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년 만에 국내 최초 정식 개봉한 <피아니스트의 전설>는 ‘쥬세페 토르나토레’감독의 연출, ‘엔니오 모리꼬네’의 음악, 아르헨티나의 작가 ‘알렉산드로 바리코’의 《노베첸토》를 영화로 만든 작품이다.
영화는 쥬세페 토르나토레와 엔니오 모리꼬네의 합작으로 만들어진 작품 중에 유독 덜 알려졌다. 우리나라에는 정식 개봉되지 않아 팬들을 중심으로 소문난 명작 중 하나였는데 4K 디지털 리마스터링으로 관객과 만날 수 있게 된 것.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과 배우들의 섬세한 표정연기 때문에 스크린에서 꼭 관람하길 권하는 의미 있는 영화라 할 수 있다.
영화는 전설이 되어버린 한 남자의 일생을 친구 맥스(푸루이트 테일러 빈스)의 입을 빌려 풀어낸다. 맥스는 나인틴 헌드레드를 바라보는 관찰자이자 유일한 친구, 세상으로 통하는 통로, 유능한 스토리텔러다.
타이타닉과 맞먹는 버지니아 호는 유럽과 미국을 오간다. 배에는 상류층, 이민자, 노동자들이 타고 있었는데 어느 날 일등석 피아노 위에 한 아이가 발견된다. 아이를 최초로 발견한 대니(빌 넌)는 아기가 담겨 있던 레몬박스와 자신의 이름, 그리고 태어난 세기를 붙여 짓는다. 이름하여 ‘대니 부드먼 T.D 레몬 나인틴 헌드레드(팀 로스)’다. 지난 세기에 태어나 다음 세기에 발견되었으며 새해 첫 선물인 고귀한 생명이다. 백인 아이는 척박한 기관실에서 흑인 노동자 대니의 손에서 길러진다.
하지만 기구한 삶은 그마저도 허락되지 않는다. 아빠가 죽고 본격적인 배 위의 삶이 시작된다. 흔들리며 시끄럽고 위험한 배. 여행객에게는 설렘과 이민자에게는 부품 꿈을 선사하는 버지니아 호다. 이 배에는 천재 피아니스트로 정평 나 있는 나인틴 헌드레드가 살고 있다. 그는 무슨 일인지 배에서 절대 내리지 않는 사람으로 유명하다. 한 번도 음악을 배워본 적 없지만 태어남과 동시에 연주해야만 하는 운명, 절대음감을 가진 천재다.
영화는 음악과 예술, 사랑이라는 테마로 흐르며 잊지 못할 명장면을 선사한다. 첫 번째가 나인틴 헌드레드와 맥스가 조우하는 장면이다. 처음 승선한 트럼펫 연주자 맥스는 뱃멀미로 힘들어하던 중 나인틴 헌드레드를 마주친다. 나인틴 헌드레드는 피아노 고정쇠를 풀고 흔들리는 배 위를 유랑하듯 노닐며 연주한다. 마치 피아노로 추는 왈츠 같다. 이때 흘러나오는 음악은 ‘매직 왈츠’다. 아름답고도 환상적인 이 장면은 유일한 벗을 만나는 결정적인 순간이다.
두 번째는 재즈 피아니스트 '젤리 롤 모턴(클라렌스 윌리엄스 3세)'과 벌이는 연주 배틀이다. 재즈의 아버지라 불리는 재즈 피아니스트가 호기롭게 배에 오른다. 그는 타오르는 담뱃재가 떨어지지 직전까지 혼신의 연주로 자기 명성을 과시한다.
하지만 나인틴 헌드레드는 오히려 그를 칭송하기 바쁘고, 음악을 즐기는 듯 여유롭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천재성을 드러내며 무아지경의 연주를 펼친다. 그 장면을 지켜보던 수많은 관객의 표정과 몸짓 하나하나가 웃음을 유발한다. 흥미로운 점은 배우 팀 로스는 피아노를 한 번도 쳐본 적이 없다. 이 장면을 위해 6개월 동안 피나는 연습을 통해 배웠다고 한다.
세 번째는 처음이자 마지막인 소녀를 보고 사랑에 빠지는 순간이다. 맥스는 연주되는 순간 휘발되는 음악과 명성이 안타까워 음반 제작자를 태워 녹음을 진행한다.
이때 마법처럼 한 소녀의 모습을 관찰하던 나인틴 헌드레드는 피아노를 연주하는 순간 소녀를 사랑해 마지않는다. 그 찰나의 순간을 피아노의 섬세한 음계로 표현한다. 듣는 순간 연정을 품은 음악임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는데 발레 하듯 창문 너머 갑판을 오고 가는 소녀를 따라 나인틴 헌드레드의 눈이 반짝인다. 가장 사랑스러운 장면이거니와 이루어질 수 없는 안타까움이 차오르는 명장면이다.
아이처럼 순수한 나인틴 헌드레드는 삶을 즐길 줄 안다. 배에서 태어나 한 번도 육지를 밟아보지 않았다. 전 세계를 여행했지만 어디도 닿지 않는, 고이지 않고 흐르는 인생을 산다. 88개의 유한한 건반으로 무한한 음악을 만들며 고정된 세상에서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을 비웃기라도 하는 말이다. 육지에서의 평범함(열린, 유한함)보다 배 위에서의 특별함(닫힌, 무한함)을 택한다. 전쟁을 겪어 망가진 버지니아 호가 바다 한가운데서 폭발의 운명을 맞이할 때도 물러서지 않고 당당히 품위를 지킨다.
나인틴 헌드레드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끝을 향해 달려가는 자신의 운명이 배와 같음을 예견했다. 세상을 다 탐험해 보지 못한 아쉬움 보다 세상의 끝을 보고 싶은 심정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순간이다. 인생은 광대하다는 어느 여행자의 한 마디에 우정과 사랑, 꿈을 이루려 했던 한 남자의 기구한 인생 스토리는 큰 울림을 준다.
세상을 다 돌아다녔지만 어디에도 없었던 남자. 그는 용기를 내어 육지를 밟으려 했지만 끝내 배로 돌아온다. 이 장면은 꽤나 잔인한 장면이다. 아마도 출생기록이 없어 땅에서 정착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나인틴 헌드레드에게 육지는 이상한 사람들이 사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이다. 호기심보다 앞선 두려움이 컸을 것이다. 게다가 배라는 특별한 공간에서 지내면서 한정된 사람과 사귄 탓에 다양한 인간 군상을 만나면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을지도 모른다.
배에서는 늘 혼자라는 외로움도 잠시만 참으면 된다. 물밀듯이 승선하던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 공허하다가도 이내 사람들로 채워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육지는 스스로 행동하지 않으면 아무도 찾아오지 않고 고립될 수 있다. 선수에서 선미까지만이 세상이라 믿고 살아갔던 나인틴 헌드레드에게 세상은 어쩌면 감당하기 힘든 그 무엇일지도..
배는 그가 만들고 꿈꾸던 세상 전부였고 음악은 유한한 세상에서만 연주할 수 있는 무한함이었다. 육지에 내려 수많은 길 중에서 하나를 택하고 단 한 사람과 정해진 땅에서 숙명처럼 살아가야 하는 인생은 답답함 그 자체였을 것이다. 음악을 향한 순수함을 간직한 천재의 일생은 안타까움과 경이로움을 동시에 안겨주는 긴 여운의 마스터피스로 충분하다.
평점: ★★★★☆
한 줄 평: 자신이 만든 세계에서 태어나 끝맺은 안타까운 천재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