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회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 <윤희에게>는 아날로그, 퀴어, 여성 연대성이 돋보이는 영화다. 한국과 일본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답게 올해 영화제의 기본 이념인 다양성과 연대를 자연스럽게 추구하게 되었다. 엄마의 마음을 딸이 알아주는 세대 공감이 전반에 깔린다. 아날로그적인 감수성도 소환한다. 손 편지, 우체통, 필름 카메라 등 엄마와 딸이, 그리고 연인과 연결할 수 있는 매개는 곳곳에서 포착된다.
나이가 들수록 더욱 깊어지는 김희애의 연기는 배우 자체로 윤희를 맞이했다. 윤희 자체로 변신한 메서드 연기로 영화의 중심을 잡는다. 이번 영화가 데뷔작임을 믿을 수 없는 김소혜는 자신감 넘치고 능동적인 딸로 엄마 윤희의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준다. 새봄의 남자친구 역을 받은 성유빈은 어린 나이부터 쌓아올린 연기 내공을 바탕으로 약간 힘을 뺀 연기가 오히려 활력을 준다. 마치 일본에 살고 있는 또 한 명의 윤희 같은 나카무라 유코의 사려 깊음과 고모역의 키노 하나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영화의 인장이다.
포기할 수밖에 없던 엄마의 사랑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이혼한 엄마 윤희(김희애), 사회의 편견에 쉽게 사그라든 엄마는 그저 빈 껍데기처럼 살아간다. 자식은 그런 엄마를 인지하지 못했다. “엄마는 뭐 때문에 살아?”라는 질문에 자식 때문에 산다라는 말로 답한다. 자식은 사랑임을 알면서도 이내 부담스럽다. 부모의 삶이 나로서 희생된 건 아닌지 괜한 죄책감도 드는 말이니까.
그런 사이 일본 오타루에서 한 통의 편지가 온다. 딸 새봄(김소혜)은 편지를 뜯어읽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연애편지인 것 같다. 엄마는 어떤 사람이었나 새삼 궁금해졌다. 엄마를 가장 잘 아는 사람, 삼촌과 아빠에게 묻는다. 하지만 삼촌은 알아서 뭐 하게란 말로 뭉뚱그릴 뿐이고, 아빠는 좀 외롭게 하는 사람이라 말한다. 새봄은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엄마와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내가 모르는 엄마를 만나길 기대하면서.
둘을 연결하는 또 다른 여성
여행을 통해 모녀는 서로를 알아간다. 낯선 곳에서 좀 더 솔직해진다. 몰래 숨어 피우던 담배도 마음껏 펴보고, 안 부리던 멋도 부려본다. 윤희는 오타루에서 준을 만날 생각에 설레고 걱정도 앞선다. 괜한 짓을 한 건 아닌지 노파심도 든다.
한편, 준(나카무라 유코)은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윤희에게 편지를 쓴다. 준은 유년시절을 한국에서 보냈다. 한국인 엄마와 일본인 아빠 사이에서 태어났으나 부모의 이혼 후 무관심한 아버지를 따라 일본에 왔다. 이후 고모 마사코(키노 하나)손에서 큰다. 고모는 엄마 같고 친구 같은 존재다.
준은 마음이 답답하거나 윤희가 꿈에 나올 때면 부치지 못할 편지를 썼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쓴 편지도 우연히 고모 손을 통해 윤희에게 전달된다. 엄마의 비밀을 딸이 눈치챈 것처럼 조카의 비밀을 고모가 눈치챈 것이다. 딸과 고모는 윤희와 준을 다시 만나게 해주는 오작교이면서 든든한 지원군이다. 한없이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는 자연 앞의 인간, 사회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해 포기한 젊음을 새봄과 마사코를 통해 위로받는다.
눈은 조용히 내려 세상을 하얗게 뒤덮는다. 오타루의 겨울은 유난히 길고 눈이 많이 온다. 눈은 아름답지만 인간을 무력하게 만든다. 세상과 단절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갖춘 곳이 오타루다. 사실 준은 한국에서 일본으로 도망 왔을지도 모른다. 눈 속에 파묻혀 아무도 찾지 못하게 꼭꼭 숨어버렸다.
영화 <윤희에게>는 과거를 상상하게만 할 뿐 플래시백 없이 현재진행형으로 나아가간다. 잃어버린 20년을 훌훌 털고 앞을 향해 나아가고픈 윤희의 의지치다. 윤희에게는 그동안 힘들었냐고 이제는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든든히 뒤를 지키는 새봄이 있고, 준에게는 고모가 있다. 아름다운 것만 찍는다는 새봄의 필름 카메라에 엄마의 웃음을 담는다. 훗날 그들은 현상한 사진으로 보며 더 단단해진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세상의 모든 윤희에게 새봄이 찾아오길 응원한다. 누구의 엄마로 기억되기 보다 윤희라는 예쁜 이름으로 불리는 날이 더 많아지기를.
평점: ★★★★
한 줄 평: 명확한 여성서사의 좋은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