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의 제목은 역설적이다. 자연은 인간이 지구에 생겨나면서부터 좋든 싫든 공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악은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다. 인류의 성장과 문명 발전에 기여했지만 이제는 오히려 가치와 존재를 침해당하고 있는 상황이다. 알지 못하는 무지는 결국 악이 될 수 있다.
머리도 좋고 적응도 빨라 다른 종을 위협하고 살아남은 호모 사피엔스가 퇴출당할 위기에 처했다. 지구의 주인인 양 마음대로 써버리는 인류를 자연 입장에서 생각해 보니 절대악이 따로 없을 것 같다. 그래서일까. 인간이 되돌려 받는 자연의 복수는 이미 시작되었다. 기후변화, 지진, 쓰나미, 폭설, 폭염, 홍수, 가뭄, 전염병 등등. 얼마나 더 많은 일들이 생길지 전망하는 것 자체가 공포가 된지 오래다.
환경파괴의 문제의식 거론
조용한 산골 마을이 갑자기 불어온 글램핑장 개발로 시끄러워졌다. 이 지역은 물맛이 좋기로 유명해 주민들은 물을 음용하고 조리에도 쓴다. 청정 물맛을 콘셉트 삼아 식당을 차린 이주민이 있을 정도다. 주민 모두가 자연이 주는 귀한 선물을 욕심내지 않고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다.
글램핑장 설명회 날. 도시에서 온 컨설팅 업체 직원 타카하시(코사카 류지)와 마유즈미(시부타니 아야카)는 주민들을 설득하지 못하고 호되게 당하고야 만다. 관광지로서 벌어들일 수익에만 초점을 맞춘 반쪽짜리 설명회였기 때문. 관리 허술의 문제점, 주민의 불편함, 환경오염 등 다양한 갈등이 터져 나오며 엉망이 되어버렸다.
지역주민, 상인, 업체의 입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티가 역력하다. 보조금에 급급한 연예 기획사가 대행을 떠맡게 된 상황까지 들켜 버려 난감한 상태가 되었다. 일단 제대로 논의한 후 다시 오겠다며 이번 설명회를 접었다.
며칠 후 회의를 통해 적당한 절충안을 찾아냈다. 주민의 요구사항을 몇 가지 들어주는 척하면서 실속을 차리려는 심산이다. 두 직원은 심기일전해 다시 마을을 찾는다. 자신들의 무지를 깔끔하게 인정하고 정중한 사과로 분위기를 바꿔 보려는 게 본심이었다.
한편, 전쟁 후 소작 개척민 3세대인 야스무라 타쿠미(오미카 히토시)는 딸 하나(니시카와 료)를 키우고 있다. 마을의 소소한 일을 도우며 생계를 꾸리는 심부름꾼이다. 가끔 딸의 하원을 깜빡하는 딸바보다. 하나는 놀이터인 숲에서 실컷 놀다가 돌아오는 일이 잦은데 그날도 먼저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대수롭지 않게 하나의 발자취를 쫓던 아빠는 딸의 실종을 알아채고 고군분투하기 시작한다. 평화롭던 마을의 일상은 그날 이후 모든 것이 변해 버렸다.
음악에서 파생된 영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음악으로부터 파생된 영화다. <드라이브 마이 카>의 음악 감독 ‘이시바이 에이코’의 라이브 퍼포먼스 영상을 기반으로 한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이시바시 에이코가 의뢰한 영상을 하나의 영화처럼 기획했고 시나리오를 써 내려갔다. 이시바시 에이코는 음악 영상을, 하마구치 류스케는 영화 음악을 선물받은 이색적인 협업이다.
영화라는 영상 언어에 머물지 않고, 영감을 다양한 방식으로 발현했다. 영화 음악은 그저 부수적인 OST로 불리지 않는다. 음악도 나름의 주인공이다. 극 속에서 영원히 살아 숨 쉬는 생명력을 갖는다. 마치 하나의 영상으로 쓴 시, 영화로 만든 음악같이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 라이브 콘서트용으로 만든 무성 영화 편집 본 <Gift>까지 본다면 금상첨화다. 그가 선보이는 멀티장르이자 천재성까지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역시나, 이야기 꾼!
