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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혜령 Apr 15. 2024

<정순> 엄마, 아줌마, 이모, 노동자로 불렸던 이름값


그저 사랑을 믿었던 정순     


오래전 남편과 사별하고 홀로 키운 딸 유진(윤금선아)이 결혼을 앞둔 정순(김금순)은 누가 핀잔을 줘도 싫은 내색 없이 생글생글 잘 웃는 성격이다. 공장에서는 모두가 흰 위생복과 모자를 쓴 채 기계의 부품처럼 반복된 일상을 살아가는데 익숙하다. 이름보다 이모로 자주 불리지만 정순이라는 이름처럼 맑고 고운 심성의 따뜻한 사람이 바로 정순이다.     


그러던 어느 날 숫기 없는 신입 영수(조현우)가 정순의 마음에 들어왔다. 공사장을 전전하다가 무릎을 다쳐 지방의 공장에 겨우 취업할 수 있었다는 사연을 들으니 자꾸만 눈에 밟힌다. 어딘지 모르게 챙겨주고 싶은 순박한 얼굴과 적응하지 못해 헤매는 어리숙한 행동이 싫지만은 않았다.      

둘은 가까워져 잦은 데이트를 즐겼고 연인이 되었다. 오랜만에 정순을 살아 있음을 느꼈다. 자식 결혼시키고 나니 한시름 놓게 생긴 걸까? 힘들었던 아줌마의 삶에도 봄이 오는 건가? 정순은 요즘 행복하기만 했다. 그러나 평화롭고 아름다웠던 일상은 길지 않았다. 영수와 찍은 비밀스러운 영상이 공장 식구들에게 퍼져 곤욕을 치르게 된 것이다.      


어쩔 수 없었다는 영수의 무책임한 행동에 화가 났다. 자신을 깔보던 어린 공장 관리자 도윤(김최용준)의 도발에 맞서려던 행동이었다고?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날 이후, 정순은 모든 것을 놓아 버리고 집에서 두문불출했고 깊고 어두운 동굴 속으로 침잠해 버렸다. 달콤한 행복을 맛본 대가가 이리도 큰 건지 참담한 심정이었다.     


엄마, 이모, 아줌마 보다 정순     

정지혜 감독은 식품공장 아르바이트를 하며 중년 여성들과 시간을 보낸 경험이 영감으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이후 우연히 디지털 성범죄를 조사하던 중 젊은층만의 문제와 피해, 고통이 아님을 직시하고 세대를 넓혀 지금의 시나리오로 완성할 수 있었다고 했다.     


재개발 문제로 투쟁하고 있는 시장 상인 오복(정애화)이 성폭행을 당하고 모진 풍파를 견디는 <갈매기>와 유사성을 보이지만 <정순>은 한 단계 진화한 여성 캐릭터이며 이름이 전면에 등장한다. 정순을 살아 숨 쉬는 리얼한 인물로 만들어 낸 건영화 <69세>, <갈매기>, <경아의 딸>의 바통을 이어 받으면서도 통쾌한 결말로 깊은 인상을 남긴다.      


오롯이 배우 김금순의 몫이다. <울산의 별>로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 올해의 배우상을 수상한 김금순이 전혀 다른 캐릭터 정순을 맡여 열연한다. 모든 것을 홀로 감내해야만 했던 중년 여성이 험한 일을 당한 후 칩거하다가 서서히 주체성을 회복하는 과정을 쫓는다. 첫 장편 주연인 <정순>은 한국 영화에서 주인공이기보다는 조연, 단역에 익숙한 중년 여성의 사랑과 삶의 이야기를 전면에 내세웠다. 유진 역을 맡은 윤금선아는 김금순과 모녀 사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닮았는데 엄마가 무너지자 엄마 같은 딸이 되어 독려한다.     


상처 입었지만 털고 일어나는 정순     

왜 여성 피해자가 다수인 성범죄는 언제나 홀로 힘겨운 싸움을 해야 할까?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연예인 동영상 유출 사건의 피해자인 여성은 ‘물의를 일으켜서 죄송하다’며 눈물의 기자회견을 해야 했다. 동의 없이 타인을 몰래 찍고 유포하는 게 범죄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성범죄 피해자인 여성이 가족들에게 2차 가해를 당하거나, 주변의 괄시를 당하기도 했다. 피해를 입었지만 상처와 아픔을 혼자 끌어안아야 하는 상황이 현실로 여겨졌다. 행여나 보복이 두려워 고립을 자초하거나 이사를 가기도 했다.     


<정순>도 영상이 공장 내 유포된 후 얼굴을 들지 못해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는 상황이 등장해 답답함을 유발한다. 하지만 유진의 적극적인 행동으로 정순을 서서히 일으킨다. 유진의 직장까지 영상이 퍼지자 사건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수사당국에 강력한 조치를 요구한다. 선처를 부탁하는 영호의 간절함에 금순이 흔들릴 때도 단호히 법으로 응수한다.     


‘사적 영상 비동의 유포’는 엄연한 범죄이지만 여전히 심각성이 인식되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합의된 일이라고 해서 마음대로 공유해도 괜찮다는 뜻이 아니지만. 손가락 몇 번 두드리는 행동 하나가 피해자의 삶에 영원한 디지털 타투를 새긴다. 온라인상의 흔적은 쉽고 빠르고 집요하게 퍼져 영원히 박제된다. <경아의 딸>에서는 혼자서 삭제할 수 없어 디지털 장의사의 도움이 절실한 장면이 등장하는데, 피해자가 사비를 털어 끝까지 지워내야 했다. 수습까지도 고스란히 피해자의 몫이다.     

‘정순’은 무너졌으나 주저앉지 않고 일어선다. 수치심에 움츠러들었지만 와신상담해 당당히 맞선다. 정순이 영호의 여관방 앞의 노숙자에게 옷을 벗어주는 행위, 동영상 속에 등장하는 ‘지나가’를 부르는 장면, 운전을 배우는 성장은 의미심장하다. ‘지나가’는 영화를 위해 만든 노래지만 가사를 곱씹을수록 정순의 마음과 인생, 앞으로의 미래를 축약한 절절함이 전달된다.     


꾸준히 이와 같은 소재의 영화들이 만들어지는 데는 해결되지 않는 답답함과 지속적인 관심과 법 개정이 시급하다는 소리다. 범죄의 사각지대에 놓인 여성의 성범죄는 매년 늘어나지만 제대로 수사나 해결되지 못한다. 신고를 꺼리는 피해자의 입장과 그럴 수밖에 없는 사회적 시선도 한몫한다.      


영화는 되도록 피해자의 목소리에 집중하려 한다. 심각한 내용을 사려 깊게 다루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엄마, 아줌마, 노동자라는 틀에 갇힌 한 여성이 자신의 이름을 찾아가는 모험기로도 읽힌다.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사람도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힘찬 태도이자, 대한민국 중년 여성의 사랑, 분노, 각성, 극복을 그린다. ‘정순’의 고유한 이름값. 한 인간으로 확고하게 살아가는 어느 순간, 조용히 회복되는 일상이 소중히 담겼다.



+디지털 성범죄의 또 다른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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