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과 스마트폰의 보급으로 더 이상 긴 글을 읽지 않는 시대다. 장편소설, 지면 신문은 구시대적 산물이 되기도 한다. SNS를 가까이 하면서 부터일까 긴 글은 피하게 된다. 쓰지도 않고 읽지도 않는다. 그 포맷은 카드 뉴스에서 이미지, 짤로 변했고, 이제는 영상으로 옮겨 왔다. 가끔 장편 영화보다 짧고 임팩트 강한 단편 영화를 선할 때가 있다.
<오늘, 우리>는 영화제에서 호평받은 단편 4개를 묶은 옴니버스 형식, 특히 제목이 <오늘, 우리>인 점이 의미심장하다. 오늘을 살아가는 여성의 일상,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일을 살아가야 하는 현실이 내 이야기 같아 공감 간다. 단편이 갖는 힘과 개인의 이야기가 곧 사회의 담론임을 일찌감치 입증하고 있는 단편들이 장편 하나 보다 더 깊은 울림을 지닌다.
오늘을 살아가는 여성의 세밀한 심리묘사가 돋보인다. 여성들은 타인의 감정을 공감하고 함께 연대하는 일에 익숙하다. 그래서 너와 나라는 선 긋기 보다 우리라는 범주의 아우름을 선호한다. 주제가 다른 네 편이지만 한 꼭지로 묶일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2박 3일>은 남자친구와 2주년을 맞은 지은(정수지)은 민규집에 방문한다. 하지만 며칠 전부터 분위기가 냉랭하다. 연락도 잘되지 않고, 바쁘다며 급히 나가버린다. 그래도 오늘은 2주년이니까! 집에는 들어오겠지 생각하며 하염없이 기다리게 된다. 하지만 남자친구는 외박했다.
그때부터 지은과 남자친구 가족과의 기묘한 동거가 시작된다. 이내 짜증이 난 민규는 헤어지자는 말을 내뱉는다. 지은은 어이가 없다.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냐고 울먹여 보기도 하고, 화를 내보기도 했다. 집안 문제 때문에 힘들어서 그런 거겠지 자신을 타일러 보기도 했다. 하지만 밑도 끝도 없는 통보에 지은은 쉽게 물러설 수 없다.
영화는 식어버린 연애 감정과 부부의 이혼이 교차되며 동병상련을 더한다. 2주년에 헤어진 남자친구 집에서 지은은 먹고 자며 가족같이 지낸다. “아직도 안 갔냐? 아.. 좀 가! 나 이제 너 싫어졌다고!”라고 말하는 민규. 지은의 행동만 보면 낯짝도 두껍다란 말이 절로 나온다. 그러나 낯짝이 두꺼운 사람은 지은이 아닌 민규다. 미안하다는 한마디로 관계를 끝내면 다일까. 마지막의 반격은 그래서 더 통쾌하다.
어느덧 전혀 관계없을 것 같았던 지은과 민규의 연인 관계와 민규의 어머니와 아버지의 부부 관계가 맞물린다. 헤어지고 사귐을 반복하는 연인 사이에서 일어날 법한 사례를 빗댄 촌철살인이 돋보인다. 배우로 알려진 조은지의 감독 연출작이다.
<5월 14일>은 누군가의 관심을 받고 싶은 민정(이상희)의 외로운 하루다. 5월 14일은 민정의 생일이지만 아무도 챙겨주지 않는다. 생일보다 더 중요한 집안 대소사가 있는 날이기 때문이다. 이 날은 동생의 결혼식과 석가탄신일이다. 누구에게는 너무나 바빠 하루가 짧은 주말이지만 민정에게는 초라한 시간이 상대적으로 긴 하루다. 믿었던 남자친구마저 일이 있다고 일찍 올라갔다. 회사에서는 아까부터 일거리를 독촉하고 난리다. 민정은 서운하지만 크게 내색하지 않는다. 남은 하루 동안 누군가에게 진심 어린 축하를 받으면 족하다.
생일. 매년 돌아오는 날이라지만 그냥 넘어가면 섭섭한 날이 생일이다. 세상이 살갑지 않을 때, 모두가 나를 등 돌릴 때 유독 생일에 집착하게 된다. 이 날 만큼은 내가 어떤 일을 해도 생일이란 이유로 용서받을 수 있는 일 년에 한 번밖에 없는 날이다. 모든 축복과 관심을 오롯이 받고 싶다. 기프티콘으로 생일 축하를 대신하기보다 전화 목소리로 들려주는 생일 축하, 만나서 밥 한 끼 먹는 온기가 고프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유독 이번 생일에는 적용되지 않는가 보다. 더디고 힘든 하루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실망만 쌓여 터벅터벅 걷다 들어간 구멍가게에서 오직 나만을 위한 스포트라이트가 준비되어 있었다. 위로는 거창한 게 아니다. 진심 어린 한 마디, 내게 가장 소중한 무엇을 나눠 줄 때다. 그 진정성이 그대로 전해지는 결말이다.