‘하마구치 류스케’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로 제80회 베니스국제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받았다. 일본 감독으로는 처음으로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올랐다. 3년 동안 칸, 베를린, 베니스, 아카데미 4대 영화제에서 상을 받아 ‘구로사와 아키라’감독 이후 일본을 넘어 세계가 주목하는 감독으로 격상된 젊은 거장이다.
중년 네 여성의 자아 찾기 <해피 아워>, 사랑에 대한 모순된 질문을 던지는 성장담 <아사코>, 홍상수 감독의 당겨 찍는 촬영 방식이 담긴 옴니버스 스타일 <우연과 상상>, 남성 배우와 여성 운전사가 나누는 슬픔의 무게 <드라이브 마이 카>를 만들었다. 스승이었던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스파이의 아내>의 공동 각본을 작업하기도 했다.
작품 모두 각각의 독립된 매력으로 다가온다. 그의 중심에는 늘 ‘이야기’가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별일 아닌 상황일지라도 이야기를 통해 특별한 순간을 빚어내는 연출 방식을 취한다.
영화의 특징 중 하나는 많은 대사량이다. 본인마저도 쑥스러워하며 콤플렉스라고 말할 정도였는데, 관객이 캐릭터를 심층적으로 이해할 수 있어 자주 활용한다. 하지만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에서는 대사를 생략하고 영상 미학을 담아 관객이 질문을 던지고 답을 구하도록 했다. 오히려 침묵을 통해 캐릭터의 이야기에 경청할 수 있게 해 특별하다.
또한 화자인 배우를 비전문 배우로 설정해 몰입을 유도한다. 독특한 부성애를 보여주는 타쿠미 역의 오미카 히토시는 <우연과 상상>의 제작진 출신이다. 이번 영화에도 장소 헌팅 운전사로 참여했다가 극적으로 캐스팅되었다. 자연스러운 표정과 연기를 선보여 꾸며낸 일이 아닌 진짜 일어난 일, 내 일 같은 공감이 놀라운 시너지를 만든다.
자연의 경고, 인류세라는 빚
영화는 인류세와 환경파괴의 경종을 울리는 주제 의식을 드러낸다. 어쩌면 인류를 향한 경고처럼 들렸다. 눈앞의 나무만 보고 전체적인 숲을 통찰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인간을 악으로, 자연을 또 다른 주인공으로 규정한 태도가 의미심장하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말처럼.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기 때문에 필연적인 책임 의식이 따른다. 글램핑장이 들어오게 되는 상류 쪽 오염수가 하류로 흘러들면 엄청난 피해를 입는 당연한 결과다. [무한도전-나비효과](2010) 편의 에피소드가 떠오른다. 사소한 습관이 나비효과가 되어 돌아오는 결과와 일맥상통한다. 상생발전, 균형 발전 보다 현재 이익에만 급급해서 미래를 바라보지 않은 잘못 끼운 단추 같다.
때문에 인물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배경(자연)을 유심히 살피게 되는 유려한 미장센이 압도적이다. 자연을 인식하게 한 오프닝과 클로징의 트레킹 숏이 백미다. 소나무 숲과 하늘을 보여주는 롱테이크 신은 하나가 하늘을 올려다보는 시선과 같다. 깊은 숲속의 웅장함과 두려움, 자연의 아름다움이 경외감이 들 정도다.
이와 반대로 불편하게 하는 언밸런스한 현악기의 음악을 묘한 긴장감을 유발한다. 뭐든 정도가 지나치면 균형이 깨지고 분명히 문제가 생기게 마련이다. 영화가 끝나도 쉽게 일어서지 못할 미묘하고 복잡한 마음은 머리로는 알지만 실천하는 데는 먼, 게으름의 당연한 결과인 것 같아 서늘했다. 현세대는 미래세대에게 인류세를 유산으로 남겨 지울 수 없는 고통을 짊어지게 할 것인가. “그럼 사슴은 어디로 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