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관음의 시선으로 그린 백색공포다. 한 가족의 일상을 마치 CCTV, 브이로그(영상일기)를 보듯 지켜보게 만드는 힘을 유지한다. 갓난아이의 잦은 울음소리는 은근한 불안함을 유발한다. 불편하고 불쾌하고 시끄럽다. 모두가 알고 있지만 입에 올리지 않는 무엇. 다 보고도 못 본 척 자신만의 낙원에서 평안을 누리고 있다.
오프닝에서 5분 정도의 암전으로 희생된 유대인을 향한 묵념처럼 스며든다. 그러고는 목가적인 풍경이 등장하고 한가롭게 소풍 나온 가족의 모습을 보여준다. 군인 루돌프가 아우슈비츠의 잔혹한 일과를 마치고 바로 옆의 관사로 돌아오는 장면은 충격적이다.
아우슈비츠의 벽과 회스의 집 사이는 종이 한 장처럼 얄팍하게 다뤄진다. 모든 것이 대조적이다. 그림같이 평온한 가족은 괴리감을 만든다. 재잘거리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지저귀는 새소리, 싱그러운 꽃과 과일이 가득한 풍요로운 정원이 익스트림 클로즈업 숏에 담겨 있다. 시각적으로는 아름다운데 소리에 현혹되어 담장 밖을 궁금하게 하고 공포감을 극대화하는 도발적인 관점이다.
평범한 가장이자 대량 학살자
독일 장교 루돌프 회스(크리스티안 프리델)는 자기 전 동화책을 읽어주고 수영이나 낚시도 가르쳐 주는 다섯 아이의 아빠이자 성실한 가장이다. 아내 헤트비히(산드라 휠러)를 끔찍하게 사랑한다고는 말 못 하지만 존중한다. 다섯 아이를 낳아주고 길러주는 대신 평온함을 약속했다. 회스는 아내를 ‘아우슈비츠의 여왕’이라 부른다.
헤트비히는 17살부터 꿈꿔온 전원생활을 3년 만에 꾸려낸 자부심이 강하다. 최근 친정엄마가 찾아와 아름다운 집을 소개해 드렸다. 그러다 보니 또 한 번 자부심이 차오른다. 직접 농작물을 길러 신선한 식탁을 꾸리고, 더운 여름이면 수영장에서 아이들이 놀 수 있게 할 작은 천국을 내 손으로 가꾸었다니. 헌신의 결과인 것 같아 뿌듯하다.
우리 집 밖이 무엇이든 상관없다. 우리 집만 안전하면 된다. 일부러 담장 건너의 일은 신경 쓰지 않으려 한다. 이탈리아 여행 계획, 달콤한 티타임을 즐기고, 정원을 가꾸면 그만이다. 전쟁이 끝나면 조용히 농사짓고 살기로 남편과 약속했다. 그때까지 우리 가족은 아우슈비츠 낙원에서 잘 살아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루돌프는 나치 수용소의 소장이다. 성실하고 완벽하며 타의 귀감이 되는 모범적인 인물이다. 어릴 때부터 말을 좋아하는 말 애호가다. 라일락 관목 하나까지도 소중히 여기는 성격이다. 최근 오라니엔부르크로 전출 명령이 떨어져서 걱정이다. 직업상 전출은 당연하지만 헤트비히가 원하지 않자 홀로 옮겨갔다. 진급과 함께 가족과 잠시 떨어져 지내야만 한다. 일생일대의 가장 큰 위기가 바로 지금인 것만 같다.
보여주지 않고도 다 보여주는 영화
영화는 스칼렛 요한슨과 함께 한 <언더 더 스킨> 이후 10년 만에 신작을 낸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 작품이다. 마틴 에이미스의 동명 소설을 각색했다. 제76 회 칸국제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받은 이후 제96 회 아카데미시상식 국제장편영화상과 음향상을 받았다. 아이의 시선으로 그린 아우슈비츠의 참혹한 모습을 짚은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의 브루노에 가족이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회스가(家)를 우화적, 동화적으로 다룬 영화라 하겠다.
