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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혜령 Sep 12. 2018

<나비잠> 언젠가 기억에서 사라진다고 해도..

© 나비잠 / 정재은


참 아름다운 연인의 로맨스입니다. 교수와 제자의 사랑, 알츠하이머가 가져다준 시련. 어떻게 보면 통속 적일 수 있는 줄거리 탓에 쉽게 눈에 띄지 않을 수 있는 이야기인데요. 뻔한 내용도 다듬어 내는 세공 능력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영화가 있습니다. .

영화는 기억을 잃어하는 소설가 '료코(나카야마 미호)'와 유학생 '찬해(김재욱)'가 만나 사랑과 성장을 겪으며 마지막 소설을 완성하는 줄거리를 갖고 있는데요. <고양이를 부탁해>, <말하는 건축가>의 정재은 감독의 신작이자, 한국과 일본의 대표 배우의 만남으로도 화제를 낳은 한일 합작 영화입니다.




집, 언어, 우연의 속삭임
© 나비잠


영화는 꾸준히 건축에 관한 영화를 만들고 있는 정재은 감독의 작품답게 주인공 '료코'의 집을 영화적 볼거리로 완성했습니다. 녹음이 짙은 정원, 조용히 때로는 과감히 들어오는 햇살, 탁 트인 공간과 바람을 느낄 수 있는 창, 한 번쯤 가져보고 싶은 2층 그라데이션 서재 등. 건축과 책에 관심 있는 분들에게 어필될만한 미장센을 구현합니다.




© 나비잠


료코는 성공한 작가지만 기억을 잃어가는 유전적 알츠하이머에 걸렸습니다. 반면 찬해는 일본 소설에 매료되어 무작정 일본에 유학 온 작가를 꿈꾸는 가난한 학생입니다.

두 사람은 연인이자 상반된 길을 걷는 운명을 타고났습니다. 료코가 소멸과 퇴색이란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면, 찬해는 성숙과 성장이란 오르막길을 걷는 시점이죠. 두 사람은  '소설'이란 접점을 통해 이해와 사랑을 확인합니다.


활자가 만들어 준 인연은 견고하기 짝이 없습니다. 책은 기억을 남길 수 있는 매체 중 하나죠. 사라져버릴 기억을 글로 남기는 영원성, 둘의 사랑을 상징하는 메타포입니다.  서재가 좋으면 글이 잘 써진다는 극중 대사처럼, 채도별로 정리된 료코의 서재는 놀랄만한 미장센으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정말 아름다웠어요.




소설과 건축, 사랑의 공통점


언젠가 이걸 쓰지 않으면 안 된다는 때를 알게 될 거야.




소설은 활자가 켜켜이 쌓여 만들어진 집약체입니다. 집도 글과 같아서 견고하게 쌓고, 매만지고, 돌봐주지 않으면 낡아버리는 특성을 가지고 있죠. 료코는 집과 소설을 갖고 있고, 찬해는 겨우 몸만 누울 수 있는 쪽방에서 생활하며 등단을 꿈꿉니다.  둘은 우연히 서재에서 발견한 책처럼 서로를 발견하고, 서서히 사랑을 만들어갑니다. 이렇게 소설, 집, 사랑은 서로 다르기도, 닮기도 했습니다.  




© 나비잠



료코가 키우던 강아지 톤보가 이 공원에 흔적을 남겼다는 말을 찬해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료코가 이별을 통보한 이후 함께 만들어간 소설 《영원의 기억》이 세상에 나오자, 그때야 료코의 마음을 알아차립니다. 이 얼마나 로맨틱한 사랑고백일까요.

소설 속 소설의 액자식 구성을 취하며, 희미해지는  료코의 의식 때문에 후반부는 찬해에 의해 쓰였을지도 모릅니다. 찬해는 작가로 데뷔할 수 있는 성공적인 수업을 받았고, 료코는 삶이 바스러지는 순간에 선물 같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결론적으로 공원에 남긴 톤보의 흔적과 료코가 세상에 남긴 발자국, 찬해를 향한 마음은 동일선상에 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흔적을 세상에 남긴 우연의 인연을 의미합니다.



이야기의 근원은 내가 느낀 감정이라고 합니다. 좋은 작가란 우선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풀어낼 때부터 시작한다는 말이겠죠. 남이 쓴 글을 보지 말고, 내 글을 써야 하는 것. 텍스트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닌 촉감과 냄새가 풍기는 살아 있는 소설. 영화의 애틋함과 아름다운 화면 못지않게 문학적 성찰도 맛볼 수 있습니다.


© 나비잠



신파에 무작정 기대지 않고 담담한 먹먹함을 담아낸 오랜만의 정통 멜로 영화가 고픈 분들에게 추천합니다. 참, 정재은 감독의 장기인 건축의 매력을 느끼고 싶은 분들에게도 알맞은 영화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극중 료코의 집은 일본 건축가 '아베 츠토무'가 설계하고 직접 살았던 집이라 합니다. 영화 <나비잠> 뜻은 갓난 아기처럼 두 손을 머리 위로하고 달콤하게 자는 것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평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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