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를 보고 천국과 지옥은 한 끗 차이라고 느꼈다. 지긋지긋한 우리 집, 따돌림당하는 학교, 회사, 군대 등등. 특히 지옥은 행복지수가 낮은 한국의 헬조선이 떠올라서 피식 웃음이 났다.
예전에 한 지인이 스스로 삶을 마감하고 싶었다고 고백했다. 그 말을 듣고 흠칫 놀랐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집에 와서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면 큰일이라며 며칠을 혼자 고민했었다. 알고 보니, 그 사람은 말끝마다 '죽겠다'는 말을 달고 사는 사람이었다. 정말 행동으로 옮기겠다는 게 아니었던 거다. '지금 무척 힘드니 관심을 가져 달라'라는 SOS 임을 나중에 깨달았다.
나미, 선우, 채린 그리고 혜진까지. 그저 조금의 위로가 필요한 친구를 사귀고 싶었던 건 아닐까. 지옥 같았던 지난밤 내내 타오르던 비닐하우스를 뒤로하고 맞이한 희미한 아침. 간신히 지옥을 빠져나왔지만 또 다른 지옥이 펼쳐지더라도 어쨌든, 새롭게 시작할 용기를 얻었을 것 같다.
당장 죽고 싶지만 복수는 하고 싶어
학교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나미(오우리)와 선우(방효린)는 수학여행을 빌미로 K 지옥을 탈출하려고 마음먹는다. 죽기 일보 직전, 죽도록 미워하던 채린(정이주)의 유학 소식에 살아야 할 이유가 생겨 버린다. 어설펐던 자살기도는 실패했다. 두 친구는 서울에서 호의호식하며 잘 살고 있는 채린을 찾아가기로 마음먹는다.
당장 서울로 향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채린은 신실한 신자가 되어 있었다. 학폭 피해자인 우리에게 사과 한 마디 없었는데 회개했다니 미칠 노릇이었다. 수확 없이 이대로 돌아갈 수 없던 두 친구는 교회에서 며칠 머물면서 채린의 인생에 흠집 낼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게 된다.
여정의 시작은 나미의 즉흥적인 흥분이었지만 이상하게도 흔들리기 시작한다. 채린의 선한 얼굴과 행동에 먼저 마음을 바꾼 쪽도 나미다. 저돌적이고 충동적인 나미만 믿고 무작정 따랐던 선우는 황당했다. 채린에게 받았던 상처가 아물지 않았는데 죄를 뉘우치고 구원받고 싶다고? 엉뚱한 곳에서 면죄 받으려는 채린의 행동에 화가 난 선우는 무언가를 다짐한다.
학교 울타리를 나가면 더 큰 지옥
영화는 지옥 같은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두 소녀의 광기 따라가다가 더 잔혹한 현실을 마주하게 되는 이야기다. 학폭 피해자와 가해자가 만나 싸우고 전복되다 다 같이 폭발해버리는 관계가 무겁지만은 않다. 천국에 갈 생각은 없고 지옥에 갈 각오는 되어 있는 대책 없는 아이들이 주인공이다. 죽기 직전 불현듯 맹렬한 생존력이 생겼고 복수를 다짐한다. 죽고 싶어서 안달이었는데 죽음에 다가갈수록 살고 싶어진다. 아니 구체적으로는 억울에서 못 죽겠다는 객기다.
복수의 대상 채린을 찾은 곳은 이상한 교회였다. 겉으로는 평범하고 자애로운 교단처럼 보이지만 작은 시스템의 축소판이었다. 행동을 점수화해 환산하고 가장 많은 점수를 받으면 낙원으로 갈 자격이 생긴다고 속삭였다. 신 앞에서 모두가 죄인이고 평등한 사람이라 말하지만 보이지 않는 계급이 존재했다. 누가 봐도 사이비인데 아무도 모르는 건지, 모르는 척을 하는 건지 다들 빠져있었다.
부모들은 전 재산을 바쳐서라도 낙원에 가려고 안달이다. 낙원에 가까워질 점수를 높이기 위해 자녀를 들볶았다. 아이는 모자란 점수를 채우려고 안간힘을 썼고, 그럴수록 부모와 자식 사이 불화는 커져만 갔다. 이 상황을 지켜본 나미와 선우는 학교 밖은 천국이 아닌 또 다른 지옥임을 깨닫고 전복을 결심한다.
임오정 감독은 제목 '지옥만세'를 과거 프랑스혁명 때 외치던 구호라고 설명했다. 기존 세대를 몰아내고자 하는 시스템 붕괴가 담긴 의미다. 얼마나 살기 힘들면 지옥이 낫겠다는 말을 할까. '세상 다 망해버려라'를 외치던 두 소녀의 마음과 일치하는 역설적이면서도 독특한 제목이다. 감독, 배우의 다음 작품이 기다려지는 올해 발견한 반짝이는 독립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