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혜령 Jan 18. 2019

<버드 박스> 넷플릭스 영화

묵시록적 세계에서 찾는 희망,

© 버드박스 , 수잔 비에르, Bird Box, 2018


※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기 눈가리개를 해야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무것도 보아서는 안되고 오로지 자신의 신념을 따라가야만 하는 사람들이 있죠. 암울한 디스토피아, 생존해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칠드런 오브 맨>과 '존 크래신스키' 감독의 <콰이어트 플레이스>가 생각나기도 합니다. 눈이 먼 사람들의 생존기를 다룬 <눈먼 자들의 도시>도 오버랩됩니다. 위의  작품들과 유사한 소재를 지녔지만 독창적인 세계관을 구현한 영화입니다.


© 두 아이를 들쳐 엎고 가는 산드라 블록의 강한 모성이 멋지다


영화 <버드 박스>는 작년 12월 넷플릭스에 공개되며 역대 최고 오프닝을 찍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입니다. 출판을 목적으로 쓴 소설이 아닌 음악가 겸 작가 '조쉬 맬러맨'이 낸 소설을 바탕으로 하며, 현재 '버드 박스 챌린지'로 온라인을 뜨겁게 하고 있기도 하죠.


영화 속 설정처럼 눈가리개에 의존해 집 밖을 나가고 창문을 가린 차를 몰고 오직 내비게이션으로 만 목적지에 도착하는 무모한 인증 탓에 넷플릭스는 경고 조치를 내리기도 했습니다.




보이는 것에 현혹되지 말 터이다!

©  <버드 박스>는 너무 많은 것을 보려고 욕심부리다 멸망하는 인류를 향한 일종의 경고 같다



<버드 박스>의 설정은 간단합니다. 알 수 없는 존재에 의해 파괴된 포스트 아포칼립스.  다섯 살배기 아이 둘을 데리고 배를 탄 여자의 극한 상황과 5년 전 이일이 벌어지던 날을 교차해 보여줍니다. 그렇게 만나게 된 현재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절망 그 자체죠. 자기 멋대로 세상을 망쳐버린 인간을 벌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묵시록적 세계관을 따르면서도 그 존재는 말끔히 보여주지 않습니다. 악령인지, 외계 생명체인지는  관점에 따라 달리 해석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들 어떻게 보셨나요?)



5년 전 처음 맞닥트린 존재는 인간의 눈을 멀게 합니다. 뚜렷하게 보이지 않았지만 존재를 본 순간 무엇 때문인지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되죠.  마치 바다를 건너는 선원들을 아름다운 목소리로 유혹해 망부석으로 만들어 버린 '사이렌이 생각납니다. 앞을 보이지 않는다면 사형선고나 다름없습니다. <버드 박스>는 너무 많은 것을 보고 듣느라 잃어버린 원초적 감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즉, 눈에 보이는 것에 현혹되지 말고 보이지 않는 것을 더 봐야 한다는  영화입니다.




삶에 대한 물음을 찾아서..

© 보이지 않는다면  청각이나 촉각 등 다른 감각이 발달할 것이다



영화는 삶의 가치와 믿음에 대해 들려줍니다. '톰(트래반트 로즈)'은 아이들에게 자신이 나무 꼭대기에 올라가 보았던 일화를 들려주며 이 상황은 걷 끝 날 거란 희망을 심어 줍니다. 반면, 매사에 엄격한 맬러리는 살아남는 게 중요하다며  쓸데없는 희망고문은 하지 말라 경고합니다. 이는 인류의 수천 년간 이어온 가치에 대한 딜레마 같습니다.  현실에 쫓겨 (생존) 사느냐, 이상(꿈)을 실현하기 위해 살아가느냐 그 갈림길에서 말이죠.



우리는 왜 사는 걸까요? 영화는 이 장면을 통해 삶을 깊이 고민하게 합니다. 인생은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닌,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꿈꾸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믿을 수 없다면 무슨 소용일까요?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은 믿음이 없다면 죽고 말 겁니다. 톰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는 아이들을 잃을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언제나 사랑해 주는 것과 같다고.. 아이들은 꿈꾸고 희망을 품고 엄마를 가질 자격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종말이 오더라도 인류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찾을 거란  주제관을 아우르는 장면입니다.




버드 박스의 의미는?

© 집에 갇혀지내는 인류는 버드 박스를 상징한다



맬러리와 아이들은 집을 떠나며 새를 박스 안에 담습니다. 새는 미지의 존재를 알려주는 신호이자, 새장이 아닌 박스에 담겨 앞이 보이지 않는 인류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박스 안에 담겨 자유롭지 못한 아이들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에 당도한 안전가옥에서 새들을 날려주는 장면은 자유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앞을 볼 수 없는 세상에서 시각장애인은 더 이상 소수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생존확률이 높은 정상인이 됩니다. 그렇게 우리는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불편함을 영화로 대신하며 소수자가 살아갈 세상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 영화는 누가 희생할지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과연  타인을 위한 희생은 어디까지 가능할까?



사실 임신 중이었던 맬러리는 극적으로 아이를 낳았고, 같은 임산부였던 올림피아가  남긴 아이도 거둔  보호자입니다. 아이들의 실질적 엄마인 맬러리는  오직 생존을 위해서만 아이들을 훈육할 뿐, 사랑을 나눠주지 않는데요. 그 이유는 감성에 빠져 자칫 위험을 자초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엄마라는 호칭 대신 '맬러리'라 부르게 했고, 이름도 지어주지 않고 '보이'와 '걸'로 부르게 되죠. 그래서 아이들은 지시사항을 따라야 하고, 자유로운 사고와 행동은 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영화는 강 하류의 안전가옥을 찾는 지난한 과정을 겪고 희망을 찾습니다. 그곳은 시각장애인들이 만들어 놓은 공동체로 보이지 않은 것의 아름다움(사랑, 믿음, 연대)을 무가치하게 다뤘는지 생각하게 하죠. 조건 없이 이들을 품어주는 인류애(愛)를 통해  버드 박스의 의미를 돼새겨봅니다. 마치 새장에 전기가 흐르더라도 새장 속의 새가 안전한 원리 '패러데이 새장'이며,  그들이 만든 큰 둥지는 또 하나의 버드박스라 할 수 있죠.




© 세상에 종말이 오더라도 사랑이 있다면..



모성 없이 오직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하던 맬러리는 아이들의 이름을 지어주며 강한 모성을 가진 엄마가 됩니다. 이 쯤에서 세상에는 못된 놈들과 죽은 자들. 이렇게 두 종류만 있다며 염세적으로 말하던 '더글러스(존 말코비치)'를 떠올려 봅니다. 아닙니다. 영화의 끝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을 노래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영화 <버드 박스>는 눈을 감으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을 이야기합니다.  분명히 있다고 느끼지만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형이상학적인 사랑, 믿음, 연대, 꿈을 이어갈 때 인류는 생존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새장의 새들은  인간 내면의 가치가 사라지는 것이 안타까워하는 신의 마지막 경고일지도 모릅니다.





평점: ★★★★★

한 줄 평: 꿈을 잃어버린 사람은 죽은 거나 다름 없다





매거진의 이전글 <미래의 미라이> 믿고 보는 '호소다 마모루'월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