간은 압도적이었다.
주연급 배우들이 분량에 연연하지 않고 최고의 연기를 펼친다. 때로는 실존 인물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처럼 작은역할도 메서드 연기로 황홀함을 더한다. 예상치 못한 배우를 찾는 재미도 빼놓을 수 없겠다. 다만, 오펜하이머의 생애를 간단히 알고 갈 필요는 있겠다. 플롯의 복잡한 타임라인을 선호하는 크리스토퍼 놀란은 인물 영화도 일방향의 순서를 따르지 않는다.
7월 개봉한 북미와 다르게 한국에서 8월 15일 광복절에 개봉하는 이유를 두고 의도했다는 소문이 돌지만 정확한 이유는 상업적인 목적이다. 특별관 (IMAX, 돌비 시네마 등)의 한국 영화 스크린쿼터제로 <밀수>, <더 문>,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특별관에서 상영되었다. <오펜하이머>는 '놀란 영화는 무조건 IMAX'라는 프리미엄이 붙어 스크린쿼터가 끝나는 8월 15일부터 독점 상영할 것으로 예상한다.
매주 신작은 수요일에 개봉하지만 공휴일 연휴를 끼고 하루 당겨 화요일인 광복절에 개봉한다. 벌써 한국 관객의 놀란 사랑은 숫자로 입증되고 있다. IMAX 영화를 가장 실감 나게 즐길 수 있는 CGV 용산은 개봉 첫날 오전 6시 10분 1회차부터 거의 다 매진이다. 또 한 번의 천만 영화가 나올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아인슈타인과 오펜하이머: 원자폭탄의 창시자이자 파괴자이고 싶었던 두 천재 이야기 》ㅣ오펜하이머 책으로 읽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