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만난 동성 연인을 집으로 데리고 온 딸
서울 변두리의 마당 딸린 이층집에 사는 엄마(오민애)는 노후 준비는커녕 일자리를 전전하다 요양보호사로 생활비를 버는 여성이다. 얼마 전 대학 강사로 일하던 딸은 친구도 아닌 멀끔한 애를 집으로 데리고 들어와 한방에서 살을 비비며 잔다. 딸아이(임세미)는 평범한 직장과 가정을 꾸리고 살 생각이 없는 걸까. 다들 건장하고 능력 있는 남편감을 고를 시기에 자기보다 서너 살은 어린 여자애(하윤경)를 만나 데리고 살기까지 하다니. 언제까지 소꿉놀이를 할 건지, 딸을 묵묵히 지켜만 봐야 하는 엄마는 속이 타들어간다.
외로운 엄마는 제희(허진)를 돌보며 자신의 미래를 떠올린다. 화려했던 과거를 뒤로하고 치매에 걸려 혈혈단신인 노인. 지금까지야 기부금 명목으로 요양원의 VIP 대접을 받았지만 병마는 제희를 쉽게 놓아주려 하지 않는다. 세상에서 잊힌 듯 보였지만 오랜만에 찾아온 취재진 앞에서 맥없는 제희를 완전히 집어삼켜 버렸다. 가족도 없이 세상에 혼자, 기억할 수 없는 과거를 뒤로하고 현재는 요양원에서 짐짝 취급을 받는 신세일뿐이다.
엄마는 자기 몸 아픈지도 모르고 제희를 살뜰히 챙기고 씻긴다. 물품을 아껴 쓰라는 잔소리와 눈치에도 제대로 돌보면 나와 내 딸의 미래가 보상받는다는 약속을 한 것처럼 말이다. 어쭙잖은 이타심이라고 해도 좋다. 부당한 일을 겪은 타인을 무시하면 언젠가 본인에게 돌아온다는 불안한 연대일지도 모르겠다.
결국 엄마는 지방 요양원으로 떠밀려 가게 될 제희가 마음 쓰여 모실 방법을 찾아 고군분투하면서도, 동료 강사 해직에 맞서 시위를 벌이는 딸에게는 남의 일에 눈 감으라 말한다. 내 딸만은 평범한 삶을 살길 바라는 부모의 마음인 거다.
막연한 두려움, 어쩌면 우리가 겪을 일
<우리집>, <우리들>, <애비규환>을 제작한 웰메이드 제작사 아토 영화다. <시>의 스크립터 출신으로 단편 <베트남 처녀와 결혼하세요>(2005), <목욕>(2007), <춘정>(2013) 등 꾸준히 이주여성, 성소수자, 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의 이야기를 담아 온 이미랑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 CGV상, 올해의 배우상(오민애)을 시작으로 제49회 서울독립영화제 관객상, CGK촬영상(김지룡)과 제12회 무주산골영화제 감독상을 연이어 받아 데뷔와 동시에 여러 타이틀을 달게 되었다.
<딸에 대하여>는 사회적 약자, 소수자로 불리는 여성, 노약자, 비정규직, 무연고자 등을 다루며 가족과 공동체의 의미를 되새겨 보는 시간을 마련한다. 많이 배운 엄마는 많이 배우게 한 딸이 제희와 같은 길을 걸어갈지 모른다는 공포가 만연하다. 동성 연인과 정상가족이란 범위 안에서 가정을 꾸릴 수 없는 딸은 제희처럼 궁핍하게 늙어갈까 불안하다. 스스로 깨어 있다고 생각했던 엄마도 내 자식의 미래 앞에서는 이중성과 모순성이 앞서는 당연한 마음이다.
그래서일까. 이상하게도 영화가 끝나면 ‘딸’보다 ‘엄마’가 떠오른다. 엄마가 바라보는 시선은 타인을 이해하려는 작은 시도이며 나아가 관객의 시선과 동일시된다. 특정인에 관한 이야기라기보다 우리 모두에 대한 이야기로 확장된다. 겉만 보면 퀴어 영화로 보이겠지만 모녀, 청년, 노년 서사가 균등하게 들어가 있다. ‘나라면 어땠을까’ 계속해서 맴도는 질문은 여러 날 마음속에 머문다.
원작을 그대로 옮겨 얻은 명징한 효과
김혜진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했다. 영화와 문예 창작을 전공한 이미랑 감독은 소설 언어와 영화 언어의 차이를 명확히 알았다. 원작을 영상화하는 과정에서 큰 각색 없이 시청각 요소, 쇼트와 쇼트의 병합으로 영화화했다. 활자로 표현된 내면의 성찰을 말하지 않아야 더 잘 보이는 영화의 힘을 믿었다. 더하기보다는 덜어내는 데 중점 두었다. 인물마다 프레임을 다르게 설정하거나 장소, 시간마다 조명에 변주를 주면서 섬세한 감정을 영화만의 이미지로 구현했다.
또한 원작은 엄마의 1인칭 시점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속마음이 구구절절 드러나지만, 영화는 오히려 말이 없는 극명한 차이를 두었다. 말이 없어 답답한 엄마의 마음이 오롯이 투영되어 오히려 관객에게 말을 거는 듯하다. 생판 모르는 남을 지지하는 딸, 오래 모신 어르신을 모른 척할 수 없었던 엄마. 언뜻 DNA의 유전처럼 보일지 몰라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언제라도 내 일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에서 출발한 작은 행동이다.
누구나 찾아올 노년을 중심에 두고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공감을 이끌어낸 자연스러운 연기 앙상블이 빛난다. 주연, 조연, 단역까지 누구 하나 들뜸 없이 조화롭다. 무엇보다 영화 전체를 상징하는 엄마, 평범한 중년 여성 자체로 분한 오민애는 그동안 쌓아온 비범한 역할을 지우고 베테랑 경력자의 면모를 불쑥 선보인다. 영화 <파일럿>의 팬덤 엄마, 시리즈 [돌풍]의 영부인과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릴 정도다. 감정을 꾹꾹 눌러 담기만 하느라 깊은 한숨과 피로가 쌓인 퍼석한 얼굴이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인터뷰] 영화 <딸에 대하여> 오민애 배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