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혜령 Dec 20. 2020

<호프> 죽음 앞에서 나의 이름을 찾다

영화 <호프>는 북유럽 감성이 진하게 베여 있는 삶의 긍정성을 담고 있다. 오프닝에 '이 이야기는 내 기억 속의 기억이다'라는 자막이 인상적이다. 감독 마리아 소달이 7년 전 말기 암 진단을 받고 겪었던 경험을 토대로 만들었다. 여섯 아이의 엄마이자 공연 감독이었던 안야가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고 가족의 사랑과 본인 삶을 복기하기까지, 열흘 남짓한 시간을 담았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성공적인 공연을 마친 안야(안드레아 베인 호픽)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온다. 가족들은 북적이고 공연 평도 좋아 기분 좋은 잠자리에 들려는 참이다. 사실혼 관계인 토마스(스텔란 스카스가드)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최근 잠자리에 들고 아침에 일어날 때 머리가 아프다는 말을 꺼낸다. 다음 날, 대수롭게 느끼지 않았지만 급격한 시력 저하까지 더해지자 병원을 찾았다.    

영화 <호프> 스틸

의사와 상담을 하다 MRI까지 찍게 된 안야는 폐암이 뇌로 전이되었음을 진단받고, 심지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시한부를 선고받는다. 크리스마스 이틀 전 이게 무슨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인가. 너무 황당해 눈물도 나오지 않는 상황. 아이들에게는 알리지 않기로 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좋은 모습만 보이고 싶기 때문이다. 그렇게 크리스마스는 다가왔고, 아무렇지 않은 듯 처방해 준 약으로 버티고 있지만 메스꺼움과 두통, 불면증 등 몸이 말이 듣지 않자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된다.    


연휴지만 두 사람은 수술하면 혹여나 좋아질 수 있는지, 삶을 조금이나마 연장할 수 있는지 수소문하러 돌아다닌다. 안야와 토마스는 부부처럼 보이지만 사실혼 관계다. 서로 바빠 기회를 놓쳐버린 결혼식 대신 토마스의 아이 셋과 둘 사이의 아이 셋을 낳아 자식이 여섯인 대가족이다. 아이가 태어나고 서로의 부모님을 돌보고 일이 바쁜 만큼 둘의 사이는 소원해져만 갔다.     

영화 <호프> 스틸

하지만 안야의 투병을 계기로 둘은 만사를 제쳐 두고 콤비처럼 붙어 다닌다. 그러다 보니 서로 하지 못했던 솔직한 고백이 이어진다. 이런 상황은 마치 다큐멘터리같이 실감 나고 건조하다. 안야는 당신의 아이보다 내 아이를 더 사랑했다고, 솔직히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빼앗겨 본 적도 있었다고 털어놓는다. 내가 죽고 나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지 말 것을 당부하기도 한다. 몇 년 전 토마스가 한눈팔았던 때도 기억해 내며 허심탄회한 말들이 오고 간다.     


삶의 끝자락에 오니 살아왔던 세월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나는 잘살아왔던 것일까 통계 그래프나 파워포인트처럼 일목요연하게 정리되고 수치화되는 기분이다. 여섯 아이를 키우고 직업적 성공까지 이룬 이때, 하필 모든 것을 중단해야 한다니 믿을 수가 없다. 이 상황의 원인을 찾고 싶고 누구라도 붙잡고 하소연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안야는 현실적으로 행동한다. 남은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며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급기야 둘은 뇌 수술을 앞둔 12월 31일 결혼식을 올린다. 어디서도 듣도 보도 못한 특별한 결혼식을 준비하는 과정은 자신의 장례식을 준비하는 것처럼 담담하다 못해 숭고하기까지 하다. 하얀 웨딩드레스 대신 진녹색 드레스를 입고,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길 선언한다. 

영화 <호프> 스틸

한 해의 마지막 날 밤, 조촐하게 지인들이 모여 결혼식을 올린다. 이날은 안야의 생일이기도 해 더욱 특별한 의미가 있다. 생일, 결혼기념일, 한 해의 마지막 날이 모두 한 날이기에 여러 번 준비할 일도 없고 의미도 배가 된다. 자신을 포함해 가족 모두에게 잊을 수 없는 기념일을 만들어 주기에도 안성맞춤이다.    


영화는 절망이 코앞까지 왔을 때 대처하는 의연한 자세를 보여준다. 그야말로 '오늘 하루도 소중히'라는 말을 실감케 한다. 살기 위해 버둥거리거나, 버킷리스트를 만들어 실천하는 뻔한 결말은 걷어냈다. 되도록 차분하게 가족과 자신을 위해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 우리나라 정서와는 아주 다르다. 운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도 없고, 무엇을 탓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시간도 짧다. 그저 남은 시간을 의미 있게 쓰면 그만이라고 말하는 자세가 사뭇 낯설지만 의미심장하다.    


절망 속에서도 작은 희망을 곱씹는 진심 어린 위로가 전해진다. 사실적이고 세밀한 감정 묘사가 슬프지만 따뜻함이 느껴지는 여운도 크다. 나는 그동안 무엇을 하며 살았고, 일 년 동안 어떻게 보냈나 영화를 보고 난 후 많은 생각이 교차한다. 아내, 엄마로 살아오기 이전, 여성이자 나에 대한 성찰까지도 떠올려 볼 수 있다. 어느 때보다 혹독했던 2020년을 보내고 있는 지금, 크리스마스와 연말연시라는 특수한 시간과 겹치며 한 해를 마무리하기 좋은 영화다.


평점: ★★★☆

한 줄 평: 북유럽 감성, 차갑지만 매우 뜨겁다

매거진의 이전글 <언플랜드> 낙태상담사에서 생명운동가로 전향한 실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