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장cine 수다

<달팽이의 회고록> 자기계발서 읽기 보다 이 영화를 봐

by 장혜령

그레이스(새라 스누크)는 달팽이 실비에게 지금까지의 기구한 인생을 들려주기 시작한다. 쌍둥이 길버트(코디 스밋 맥피)와 외롭지 않게 세상에 왔지만 태어날 때부터 갈라진 입술, 수술 자국은 학교에서 놀림의 대상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그때마다 길버트는 그레이스를 지켜주며 소울메이트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두 개의 영혼과 하나의 마음을 가진 존재라고 믿으며 늘 붙어 다녔다.


하지만 남매의 일생에 불행한 일들이 계속된다. 출산 후유증으로 죽은 엄마의 뒤를 이어 수면 무호흡증으로 아빠까지 사망하자 남매의 생계는 막막해져만 갔다. 졸지에 세상에 둘만 남게 된 길버트와 그레이스는 각각 다른 가정으로 입양되어 떨어져 지내게 된다.

common (5).jpeg

날마다 서로를 더욱 그리워하며 보낸다. 길버트는 입양 부모의 학대 속에도 묵묵히 편지를 주고받으며 그레이스를 만나러 갈 시간을 고대한다. 근근이 하루를 버티며 외로움을 달래던 순간 그레이스는 우연히 핑키(재키 위버)라는 이름의 괴짜 할머니를 만나 친구가 된다.


외롭고 고요했던 날도 잠시, 핑키와 남자친구 켄이 있어 그나마 버틸 수 있었다. 그러나 잠시 멈추었던 불행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레이스의 결혼식을 앞두던 날,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져 그레이스는 다시 무너진다. 도저히 회복할 수 없는 저 깊은 바닥으로 떨어져 어둠 속에 숨어들게 된다.


유리멘탈 아웃사이더가 세상과 맞서는 법

common (8).jpeg
common (9).jpeg

<달팽이의 회고록>은 CG, AI 기술 없이 100% 스톱모션 클레이 애니메이션으로 완성한 영화다. 7,000여 개의 오브제, 135,000장의 캡처로 시간을 고스란히 담은 인고의 깊이가 감지된다. ‘애덤 엘리어트’ 감독의 호주 애니메이션으로 오랜 세월 기획한 삼부작의 삼부작 (Trilogy of Trilogies)’ 9편의 기획 중 7번째 작품이다. 8년의 제작 기간 동안 하나하나 수작업으로 완성한 작품은 경이로움 자체다. 숏폼과 AI로 쉽고 빠르게 완성된 도파민 터지는 영상에 지친 현대인에게 느림의 미학, 아기자기한 소품의 질감이 힐링을 선사한다.


새라 스누크, 에릭 바나, 재키 위버, 코디 스밋 맥피 등 호주 출신 배우의 목소리 연기가 인상적이다. 애니메이션계의 칸영화제로 알려진 제48회 안시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 대상(크리스탈 작품상)을 받았으며, 제26회 부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 국제경쟁 장편 대상, 제97회 아카데미시상식 장편애니메이션 부분에 노미네이트되었다. <월레스와 그로밋>의 아기자기한 귀여움과 <크리스마스의 악몽>의 그로테스크한 분위기가 적절히 섞인 웰메이드다.

common (1).jpeg

화려한 수식어답게 독특한 그림체와 스타일이 눈길을 끈다. 우울하고 겁에 질린 표정의 그레이스는 비극을 달고 다니는 존재다. 좋아지기는커녕 나쁜 일만 가득한 하루가 반복되면서 무너지는 마음을 붙잡아준 것은 사랑의 힘이었다. 폭력에 노출되던 한 소녀가 오빠와 동네 할머니로 인해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과정은 감독의 정체성과 맥락을 같이 한다.


감독은 자신과 가족, 주변인의 인생을 반영해 길버트, 핑키, 그레이스를 완성했다. 세미 호더(Semi Hoarder)였던 어머니를 이해하고 분석하며 상실의 감정을 알아갔다. 친구 중에 선천적 구개열로 쉽지 않은 성장 과정을 겪었던 수집가 친구를 떠올렸다.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회복하는 방법을 함께 고민하게 되었다.


어느 자기계발서보다 효과 만점 치료제

common (2).jpeg

달팽이는 긍정과 순환을 상징한다.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나아가는 달팽이를 모티브로 삼아 과거에 머물지 말자고 다짐한다. 그레이스는 죽은 엄마가 좋아한 달팽이를 좋아하는 일을 넘어서 집착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했다. 달팽이와 관련된 상품이라면 뭐든지 모이던 강박으로 집은 점차 좁아졌다. 급기야 금전적 여유가 없으면 훔쳐서라도 소유해야 마음이 놓일 지경이었다. 종국에는 달팽이 집 속으로 기어들어가 밖으로 나오지 않는 행동으로 세상과 단절해 버리기도 했다.


그러나 우울감과 자존감, 자기효능감이 극히 떨어진 그레이스가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곁을 지킨 친구들이었다. 서로의 감정은 돌고 돌아 타인과 상호작용을 이루기 때문이다. 자기혐오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만난 사람들로 다시 상처받고 치유하기도 했다. 온화한 가정에서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며 성장하지 못했지만 길버트와 할머니 핑키, 외로움을 나눌 달팽이 실비가 있어 버틸 수 있었다.


영화를 보는데 시리즈 <폭싹 속았수다>의 영제가 따올랐다. ‘When Life Gives You Tangerines’는 미국 속담에서 유래했다. ‘When Life Gives You lemons, make lemonade’ (삶이 네게 레몬을 준다면 레모네이드를 만들어 먹어라)의 변형이다. 떫고 고된 시련이 다가온다고 해도 극복하는 낙관적인 태도를 잃지 말라는 격려인 셈이다. 이 격언처럼 세 캐릭터의 이야기가 감독의 자전적 경험과 만나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간 작품이다. 그들로 인해 삶이란 멋진 행복을 모아 만든 거대한 태피스트리라 생각하게 된다. 슬픔, 상처, 분노를 꽉 움켜쥐던 과거를 놓아주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법을 배운다.


혐오와 차별이 가득한 세상에 따스한 마음을 전하는 감동적 메시지도 포함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지금 당장 표현하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늘 곁에 있어 존재감을 느끼지 못하는 가족, 친구, 동료, 연인과 함께 할 시간은 길지 않다는 말이다. 자기계발서 여러 권 읽는 것보다 나은 삶의 성찰과 희망을 한 편에 담았다. 보편적인 주제를 독창적인 방식으로 전해 여운이 길게 남는 영화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마리아> 새장에 갇힌 새가 노래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