직역하면 흥미로운 공간이란 제목은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를 둘러싸고 있는 40㎢ 즉 안전지대를 뜻한다. 당시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지역의 땅에 수용소를 짓고 농사를 지어 이익을 얻었기 때문에 금전적 이득이란 뜻도 품는다.
‘루돌프 회스’는 강제수용소의 건설, 대량 학살이 가능한 가스실 방법 개발 등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이다. ‘태우고 식히고 비우고 채우고’ 소각실 건립, SS 친위대의 혁혁한 공을 세웠다. 악랄함을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지만 은연중에 선명히 드러난다. 장화에 묻은 피, 연회장의 천장을 살피며 가스실의 설계를 떠올리는 서늘함이 예다. 담장 넘어 들리는 끔찍한 절규와 울음, 고함, 무자비한 총소리, 바람에 실려 날아오는 검은 재, 낚시 중 이상한 덩어리가 그대로 떠내려 오더라도 당황하지 않는다.
영화 속 회스는 악마의 이미지는커녕 명령에 복종하는 군인, 규칙적으로 출근하고 해야 할 일을 퇴근 시간 맞춰 끝내는 보통의 직장인처럼 묘사되어 있다. 스스로를 평가하는 자세도 엄격하다. 언제나 근무 중이다. 일을 집으로 가져오는 일중독자지만 가족을 위해 더 많은 시간을 가지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자상한 남자다.
그가 쓴 수기를 모은 《헤스의 고백록》(2006)을 읽어보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인면수심, 악인, 소시오패스, 사디스트, 광인이 아니다. 선량한 가장으로서의 책임감과 의무감, 정직하게 직무에 충실한 성실함이 엿보인다. 수기의 끝에는 죄책감에 시달렸던 똑같은 인간이지 악마가 아니었다고 호소한다.
가족의 행복과 안락을 위해 희생하는 괴로움을 은근히 토로한다. 문득 ‘이 행복이 언제까지 계속될 수 있을지’ 떠올리며 집 안에 있을 때도 즐기지 못하고 어두운 분위기에 젖어 든다고 고백한다. 이는 같은 시각 집안 곳곳을 직접 점검하며 소등과 문단속을 철저히 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사과 뿌리는 소녀, 작은 양심
안전지대에는 목격자가 존재했다. 집안의 정원사. 가정부의 회고와 열화상 카메라로 담긴 사과 심는 소녀는 실존 인물이다. 소녀는 밤바다 수용소 포로를 위해 사과를 몰래 숨기며 저항운동을 펼쳤던 ‘알렉산드라 비스트로니-코우오제치크’다.
수용소에는 노역으로 이용되는 유대인도 있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모습은 영화 속 어떠한 장면보다 밝게 빛나며 따뜻한 온기가 느껴진다.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은 인류의 책임의식이 빵 부스러기 대신 사과를 흘려서라도 찾고 싶은 작은 양심일 거라고 생각한다. 영화에는 세 번 검정, 빨강, 하얀 화면이 등장하는 데 이를 조합해 보면 나치의 하켄크로이츠 문양이 연상된다.
철저히 계산되고 의도된 사운드는 베를린 지하철, 함부르크 축구 경기장, 2022년 파리 폭동 등 전 세계에서 일어난 소리를 수집했다. 소리를 끄고 보면 그저 전원 풍경을 배경으로 평범한 집을 담은 가족 드라마처럼 보인다. 공포영화의 완성은 소리, 음향이라는 말을 실감하는 이유다.
지금까지 수많은 홀로코스트 소재 영화가 있었지만 극명한 차별점이 드러난다. 보여주지 않음으로 인해 다 보여주고 있는 미덕. 인간의 발가벗겨진 폭력성을 확인하는 영화가 바로 <존 오브 인터레스트>다. 영화를 보고 나면 영화를 보기 전으로는 절대로 돌아갈 수 없는 체험의 여운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홀로코스트를 다룬 실존 인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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