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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혜령 Nov 22. 2019

<시빌> 욕망의 활화산을 건드려 본 적 있나요?

시빌, Sibyl, 2019, 저스틴 트리엣


영화 <시빌>과 <기생충>은 닮았다. 황금종려상을 받았던 올해 72회 칸영화제에서 경쟁을 벌인 것은 물론 제24회 부산국제영화제에 상영되며 호평을 받았기 때문이다. <기생충>이 하층 가족의 욕망을 담았다면, <시빌>은 의사와 환자의 관계가 전복되는 사이 거부할 수 없는 욕망이 잠식하는 과정을 담았다.


두 여인의 심리가 점점 상반된 상황으로 치닫는 상황, 시빌의 다층적 시점에 이입하게 되는 매혹적인 영화다. 거부할 수 없는 전반적인 아우라는 액자식 구성을 취해 혼란스러운 시빌의 심리를 묘사한다. 때문에 시빌의 과거와 현재, 집필 중인 소설 속 이야기가 계속해서 맞물리며 쉽게 파악하기 어려운 줄거리를 만든다.


소설 자체가 거대한 인생이라면 고쳐 쓸 수 있고, 내 의지로 다시 쓸 수도 있다. 내가 화자이자 주인공, 전지전능한 신이기 때문에 자신을 주제로 쓴 소설은 언제든지 바꿀 수 있다. 영화는 그 점에 주목한다.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인간성, 에고(ego)의 종합 시장이다. 시빌은 정신과 의사지만 다른 의사에게 상담받고, 알코올중독을 겪었으며, 과거의 트라우마에 완전히 벗어나지 못해 불안한 인간이다.



다층적인 시빌의 내면세계

<시빌> 스틸컷



시빌(버지니아 에피라)은 사회적으로 성공한 정신과 의사다. 남부럽지 않은 가정과 경제적 부를 누리고 있지만 겉모습일 뿐 속은 아무도 알 수 없다. 돌연 모든 상담을 접고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내면의 무엇이 튀어나왔을까?


시빌은 최근 떠오르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헤어진 남자친구 가브리엘(니엘스 슈나이더)과 엄마 생각에 힘들다. 술 때문에 고욕을 치른 시빌은 현재 금주중이다. 스스로 어떤 상황에도 맨정신으로 해결하려는 의지가 강하다 자부한다. 하지만 미세한 균열은 마고(아델 에그자르코)의 상담전화로 시작된다. 한 통의 전화는 잠들어 있던 시빌의 심리를 건드리는 트리거가 된다.


마고는 현재 임신 2개월째이며 아이의 아빠는 유명 배우다. 아이를 낳는다면 지금까지 쌓은 배우로서 모든 것이 무너질까 봐 두려운 신인이다. 그렇다고 혼자서 결정할 수도 없다. 도와달라는 마고를 외면할 수 없었던 시빌은 점점 마고의 심정에 이입하기에 이른다. 마치 마고의 상황이 내 상황 같아 외면할 수가 없다. 과거 자신도 비슷한 문제를 겪었기 때문이다.


최근 시빌은 소설의 소재를 고민하던 찰나, 신인 배우와 불륜 관계인 유명 배우, 그와 오랜 연인인 영화의 감독의 삼각관계, 솔깃한 이야기에 구미가 당긴다. 시빌은 마고의 상담을 토대로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동의 없이 녹취는 물론이고 환자의 사생활에 개입하지 않아야 한다는 규칙도 위반한다. 상담을 빙자한 인터뷰가 되더니 급기야 일상 자체를 흔들리게 된다. 의사와 환자의 관계는 이미 무너졌고 시빌의 일상을 좀먹는다.


둘의 관계는 겉으로 봐서는 알 수 없다. 마고가 시빌에게 도움을 청하는 듯 보이지만, 실질적으로 시빌은 소설 집필을 위해 마고를 만나야만 한다. 수평 관계를 넘어 전복되기에 이른다. 급기야 영화는 촬영 중인 화산섬에 시빌을 이끈다. 활화산은 긴장감과 폐쇄성이 큰 공간이다. 시빌의 일상을 넘어온 마고의 위력은 실로 대단했다. 시빌은 마고에게 잠식당하고야 만다.



인생이란 무대 위 배우는 결국 나

<시빌> 스틸컷


시빌은 겉으로는 번듯해 보이지만 깊은 슬픔을 간직하고 있었다. 옛 연인 가브리엘의 이별 선물처럼 얻은 아이 사이에서 아직도 방황하는 중이다. 다른 사람을 만났지만 결핍된 마음 때문에 늘 공허함에 시달린다. 과거 시빌은 낳지 말자는 가브리엘 말을 어기고 아이를 낳았다. 그렇게 태어나자마자 엄마를 비난하는 듯한 눈빛을 보내던 아이는 매번 버려질까 봐 전전긍긍한다. 점점 제 아빠와 비슷한 모습으로 커간다. 그 숨 막히는 진실을 애써 외면하고 살려고 했다. 가브리엘을 잊었다고 생각했지만 가장 가까이에 가브리엘은 항상 존재하고 있었다. 그래서 은연중에 아이를 멀리했을지도 모른다. 그 미묘한 차이를 아이는 눈치챈다.


<시빌>은 여성의 심리 변화뿐만 아니라 등장인물들의 욕망이 휘몰아치는 격정적인 영화다. 마고가 시빌에게 의지하는 듯 보이지만 실질적인 주도권은 마고가 쥐게 된다. 이상하게 꼬여버린 시빌의 역할극은 소설을 나와 현실 세계까지 잠식해 버린다. 점차 소설의 캐릭터를 동일시하며 이성을 잃어가고 급기야 선을 넘는다. 죄책감을 느낀 시빌은 옛 연인과 죽은 엄마에 대한 상처를 극복하지 못해 스스로를 파멸로 이끈다.


누구나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 시빌은 아이를 상담하던 중 자기만 방을 상상한다. 아이는 문을 잠글 수 있는 할머니 집 세탁실은 좋아한다고 말한다. 거기서는 마음껏 노래를 듣고 슬퍼할 장소라고 털어놓는 아이를 마주한다.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이 자기만의 방을 갖는 것은 돈과 함께 자유로운 생각과 집필을 위한 필요조건이라 말했다. 여성이 진정한 여성이 되기 위해서는 글쓰기로써 실현할 수 있다고 말한 것과 같다.


시빌은 돌고 돌아 내면에 확대경을 들이대고 자기만의 방을 만들었다. 점점 막장을 향해가고 있는 이야기에서 크게 화를 내지 않는 극중 여성들은 시빌의 다층적인 내면이자 소설을 쓰며 자가 치료 중인 시빌의 여러 자아인 셈이다.


저스틴 트리에 감독은 복잡 미묘한 심리묘사와 현실의 뒤엉킴을 통해 한 가지로 정의할 수 없는 내면을 표현하고자 했다. 자기 소설 속 캐릭터에 잠식당하던 시빌은 자신의 모습을 되찾았을까. 우아하고 강렬하다는 말로는 다 채울 수 없는 깊이감이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도 계속되는 영화다.



평점: ★★★☆

한 줄 평: 폭발하는 여성 심리의 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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