<환불>은 취업 준비를 마치고 합격했지만, 거짓말처럼 입사 취소를 받은 수진(조민경)의 이야기다. 영화는 편의점에서 한 달 생활비를 걱정하는 수진을 비추며 불안을 예고한다. 수진은 고시원도 나온 상태다. 갑자기 눈앞에 닥친 현실은 입구는 있지만 출구가 보이지 않는 미로에 갇힌 기분이다. 짐짝처럼 느껴지는 캐리어. 골목 한 구석에 버리고 오고 싶은 수진의 무거운 마음을 대변한다. 필요하지만 지금 당장은 애물단지로 전락 캐리어는 끓어오르는 수진의 마음처럼 터져버린다.
결국 스터디 그룹을 찾아 행패 아닌 행패를 부린다. 주었던 문제집을 다시 받고, 냈던 스터디비도 환수한다. “네 사정은 이해하는데 좀 이기적이다..”라는 말을 들어도 어쩔 수 없다. 수진의 행동은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화풀이하는 격이다. 친구의 직언에 수진은 해당 기업을 찾아가기로 마음먹는다. 과연 제대로된 화풀이를 할 수 있을까.
영화는 사회의 부당함을 개인 스스로 감수해야 하는가를 묻고 있다. 원하는 대학이나 기업에서 돌연 합격 취소를 받는 일이 종종 일어난다고 한다. 그때 받는 충격과 분노, 허탈함은 혼자 감내하기 벅차다. 시종일관 수진의 감정 같은 톤은 애써 훌훌 털고 내일을 기다리며 끝난다. 환불하러 간 옷 가게 사장님의 선의를 느꼈기 때문이었을까. 구매를 취소하는 환불이 입사 취소와 같아서일까. 같은 날 3천 원을 갖고 옥신각신하던 수진은 따뜻함을 채워 나온다. 사회는 이보다 더한 일도 더러 겪어야 하는 정글의 세계다. 다시 시작하고자 하는 수진에게 조언하고 싶다. 누가 욕하더라도 좀 더 자신을 챙기기 바란다고 말이다. 정글에 뛰어 들기 전에 가끔은 이기적이어도 된다고 말이다.
<대자보>는 부당함에 맞서 싸우는 문학 동아리의 이야기다. 교비 횡령과 학점 특혜를 고발하는 대자보를 건 학생들은 부조리에 맞서 할 말은 하고자 실명을 썼다. 하지만 그때의 패기는 사라지고 회장 혜리(윤혜리)에서 남은 것은 출석요구서다. 한 편, 신입생이 들어오자 부원 민영(이민영)은 규칙을 설명하며 동아리의 취지를 설명한다. 누가 썼는지 알 수 있게 이름을 쓰자는 이야기에 혜리는 소심한 변명을 늘어놓는다. 설마 했던 박 교수가 학생을 고발했기 때문이다.
영화는 부정입학을 처음 거론한 이화여대 학생들을 떠올리게 한다. 사회 문제에 목소리를 내는 청춘의 단상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느낌이다. 학교를 나와 우리 사회에서 부당함에 맞서는 여러 이야기로 확대해 볼 수 있겠다. 혜리는 학점이 떨어지고 불이익을 받을 수 있지만 누군가는 계속 불이익을 받기 때문에 계속 써야 한다고 말한다. 가치관이 흔들리는 상황에서 나는 어떤 선택을 할지 고심하게 된다. 잘못된 것을 알지만 침묵했다면 암묵적인 동의일 수 있음을 시사하기도 한다. 때문에 앞선 세 영화와 결이 약간 다르다. 흑백 화면과 롱테이크, 4:3 화면 비율은 영화의 완성도를 높인다.
다양한 테마 안에서 차분히 여성을 응시하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화법은 관객의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하다. 자연스러운 연기와 어딘가 있을 법한 캐릭터를 이용한 관계의 성찰이 돋보인다. 네 여성 감독은 지금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현실 그 자체이며 영화를 통해 끊임없이 말하는 화자다. 금방이라도 집어삼킬 듯한 비바람이 멈추고 갑자기 잦아들어 맑게 갠 하늘처럼. 각자 태풍의 눈을 품고 있는 빛나는 가능성이 보인다. 영화는 끝났지만 계속해서 삶을 살아갈 캐릭터의 뒷이야기가 궁금하다. 과연 조금 나은 내일이 되었을까. 함께 공감하고 함께 응원하고 싶어진다.
평점: ★★★★
한 줄 평: 내 이야기 같아 공감할 때 영화는 삶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