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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혜령 Jan 31. 2021

<관계의 가나다에 있는 우리는> 너와 나의 관계의 지칭

너와 나 우리의 관계는 어디쯤 와 있을까. 아리송한 제목의 의미를 알아차릴 때쯤 영화는 결말에 다다랐다. 관계의 '가나다'는 무엇이었는지 알게 된 순간 참 예쁜 말이라는 생각을 했다. 한글에도 순서가 있듯이 관계에도 순서가 있다는 것.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발상이었다.    


영화는 독립 다큐멘터리를 찍는 민규(은해성)와 캐나다에서 피겨 유학을 중단하고 들어온 한나(오하늬), 그리고 친부모를 찾아 고국에 온 프랑스 입양인 주희(이서윤)의 전혀 다른 이야기를 연결한다. 공통점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을 것 같은 세 청춘은 다큐멘터리(영화)라는 매개로 한데 어울려 한국 사회 곳곳을 누빈다. 다소 무거운 이슈를 다루고 있지만 지금 막 시작하는 연인들처럼 풋풋함과 훈훈함이 전반적인 분위기를 형성하는 탓에, 보고 나면 오히려 기운이 샘솟는다. 최근 본 영화 중에서 이야기의 힘이 느껴지는 사랑스러운 영화였다.  

   

매번 제자리걸음인 불안한 청춘    

영화 <관계의 가나다>에 있는 우리는

다큐멘터리가 좋아 시작한 일이지만 민규는 밀린 월세와 독촉 고지서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어쩔 수 없이 생명과도 같은 카메라를 중고시장에 내놓는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도 늘 제자리걸음만 하는 것 같아 고민이 큰 청춘이다. 당장 생계가 앞서는데 이 일을 계속해야 할지 그만둬야 할지 답답한 마음이 앞선다. 그러다 독립다큐를 찍는 선배의 권유로 콜드콜텍기타 파업 노동자들의 현장을 찾으며 다양한 삶을 경험하기에 이른다.  

   

이들은 고된 노동이었지만 꿈의 공장이라 불렀었다. 하지만 회사는 값싼 임금을 찾아 해외로 공장을 돌렸고 부당 해고에 맞서 거리로 나왔다. 창문도 없는 공장에서 오로지 최고의 기타를 만든다는 자부심으로 일했지만 회사는 그저 한낱 기계로밖에 보지 않았다. 이들은 13년이란 긴 시간 동안 다시 일터로 돌아가고 싶다는 투쟁을 벌이며 송전탑에 올랐다.     


민규는 다큐를 찍으며 알지 못했던 이야기에 흥미를 느끼게 된다. 한국전쟁 당시 남편을 두고 피난하러 와 70년이 지난 지금까지 만나지 못한 할머니의 사연, 프랑스로 입양되었다가 한국에 친부모를 찾아온 주희의 사연을 접하며 책에서 배울 수 없는 것들을 배워 갔다. 이 사연은 부당하고 뼈아프지만 한국 사회에서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슈였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길고 지루한 싸움이자 국가 폭력의 희생자의 이야기였다.     


각자의 사연이 한데 모이는 마법    

영화 <관계의 가나다에 있는 우리는> 스틸

마치 이 세 이야기는 비빔밥의 나물처럼 고추장을 통해 한데 섞인다. 서로 몰랐던 사람들이 관계를 맺으며 하나씩 단계를 쌓아갈 때 나누게 되는 분위기가 잔망스럽게 베여있다. 한국 영화에서 좀처럼 다루지 않는 해고노동자, 실향민, 해외 입양인 캐릭터는 낯설지만 신선함을 더한다. 민감한 사회문제를 극영화 형식으로 끌어와 내 이야기처럼 풀어냈다. 노동 계급, 빈민, 노숙자 등의 주제를 사실적으로 그린 ‘켄 로치’의 영화가 연상되기도 했다.     

그리고는 관계의 가나다를 시작하는 청춘에게 묻는다. 경제적 불안감을 제쳐 두더라도 꼭 하고 싶은 일, 돈은 안되지만 같이 일하는 사람과 현장 분위기에 이끌려 매일 출근할 수 있는 일이 있냐고 말이다. 행여 현실에 부딪혀 좋아하는 일을 못 하고 살아갈지라도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아는 것만큼 의미 있는 일도 없다고 위로한다. 평생 그것마저도 찾지 못한 채 인생을 허비하는 사람도 많기 때문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좋아서 시작한 일 속에서 꾸준한 관찰을 하다 보면 생기는 관심을 집중해보라 권한다.    


이인의 감독의 패기 넘치는 연출은 우리 사회가 숨기고 싶어 하는 이슈를 알리기에 충분했다. 들리지 않는 목소리에도 귀 기울여 듣는 태도를 가지라는 특별한 어법이 인상적이다. 사회는 드러내고 싶지 않은 이슈를 아예 부정적으로 만들어 버리거나 타자화를 해 오랫동안 관심을 분산하도록 해왔다. 민규가 첫 촬영을 나갔던 콜트콜텍 노동자 인터뷰에서 오디오가 고장 나버려 인터뷰를 망쳤던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어떤 일이 벌어진 결과나 진행 중이라는 사실만 말할 뿐, 그들이 왜 그렇게까지 해야만 했는지 그 이유는 묻지 않는다. 아예 목소리를 지워버림으로써 묵인한다.    

영화 <관계의 가나다에 있는 우리는> 스틸

영화를 통해 느낀바가 한 가지 있다. 관계를 시작하기 전 너무 자주, 그리고 많이 내 이야기만 하려 한 건 아닐지,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하고 소통하는 방식을 찾아 나설 용기를 내어 보겠다는 것. 최근 친해지고 싶은 사람이 있거나 소원해진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과 나는 관계의 어디쯤 있나 점검해 보는 것도 좋겠다. 너와 나, 일과 사랑, 꿈과 현실의 거리는 가나다라마바사.. 끝과 시작 그 사이 어디에 있을까. 오늘도 그 자리를 찾아 맴돌고 있는 청춘에게 이 영화를 권한다.


평점: ★★★

한 줄 평: 다큐와 극영화 사이 신선한 연출이 돋보이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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